마가복음은 총 16장의 복음서입니다. 대다수의 학자는 최초의 복음서라는 것에 동의를 합니다. 마가라는 사람은 왜 굳이 복음서를 썼을까요? 먼저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다수의 자료를 인용하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말이든 글이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가르침 이야기, 수난 이야기 등이 떠돌아다녔을 가능성이 높아요. 마가는 이를 자신의 방식에 근거하여 통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어왔던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된 방식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요.
아마 크게 두 가지의 원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파괴 사건입니다. 로마제국과 유대민족의 혁명군 사이의 커다란 전쟁이 일어납니다. 성전은 초토화가 됩니다. 이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모모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유대인 중의 분파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고, 또 때로는 평범한 유대인들과 거리를 두며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가꿔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마 둘 모두 공존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앞에서 전쟁에 휘말렸던 것 같습니다. 유대민족 혁명군 편에 서야만 하고, 그들이 외쳐왔던 다른 종류의 메시아를 추종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우리는 메시아 예수의 길을 간다며 결국 새로운 길을 예수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하나는 대중 가운데 떠돌아다니던 예수님의 자료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마가가 복음서를 구상하면서 공을 들이는 부분은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면서도, <기적 이야기>를 <수난 이야기>의 전개 안에 두려는 태도입니다. 더군다나 기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지 못하며,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기존의 통념에 근거하여 해석하는 풍토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자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자료를 접했지만 실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는 이들은 없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마가는 수난 이야기의 전체 서사 위에서 예수님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도록 복음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 간 것 같습니다.
<깨닫지 못함>
그래서 그런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가 <깨닫지 못함>입니다.
일단 마가는 처음부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정답을 가르쳐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덧붙여지는 서두의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찢어지면서 예수님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어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고 마귀의 시험을 받을 차례죠? 하지만 마가복음은 디테일한 과정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들짐승과 함께, 또한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면서 궁극적으로 마귀의 세력을 정복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독자들을 <인식적 우위>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예수님을 오해합니다. 자칫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의 오해에 동조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마가는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고,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으시며 그 정체성을 확인해주셨고, 결국에는 마귀를 승리할 신적존재라는 사실을 들려주고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는 뒤집어서 말하면 그만큼 등장인물들의 오해, <깨닫지 못함>이 마가복음 이야기 속에서 반복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오해는 중풍병자를 고치는 이야기(2:1-12) 속에 등장하는 서기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더 깊이, 바르게 이해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마가복음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종교지도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기 전에 의도적으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세요. 이는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의를 서기관들은 결코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신성 모독”이며, “하나님 한 분”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해요. 뿐만 아니라 오해가 아닌 것처럼 나오는데도 오해라고 몰아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거룩한 자(1:24)”라고 고백해요. 틀린 고백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는 오해를 유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침묵을 촉구하세요.
반복적으로 침묵을 요구하시다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알릴 것>을 허락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라사 광인(5:1-20)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낸 이후에 그에게만큼은 침묵을 촉구하지 않으세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비밀이 한 꺼풀 벗겨졌거든요. 앞에서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오해받을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세계인 거라사 지역으로 넘어가 축귀를 행하시고 나서는 더 이상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곡해될 여지는 사라졌습니다. 마가복음의 서사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차단합니다. 유대인들만의 메시아로 한정짓지 말라는 겁니다. 오병이어의 이야기(6:30-44)와 일곱 개의 떡 이야기(8:1-10)도 동일한 의미를 향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향한 생명의 떡이라는 주제를 알려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한 오해는 <메시아>라는 직무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8:22-10:52)에서 드러나는 것은 제자들의 오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메시아께서 왕위에 즉위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왕위에 즉위하는 순간은 십자가입니다. 강도들이 좌편과 우편에 앉을 뿐이에요. 고난과 죽음의 메시아 직무에 대한 가르침을 세 번이나 하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은 알지만, 고난과 죽음의 메시아 직무에 대해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제자들 전부가 사실은 예수님의 직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에요.
결국 예수님의 메시아 직무는 결국 고난과 죽음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함께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곡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한 예수님의 메시아 역할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함께 열려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곡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기적 이야기를 수난 이야기 아래에 배치함으로, 예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 아래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 침묵을 요구하신 이유, 깨닫지 못하느냐고 비판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부자-외부자>
메시아 예수에 대한 오해와 함께 반복되는 주제는 <내부자-외부자> 구도입니다.
