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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무슨 죄요?

by 홍도사 2022. 7. 5.
 부제 : 레위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흥미롭게도 창세기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끝낸 이후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죄>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문제>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쫓겨난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다룰 때에는 두 번째 측면은 잘 다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측면만 주로 다루는 것 같아요. 그러니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근원적인 굴레에 쌓여있어서 지옥에 가게 되는데, <부모찬스> 비슷한 <예수의 십자가> 찬스 덕택에 지옥행을 면하고 천국행의 특권을 얻게 되었다 정도로 복음을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죄>에 대해서 다룰 때에는 두 번째 측면도 유심히 고려해야 합니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게 된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인류가 겪은 고질적인 문제니까요. 참고로 창세기 서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하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기록입니다.

레위기는 전반적으로 다섯 가지의 제사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 속죄제와 속건제. 사실상 모든 제사는 <번제>의 변형입니다. 번제는 기본적으로 하늘에 있는 신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동물을 불태워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소제는 동물 대신에 곡식을 태워드리고, 화목제는 일부만 태워드리고 나눠먹는다는 것이 다소 차이가 있지요. 이런 제사에 대한 배경설명을 마친 후에 이어지는 레위기의 서사를 잘 따라가다 보면 레위기 전체적인 맥락은 결국 <속죄제>에 대한 이해에 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속죄제>가 매년 <대속죄일>이라 이름짓는 새해 첫 날에 드리는 제사로 정형화되고, 이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속죄제>는 무엇일까요? 대다수의 학자들은 <속죄제>라는 단어를 <정화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속죄제>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정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정화할까요? 기본적으로 <성막>, 즉 하나님 계신 곳을 깨끗하게 씻겨내는 제사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지성소와, 성소와, 뜰로 구분됩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니 거룩하고도 위험한 곳이고, 그에 대한 방지책으로 지역이 구분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코로나에 비유하자면 <지성소>는 코로나 환자와 이를 돕는 의사가 거한 곳이고, <성소>는 코로나 환자와의 밀접 접촉자들이 검사를 받으러 오는 곳이고, <뜰>은 일반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지성소>는 하나님 계신 곳이기에 실수를 저지를 경우 죽음에 이르는 처벌을 받을 위험이 높은 장소입니다. 또한 <지성소>에 이르는 과정이 단계별로 구분되어 있는 이유는, 지성소가 가진 <위험성>에 의해 피해받는 이들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범한 죄악의 경중에 따라 <뜰>에서부터 <지성소>에 이르기까지 오염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가벼운 죄일 때는 <뜰>이 오염되고, 매우 심각한 민족적인 죄의 경우에는 <성소>가 오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죄를 씻겨내지 않고 오염이 확대되면 <지성소>가 오염되고, 결론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지성소>에서 떠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성막>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무늬만 <성막>으로 전락해버리고, 그렇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 또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에스겔 8-10장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솔로몬 성전 곳곳에서 우상들이 높임받고 있었으며, 이는 결국 뜰과 성소와 지성소 전부를 오염시키는 결과를 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를 떠나 동쪽을 향해 이동합니다.

만약 매년 정기적으로 드리는 <대속죄일의 속죄제>가 정상적으로 드려졌다면 어떨까요? 선택받은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인 언약궤에다 <피>를 뿌려서 정화하는 작업을 실시합니다. 마치 원자로 중심부에 가서 위험요인을 점검하는 핵심요원에 비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을 대신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죠. 매우 탄탄한 보호장비를 착용한 이후에 하나님이 거하신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 <정화>작업을 실시하는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온 백성은 대속죄일 제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길 기다립니다. 그들이 만약 제 정신으로 제사를 드렸다면, 그들은 자신이 범했던 실수와 잘못을 청산하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더 나은 삶을 살았어야 했을 겁니다. 아모스, 미가, 호세아의 메시지를 투영해보자면,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길, 이른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일에 전력했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았고, 결국 몇 가지 제사로만 하나님이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실줄 착각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신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내 버리시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이후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이 돌아오시지 않았다>는 통념이 가득했습니다. (참고로 스룹바벨 성전 이후 예수님 시대까지 성전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성전이 지어지고, 이스라엘 나름의 자치권이 수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세기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은 “포로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의 통념과는 달리 그들의 포로기의 핵심은 “국권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다시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것”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말 그대로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당시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참고로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성전에 다시 돌아오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끝내 좌정하신 지성소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두 세명 이상의 모임으로 볼 수도 있고, 교회 공동체로 볼 수도 있고, 각자의 마음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결국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조상들의 죄악이 누적되어 성전의 뜰, 성소, 지성소가 점점 오염되었고, 실천과 따름이 없는 속죄제는 성전 전체를 정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하기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미 성전이 더럽혀진 상태에서 성전의 정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만약 성전이 모두 더럽혀지기 전이라면 속죄제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더럽혀졌고, 하나님께서 떠나신 상태에서는 해법이란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정화되지 않은 성전에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또한 정해진 해법이 없었습니다. 떠나시기 전이라면 속죄제라도 드려볼텐데요!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정화>를 행하시고, <임재>하시는 것 외에는 다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습니다.

이후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몸으로 직접 속죄제를 드린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인간의 대표라 볼 수도 있겠고, 메시아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건 결론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시 백성들에게 돌아온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났음을 그리스도인들은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하기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흠없는 수송아지의 피라 할지라도 다시 정화시킬 수 없었던 지성소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온전히 정화된 교회 공동체, 혹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로 대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새 이스라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만이 참된 성전이며, 예수안에 참된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해석의 층위야 다소 다양할 수 있겠지만, 결국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속죄제를 드리심으로 해결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떠나신 사건이, 하나님이 거할 수 없었던 자신들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했다는 체험적 고백일 겁니다. 예수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자신들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름받게 되었음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창세기 초반부에 있었던 <죄>의 사건의 두 번째 문맥을 상기시켜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죄>의 해결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웃들에게 저지른 각종 잘못을 해결해주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물론 신학적인 작업을 거친다면 그 또한 크게 다른 범주라고 보기는 힘들 겁니다. 내 이웃을 상하게 하는 일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상하게 하는 일이고, 끝내 하나님을 욕보이는 일일테니까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죄>의 해결에서, <죄>가 말하는 1차적인 맥락은 <하나님을 떠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해결하셨다고 말할 때에, 우리가 앞으로 지을 모든 이웃을 향한 잘못을 청산하신다는 의미로 읽기는 다소 어렵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더라도 결국 용서를 구하는 존재로 만드신다는 의미에서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결하신 <죄>는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선악과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류가 추방당했고, 포로기 사건에서는 솔로몬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습니다. 공통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던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괴리되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다고, 새로운 언약이 체결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떠나버리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죄>로 말미암아 자격을 박탈했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출애굽기에 만들어진 성막과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법 및 정결과 성결에 대한 법전의 의미를 탐구해보면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반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어떤 제사나, 예배나, 기도의 예식들이 이런 삶의 필요성을 대체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주어진 제사, 예배, 기도는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소명을 깨우치고, 우리 삶과 마음의 초점을 재조정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9:14, 새번역)는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지금껏 드려졌던 모든 속죄제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참된 속죄제에 우리가 참예했다면,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온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지 않겠냐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앞으로 모든 이웃들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말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겠다는 약속이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약속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역으로 우리는 이웃들이 함부로 대하더라도 그들을 존중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해결받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