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0살이 되던 해 1월, 1박 2일의 짧은 수련회에서 성령세례를 경험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수련회의 제목이 ‘엔카운터’, 뜨거운 만남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성령을 깊이 체험하고 신앙생활이 뜨거웠던 시절은, 평양대부흥 1907년의 100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곳곳에서 ‘성령’과 관련된 행사, 집회, 수련회가 열렸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여, 저 또한 대학생 시절 성령을 깊이 사모했습니다. 누구보다 뜨겁게 기도하고, 또 성령의 체험을 열렬히 간구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대학생 시절 같은 또래들 중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을 사모하던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여, 제가 섬기던 선교단체에서 ‘성령’에 관한 강의를 한 학기 정도 맡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앞두고 저는 여전히 열심히 기도했던 어느 날, 저에게 매우 강렬하게 떠오른 단어가 있었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이른바 보혜사로 번역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성령을 가르키는 단어였습니다. 강의를 위해 묵상하고 성경본문을 살펴보던 중에 알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숙한, 불의 혀처럼 임하는 성령이 등장하는 사도행전, 그리고 방언과 예언과 신비적인 현상이 가득한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성령과, 요한복음이 말하는 ‘파라클레토스’가 조금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저는 파라클레토스에 대해 강의를 하였습니다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때 이후로 요한복음의 보혜사 성령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성경본문을 봐도 감이 잘 오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성령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는 사실 정도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양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반 유대적 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복음서 내에서 유대인이 살던 지형, 유대인의 문화, 특별히 유대인의 절기 같은 부분을 다루는 솜씨를 보면, 유대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마가는 유대 지형과 유대인의 절기에 대해 무지한 면모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유대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던 요한이 쓴 복음서 곳곳에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헬라어로) ’유대인’에 대해서 검색해보면 총 71개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 중에 대략 20-30개의 용례가 모두 부정적으로 묘사됩니다. 예수님을 미워하거나, 예수님을 싫어하거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거나, 혹은 예수님에 대한 거짓말을 유포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에 ‘바리새인’ 혹은 ‘서기관’과 같은 단어가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범주가 다소 넓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런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예컨대 어떤 교회에서, 어떤 목사님이, 불법적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니 거기 A교회의 B목사님 알어?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던데?’ 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거기 또 목사가 잘못을 저질렀다던데? 또 교회가 잘못을 저질렀다던데? 교회와 목사를 모조리 몽땅 묶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동안 교회와 목사에 대한 나쁜 정서가 켜켜이 쌓여왔기 때문입니다. “아니 또 목사야? 아니 또 교회야?”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또한 “또 유대인이야?”하는 정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정서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곳곳에 묻어납니다. 요한복음은 약 9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으니 로마와의 전쟁, 성전의 함락이라는 민족적으로 큰 사건이 발생한지 무려 20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책입니다. 그 시절 교회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요? 바로 예수를 안 믿는 유대인들과 누가 ‘여호와 하나님의 적자’인가의 논쟁을 펼쳤습니다. 단순히 말로만 하는 논쟁이라면 아무런 피해의식이 없이 세련되게 학자들끼리 모여 토론회를 열고 끝이 났을 겁니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이라는 사회 내에서 벌어진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특별히 70년 성전함락을 앞두고 바리새인들은 재빨리 (기민하게) 로마제국에 줄을 섰습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친로마성향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반면 교회는 로마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혼합된 공동체였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이 볼 때에 불법적인 모임이었고, 불법적인 종교집단이었습니다. 따라서 추측컨대 유대인들 일부가 각 지역의 교회 및 그리스도인들을 뒤흔드는 사법적인 고소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교회가 로마시민을 회유해서 자신들의 신인 예수를 믿게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그 로마시민은 황제에게 드리는 숭배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적어도 이전에는 황제를 숭배하고, 이를 위해 막대한 기부금을 냈던 로마시민이자 새신자는, 유대인들의 고소로 말미암아 어마어마한 돈을 써야만 했거나, 투옥을 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에 교회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법적 고소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보기에 (당시에 그들을 괴롭히던) 유대인은 바로 예수님을 못박아죽인 그때 그 사람들의 후예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에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한 분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로마제국의 배려를 받았습니다. 황제숭배에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법적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반면 요한복음 곳곳에 드러난 정황들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은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에서 추방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호적에서 파내는 겁니다. 이를 통해 ‘황제숭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권한’ 또한 박탈되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태생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중에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수시로 제국에 고발했습니다. 저 사람이 이상한 꾐에 빠져 황제숭배를 안하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으니 지켜보라는 겁니다.