마가복음의 비유 이야기(4:1-34)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말씀을 가르치세요. 하지만 비유는 어떤 뜻인지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 물으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시며 외부인에게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세요. 반면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제자들이 나아오면 그 비밀을 알려줬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비밀을 아는 소수의 내부자들과 예수님의 비밀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다수의 외부자들 구도가 형성이 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내부자-외부자의 구도를 사용하면서도, 반복적으로 내부자-외부자를 도치시켜버립니다. 자연스럽게 내부자라고 알려져 있던 사람들조차도 비밀을 채 깨닫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용도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응당 독자는 “누가 내부자야? 누가 비밀을 아는 사람이야?” 질문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내부자들은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혈육이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장면(3:31-35)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바깥에 있어요. 내부자일 것만 같은 사람이 사실은 외부자의 자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통념 하에 내부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으니 예수님께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요. 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내부자-외부자 구도가 뒤틀린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앞에서 언급했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들이니 누구보다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모릅니다. 내부자일 것 같은데 외부자인 사람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지도자들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을 오해하는 구도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극히 내부자라고 여겨졌던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8:22-10:52) 위에서 제자들의 오해가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내부자가 사실은 내부자가 아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수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간 장면(9:2-13)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찢어져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를 들은 사람은 없어보여요. 하지만 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 속에서는 세 명의 수제자에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려줍니다. 철저히 내부자라고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등장하는 이야기(10:35-45)를 보면 수제자 중 두 명이 보좌의 좌편과 우편을 구합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을 두고 다른 제자들 모두가 화를 냅니다. 내부자가 사실은 내부자가 아니라는 방증입니다. 의도적으로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8:22-10:52)을 맹인의 이야기로 감싸고 있습니다. 맹인은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즉 내부자라고 여겨졌던 제자들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며, 외부자라는 폭로가 묻어나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사람도 제자들 그룹에서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배신하는 가룟 유다를 지칭할 때에 “너희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해요. 핵심은 가룟 유다만 범죄를 행했다는 것이지 않습니다. 내부자라 여겨졌던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오해했고, 오해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라는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시지 않았다는 폭로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라 산 위에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세 명의 수제자는 모두 뿔뿔이 흩어집니다. 세 명의 수제자를 대체하는 것은 세 명의 여인(15:40)입니다. 내부자와 외부자가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이내 십자가 아래에 머물던 세 명의 여인들 또한 부활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떨며 아무 말도 못하게 됩니다(16:8). 전통적으로 마가복음의 결말은 16장 8절이라 알려져있습니다. 이는 과연 내부자가 누가 될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내부자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두 외부자가 되니까요. 하지만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권력자인 백부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15:39)합니다. 공회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15:43)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부자가 불쑥 튀어나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8:22-10:52)을 의도적으로 맹인의 이야기로 감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맹인을 치유해주실 수 있는 것처럼, 외부자로 세어버린 제자들의 무지와 곡해를 치유해주실 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내부자가 외부자가 될 수 있었다면, 외부자들 또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내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촉구하는 것이 마가복음의 수사적 전략이기도 합니다. 내부자라 여겨졌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오해하고 외부자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천천히 들려주면서 진정한 내부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인 동시에,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수행하는 메시아라는 겁니다.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죠. 또한 우리가 그 메시아의 길을 믿고 따라갈 때에야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믿고 따르는 내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설하는겁니다.
비유를 듣고서 예수님께 나아가 의미를 묻는 제자들이 기억나나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에 담긴 의미를 명확하게 해설해주셨을 겁니다. 어쩌면 마가복음이 예수 수난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명확하게 해설해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수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해하고 있었다면, 마가복음의 독자는 마가복음을 통해 거기에 얽힌 진정한 의미를 들을 수 있는 겁니다.
