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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 강해 #01 (막 1:2-3)

by 홍도사 2022. 9. 4.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저는 28살의 늦은 나이에 신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신학을 공부할 준비가 되어있었을까 회상해보면 잘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돈도 없었습니다. 영어읽기 실력도 형편없었습니다. 다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역량 정도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늦은 나이에 시작하면서 약간의 자격지심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서 늦은 출발을 만회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딱 그 시절로부터 1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오늘날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을 10년 전의 저에게 말해준다면 어떨까요? 10년 전의 저는 어떤 반응일까요? “와? 정말? 진짜? 내가?” 하면서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해도 늦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 감사할 것입니다.

반면 저는 오늘 감사하고 살고 있을까요?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철이 들고 어른이 되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것으로 고민합니다. 또 한편으로 10년 전의 저라면 무척 이루고 싶었던 성취들이 정말 아무렇지 않습니다. 신학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아동부나 유치부가 아닌 중고등부나 고등부를 맡고 싶었습니다. 또 조금만 나이가 먹었을 때에는 청년부를 맡고 싶었습니다. 새벽예배 설교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오후예배 설교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주일 대예배 설교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저는 모두 다 하고 있습니다. 책읽기, 글쓰기, 설교에 대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보다 감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더 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담임목사도 되고 싶습니다. 제 이름으로 된 책도 써보고 싶습니다. 유튜브는 기독교방송이든 영상으로 성경을 가르쳐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저의 바람이 이뤄진다 한들 저는 여전히 목마를 것이고, 저는 여전히 크게 감사하지 않을 것이며, 저는 조금만 지나면 권태스러움을 느끼며 지루해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가복음은 네 권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책입니다. 오늘날 성서학자들 대다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기본꼴로 하여 보강된 복음서라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성서학자들 중의 일부는 요한복음 또한 “마가복음”을 이미 알고 있으며 마가복음의 수많은 이야기를 창조적으로 변주한 복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보다 먼저 쓰여진 많은 신약성경 내의 문서들, 바울서신들을 살펴볼 때에 “복음”이라는 단어는 엄격하게 정의되지 않은채 조금은 서로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흔적을 발견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마가복음은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정의한 최초의 책이며, 아마도 마가복음이 기록된 이후에 많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마가복음을 기초로 “복음”에 대해 숙고했을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물이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 마가복음의 주제, 신학적 아이디어를 분석하고 배우는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이해에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 인물을 소개한다고 하면 그 인물의 탄생부터 다룹니다. 단군, 박혁거세 등등의 역사적 위인들은 다들 신화적인 탄생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와 누가복음이 전형적인 그 서사를 따라갑니다. 천사가 나타납니다. 성관계를 하지 않고 한 여인이 임신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전형적인 클리셰를 거부합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기발한 이야기를 전혀 모른다는 듯이 생략합니다. 1장 1절은 마가복음의 표제, 즉 제목입니다. 헬라어를 그대로 직역하자면 “시작,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입니다. 딱 들어봐도 책의 표제로 적절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후에 등장하는 2절은 뭐라고 말하나요? 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구약성경 중의 하나인 예언서 이사야의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해야 합니다. 왜 복음에 대해서 소개하는 책인데,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하는 책인데, 왜 마가는 의도적으로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는걸까?

우리가 이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적, 정신적, 신학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까닭은 신학적으로 신앙을 재건하였고, 그에 기반하여 스스로의 위기를 잘 수습한 까닭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붕괴와 함께 철저히 무너진 그들의 신념을 재건한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사야의 예언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서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이런 참극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특정 시점이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들의 대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선물하실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첫 번째 사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다수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뤄질 두 번째 사실에 대한 기대를 안고 다시 율법을 기록하고, 암송하고, 외우며 버텼습니다.

두 번째,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유대인 통치가 사실상 실패에 이르렀던 시점이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라는 유대인이 아닌 통치자를 통해서 유대인을 통치하려고 했고, 제사장 그룹을 사실상 은밀히 지원하면서 유대인을 다스리는 정치는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열심당은 사실상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유대인들의 항쟁의지를 규합했습니다. 그들은 군사적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로마와 전쟁을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유대-로마전쟁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귀결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와 같은 로마와의 전쟁을 꿈꾸는 열심당의 정치노선과 반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폭력은 결코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두 가지의 사실을 뭉쳐서 생각해봅시다. 이사야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특별한 시점에 직접 찾아오셔서 유대인들의 대적을 무찌르고 승리를 선물하실 것입니다. 하여,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로마 전쟁을 통해 로마에 항쟁하는 것이야말로 이사야서에 기록된 미래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로마와 전쟁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길이 결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에 맞서 로마와 전쟁하는 길이 아닌 참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길,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길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그 길에 대해서 해설하고자 시작부터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라는 말로 시작하여, 이사야서의 글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그 길은 어떤 길일까요? 