괴롭힘을 당하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불법적인 테러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당시 교회 공동체에는 ‘유대인들에 의한 고통의 트라우마’가 집단적으로 새겨지고 있었을 겁니다. (625를 겪은 세대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2차세계대전을 겪은 유대인에게 독일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로 말미암아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근간은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초의 복음서는 마가복음으로, 아마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가복음 이야기에 너무나 익숙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가복음은 모든 복음서 중에서 짧은 동시에, 핵심만 간추린 복음서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셨지만, 그 죽음 자체가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섬김이며,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가 참된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었다고 말입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섬김을 통해, 희생을 통해, 죽음을 통해, 승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 대한 괴롭힘으로 말미암아, 트라우마가 예수님 이야기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곡해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두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사실 이 기도의 정점은 바로 뒤에 따라붙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에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트라우마 때문에 당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의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어? 예수님도 십자가 지기 싫었던게 아닐까? 예수님도 법정에 끌려가기 싫었던게 아닐까?” (왜냐하면 당시 법정에 끌려가는 고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도 법정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리기 싫었는데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해 결국 법정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렸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왜 나를 버리셨냐고 울부짖었습니다. 점점 의문은 커집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에 음모에 살해당했으며, 패배하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마저도 예수님을 구해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이는 실제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벌어지던 현실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일까? 그저 유대인들의 음모에 의해 패배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괴롭힘은 단순히 괴롭힘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괴롭힘이 트라우마를 낳고, 트라우마가 예수님 이야기를 왜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근간마저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요한이 복음서를 새롭게 집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요한이 간구한 성령은 (사도행전이나 고린도에 나오는) 단순히 방언을 말하게 하는 성령, 예언을 받게 하는 성령, 불의 혀처럼 강렬하게 임하는 성령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가르침’이고,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치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27절) ’평안’입니다. 단순히 심적 평안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바라고 구하던 ‘샬롬’, 온 세상의 완벽한, 정의에 기반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가 왔고, 그 정의에 기반한 하나님의 평화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27절을 의미를 살려 번역해보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도착했다. 하나님의 평화는 세상의 통치와 전혀 다를 것이다. 따라서 너희는 앞으로 요동칠 일도 없을 것이며, 너희의 존재가 겁을 먹는 일도 없을 것이다.” 즉,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괴롭힘으로부터, 패배의식으로부터,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더 이상 겁먹지도 않고, 마음이 요동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리고 끝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완전한 평화가 도래했다는 확신이 그들에게 넘쳐,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특별히 요한복음이 말하고 싶어하는 ‘보혜사 성령’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 앞서 보았던 것처럼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기도의 내용은 ‘이 잔을 거두어달라’였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16장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1절)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매우 담대하게 말입니다. 더군다나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법정에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도 (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읽다보면, 예수님을 마치 십자가를 회피하는 겁쟁이처럼 오해할 여지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 중에 가장 핵심인 내용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영광을 받기 위해 십자가로 행진하셨다고 말입니다.
- 또한 이어서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울부짖은 외침은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였습니다. 이 문장 또한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개입을 구걸하는 장면으로 오해할 여지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또 다른 무척 핵심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오해를 바로잡고 올바로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19:30)’ 말씀하셨습니다. 창세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이 목적을 계획하고 계셨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때부터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 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결코 십자가는 비극적인 패배와 실망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영광의 상징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난 주 목사님의 설교가 기억나시나요? 잘 기억나시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껏 들었던 수많은 설교 중에서 어떤 설교가 기억나시나요? 죄책감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잘 기억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저는 제가 했던 수많은 설교들이 잘 기억나질 않습니다. 가끔은 오래전에 제가 작성한 설교문을 보고도 제가 쓴 것이 맞는가 고개를 갸우뚱 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인상 깊게 뇌리에 남은 설교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설교자가 탁월해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감정’ 때문입니다. 어린시절 부모의 폭력이 유독 죽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는 감정 때문입니다. 과거에 겪었던 전쟁 혹은 IMF, 재난 등의 현실 가운데 겪었던 기억이 우리의 생애 내도록 잊혀지지 않는 이유 또한 감정 때문입니다. 기억은 ‘감정’과 함께 저장됩니다. 