<성전 파괴 이후>
<깨닫지 못함>, 그리고 <내부자-외부자>구도가 핵심을 차지하는 이유는 당대 정치상황 때문일 겁니다.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함락하던 배경 속에서 유대인들은 전쟁의 영웅들을 메시아라 여겼습니다. 응당 그리스도인들 다수도 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 받았을거에요. 하지만 마가는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이때에, 예수는 결코 강도의 길을 걷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오히려 십자가라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메시아 왕위에 즉위하셨다는 겁니다. 이는 로마-유대전쟁의 양 진영과는 전혀 다른 제 3의 길입니다. 팍스로마나를 외치는 로마 황제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성전탈환을 주장하는 거짓 메시아들의 주장도 아닙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역설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는 오래된 진리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성전 파괴 이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기본적으로 마가는 성전파괴 이야기와 종말론 이야기를 구분할 것을 들려줍니다. 기본적으로 당대 사람들은 성전이 파괴되면 곧 세상의 종말이 올 것처럼 여겼거든요. 하지만 마가의 제언에 따르면 성전이 파괴되어도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고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13장은 두 가지의 사건이 얽혀있습니다. 먼저는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 당시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당시에 거짓 메시아들은 나름의 주장으로 세를 규합했습니다.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했습니다. 성전이 탈환되고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은 결국 이러한 성전과 연루된 전쟁이 일어날 때에 가담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귀결됩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마지막 때>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전이 파괴된다 한들 <마지막 때>가 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 깨어있으라(13:32-37)”는 말씀은 성전파괴가 연루된 전쟁에 가담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참고로 훗날 마태는 이와 같은 마가의 종말론적 서사를 받아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대하는 태도가 우리의 마지막 때 운명을 가를 것을 말합니다. 거시적인 메시아 전쟁보다는 미시적인 삶의 태도가 종말의 결과를 결정한다는 메시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마가는 일어나는 전쟁의 결말은 성전파괴로 이어지는 것이 사필귀정이라는 신학적 진단을 내립니다. 예루살렘은 두 번에 걸쳐서 종교지도자들을 파견하여 예수님의 정체를 확인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없음을 보시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합니다(11:12-14).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의 메시지입니다. 무화과 나무 저주의 결말은 그대로 이뤄집니다(11:21). 이는 결국 무화과 나무 비유와 함께 들려주는 성전폐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진의가 드러납니다. 성전은 한낱 강도, 이른바 혁명군의 소굴로 변질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예수님은 응당 이스라엘과 결부된 성전을 폐쇄할 것을 명하십니다. 성전이 우뚝 선 산을 바다로 던져버립니다. 오히려 죄용서는 서로가 서로를 용서함에 결부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마가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유대-로마 전쟁의 결말인 성전파괴는 이미 예수를 통해 예언되었음을 상기합니다.
덧붙여 마가가 들려주는 성전 종말의 이야기는 과부의 두 렙돈 사건과 연루됩니다. 가난한 과부는 성전의 헌금함에 두 렙돈의 돈을 넣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넣습니다. 현 성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받으십니다. 두 렙돈을 받은 결말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전의 종말입니다. 이는 결국 마가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와도 꼭 닮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루살렘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 공회와 함께 결의한 사안입니다. 예루살렘 핵심에서 진행된 일입니다. 그런 음모와는 무관하게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자신만의 소명을 갖고 십자가와 직면합니다. 이는 과부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넣는 두 렙돈과 유사합니다. 예수님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넣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을 통해(15:38) 성전을 폐쇄시킵니다. 이는 유대-로마 전쟁으로 일어난 성전파괴가 사실 이때부터 예언되었음을 들려줍니다.
이는 결국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를 이상향으로 제안하는 마가복음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구약의 종말론의 이상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이 돌아오셔서, 다윗의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가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지 않습니다. 본래 이방인과 유대인을 통합시키던 장소인 갈릴리를 향합니다. 그곳에는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갈릴리는 특정 지역이 아닙니다. 단지 <길>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정적인 장소를 떠나, 이방인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극복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모험의 길, 그곳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단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갈릴리로 향하는 길은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로 돌아가 자신의 무지와 오해를 돌아봐야 합니다. 헛된 야망에 매몰되어있었던 무지와 오해의 늪을 뚫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다시 인지해야 합니다.
마가가 꿈꾸는 공동체는 간단합니다. 십자가 고난의 길을 함께 걷는 공동체. 죽음이 기다릴지라도 부활을 고대하는 공동체. 이를 통해 남성과 여성,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을 극복하는 공동체.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본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마가복음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가는 서사의 출발점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작은 집에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는 그 순간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그 자신이심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속하시며 그들에게 법도를 가르쳐주시듯이, 예수님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하시며 새로운 말씀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고대하던 종말론적 현실입니다. 포로기를 기점으로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돌아오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백성이 원하던 바와 전혀 다른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갈릴리로 대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교회로 재형성하셨습니다.
이 놀랍고도 신비한 일을 들려주며 마가는 말합니다. “듣는 자는 깨달을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