잠깐 이사야서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에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까지는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대리인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사야서는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실 것이라 말합니다.. 강한 자로 오셔서 그 힘과 능력을 온 세상 가운데 펼쳐주실 것이라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과 싸워 맞서 이길 것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적들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같은 제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 있는 영적세력들을 모두 통칭합니다. 당시 이사야 예언서를 곱씹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상상을 했을까요? 진짜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오셔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자신들을 괴롭혔던 모든 제국 이면에 있었던 악한 영적세력들이 청산되는 날들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영적 전쟁, 우주적 전쟁이 펼쳐질 것이며, 그 날에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실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놀랍게도 이사야서에 기록된 “영적 전쟁, 우주적 전쟁에서의 승리”가 지금 이뤄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만방에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길은 로마에게 항쟁하는 방법을 통해 일어나게 될 그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일어났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이 말하고 있는 (이미 일어난)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2절을 보십시오.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길”이라는 단어를 가져와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찾아오시는 길”이라는 사실을 은밀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일어난 사건은 바로 (33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즉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잘 믿겨지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우리는 찬양합니다. 무수히 많은 설교를 듣습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것과 우리의 죄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친히 강림하셨다면 (이사야서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만방에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능력있으신 분이신지 입증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이 땅에 강림하신 후에 능력을 입증하신 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고난을 통해 입증하십니다. 죽음을 통해 입증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그 때나 오늘이나 결코 이해가지 않는 사건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땅에서 고난당하셔야했는가? 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죽음을 당하셔야 했는가?

흥미롭게도 그에 대한 해설이 덧붙습니다. (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 가운데 입증하고자 하는 능력의 종류는 바로 섬김의 능력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고 죽기까지 섬김의 능력을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섬김의 능력은 너무나 위대하기에 세상이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부활을 통해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한 이 사건이, 정녕 하나님께서 온 세상 가운데 직접 찾아오시는 구원의 길이며, 능력을 펼치시는 길인지 우리는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후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맹인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맹인은 예수님을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그를 꾸짖자 그는 더 큰소리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게 강청합니다. (51절)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52절) 그는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따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입니까? 간단합니다. 우리는 모두 맹인이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셔서 능력을 입증하시고 구원하신 길”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맹인이기에 예수의 십자가와 우리의 삶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맹인이기에 예수님을 보고 그가 하나님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눈이 떠지게 되면 우리는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걸으시는 그 길이, 고난과 죽음을 감내하러 떠나는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인간 세상이 찾아오신 그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섬김의 능력을 온 만방에 입증시키는 사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눈이 떠진다면 말입니다.


다시 저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저는 제가 실수하지 않는 이상, 또한 제가 지금껏 계속 했던 것처럼 노력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이상, 지금보다 더 좋은 목사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껏 제가 이뤄왔던 목사의 성취보다 앞으로 더 많은 성취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목마를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면 더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면 그 교회가 이전보다 더 크고 성장하고 부흥하길 원할 것입니다.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성취를 일궈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많은 성취를 이룬다 한들 만족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며 이전보다 더더욱 갈급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민낯입니다. 목사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목사라도 예수에 구원이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업적 성취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머리로는 예수에 구원이 있다고, 십자가에 구원이 있다고 믿고 고백하겠지요. 하지만 제 몸과 마음과 뜻 전체가 정녕 그렇게 생각하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눈이 먼 맹인과 같습니다. 저는 코인투자를 통해 대박나고 싶은 욕망은 없습니다. 주식투자나 부동산투자를 통해 돈을 벌고 싶은 욕망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남들보다 조금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더군다나 목사니까요. 하지만 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보다, 십자가보다, 저의 직업적 성취에 구원이 있다고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을 따름입니다.

그런 저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적절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제 눈을 열어 보여주시고 알려주셔야 합니다. 제가 목사로 잘 나가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알게 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목사로 잘 나가지 않더라도 십자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았음을 알게 해주셔야 합니다. 머리로만 알고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그 순간만큼은 온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구원이 있다고 믿겨져야 합니다. 이는 은혜로 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여기서 말하는 “사자”, “보냄받은 자”는 바로 세례 요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 앞에 보냄받은 자, 사자 세례 요한이 서 있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어서 1장 3절은 이사야서의 본문 말씀을 인용하여 광야에 외치는 자, 즉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길”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이사야에서 줄곧 말하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찾아오실 때 걸으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길”입니다. 즉 1장 3절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럼 정리하겠습니다. 1장 2절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3절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하고 있다고 알려줍니다. 이를 통해 마가복음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 바로 이사야에서 줄곧 예언되었던 그 하나님의 길임을 서두에서 선언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마치 오픈북 테스트에서 필히 참조해야 할 족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하시길 기다리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애초부터 답을 던져줍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그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온 땅 가운데 능력을 입증한 사건이며, 우리의 구원이 거기에 달렸다고 답을 던져줍니다. 하지만 공부를 전혀 안한 우리들은 오픈북 테스트에서 답지를 보고 있음에도 고개를 갸웃합니다. 설마 예수가 답이라고? 설마 십자가가 답이라고? 그게 왜? 그리고는 머리를 굴립니다. 돈일 것이라고, 명예일 것이라고, 성공일 것이라고 애써 다른 책들을 뒤져가며 답을 찾습니다.

하여,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개안”, 즉 눈이 열리는 사건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못 보는 자들이 보게 되는 사건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여리고에서 절실하게 예수님을 찾은 맹인처럼, 우리가 눈 뜨기를 희망할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의 눈이 떠진다면 우리는 예수가 구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떠진다면 우리는 십자가가 구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떠진다면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죽으시고 부활한 그 사건이, 바로 우주적 전쟁에서 모든 대적을 짓밟으신 사건이며 궁극적 승리를 거둔 사건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인된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주시길 소망합니다. 하여, 우리가 시의적절하게 우리가 쫓는 허황된 것들로부터 가끔이나마 눈이 열려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 수 있는, 십자가를 붙들 수 있는,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강해설교는 조엘 마커스의 <주님의 길: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구약성경의 그리스도론적 주석>의 첫 번째 챕터를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