감정 없는 인상깊은 기억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의 벼랑끝에 내몰렸던 순간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가 누구건 간에 평생 기억에 남습니다. 반면 아무리 유명한 설교자라 한들 우리의 감정과 무관한 설교는 곧 잊혀집니다. 다만 ‘그 설교자 설교 잘하더라’는 감정 정도만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감정’이 기억을 왜곡한다는데 있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초등학교 시절 졸업앨범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이 때 정말 못생겼어. 완전 찐따였거든’ 하지만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있는 아내의 사진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지금도 똑같은데 지금도 찐따라서 그래?” 아내는 가끔 저랑 처음 연애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땐 제가 참 멋있었다고 말합니다. 저 또한 가끔 설교하면서 “옛날엔 잘생겼었는데”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과거의 사진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늙고 살쪄서 못생긴게 아니라 그때도 별로 잘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시절의 감정은, 좋았던 감정이건 싫었던 감정이건, 기억 자체를 왜곡합니다. 어린시절 만났던 첫 사랑이 유독 잘생기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 어린시절 하나님을 처음 만난 날의 교회 혹은 설교자가 무척 영적으로 훌륭하게 기억되는 이유 또한 ‘좋은 감정’에 의해 왜곡된 기억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감정’, 특별히 오늘날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이 과거의 좋았던 기억 또한 왜곡시킬 여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꼭 그랬습니다. 그들을 법정에 고소하고, 힘겹게 하던 유대인들의 존재. 그들 때문에 이미 기억하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승리의 이야기, 부활의 이야기, 영광의 이야기로 기억했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패배의 이야기, 실패의 이야기, 좌절의 이야기로 왜곡되어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가 절실했습니다. ‘가르침’과 ‘생각나게 함’을 통해 그들이 겪고 있는 왜곡된 현실을, 또한 왜곡된 복음을 다잡아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마가복음을 비롯한 공관복음은 예수님을 묘사할 때에, ‘생생한 역사 속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켰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의 현실적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있는 그대로 사건을 보도하는 기자들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현실의 눈’으로 볼 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도 그러하고,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또한 그러합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믿는 자들을 위하여’, 현실적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진실을 꿰뚫어보고 들려주는데 방점을 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번민을 겪었을 겁니다. 혼돈을 겪었을 겁니다. 두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시점 예수님께서 느끼신 감정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시고, 여전히 성령을 통해 함께 하고 계시는 구원의 역사에 근거하여, ‘현실적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당시 예수님의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진실’, 즉 ‘진리’의 시각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한복음이 보혜사 성령을 강조하는 이유는, 저자인 요한 스스로가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받아 ‘믿음의 눈’으로 재조명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즉, 예수님께서 ‘잔을 거둬달라’고 구걸하셨던 기도가 우리의 기억을 사로잡아 좌절하게 만들 때에,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며 당당하게 십자가로 걸어가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만드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에게 십자가가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하던 순간이 우리의 기억을 사로잡아 절망으로 몰고갈 때에,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다 이루었다’며 세상에 보냄받은 소명을 마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만드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니라 구원의 목적을 이룬 십자가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이처럼 보혜사 성령은 ‘현실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좌절과 절망에 빠진 교회에게 ‘믿음의 시각’에 입각한 가르침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셨던 일들을 ‘다시 생각나게 하심’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역사하고 계시며,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분’, 바로 그 분이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통해 아마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통해 아마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법정에 끌려가고, 때로는 고초를 겪는 일들 속에서도 여전히 꺾이지 않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남기신 새 계명을 따라, 유대인들의 괴롭힘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세상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또한 결코 쉬워보이진 않습니다.
경제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열광적으로 가담했던 부동산 투기의 거품이 꺼지고 있습니다. 아파트 미분양사태가 속출되고, 건설업계의 경기가 안좋아지기 시작합니다. 금리는 오르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노동규제는 풀리는 상황 속에, 출산율은 도무지 오를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당분간 어려운 시절은 지속될 것입니다.
교회 현실도 썩 좋지 않습니다. 출산률, 고령화 사회의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다음세대들을 위한 교회학교는 사라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대다수의 교회는 50% 이상이 은퇴자로 채워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껏 펑펑 쓰던 예산들을 곳곳에서 절약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무리한 건축으로 빚을 냈던 교회들은 높아지는 금리로 말미암아 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 예수 믿는 삶이 가능할까요? 너무도 풍요에 젖어있고, 매너리즘 가득한 교회생활에 매몰된 우리가, 진정 예수를 믿고 있을까요? 진짜 예수 믿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앞으로 이처럼 교회가 어려워지면 교회는 축소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더군다나 우리 교회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 사이에 의견이 다릅니다. 소통이 잘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에 대해 애착과 관심은 있지만 한 마음으로 모아지질 않습니다. 제직회만 열리면 다들 긴장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현실적인 눈으로 볼 때에 우리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좌절과 절망 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즉,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 또한 요한복음 당시 교회가 겪고 있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좌절과 절망이며 실패입니다. 우리 눈 앞에 있는 현실은 쉽게 바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보혜사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는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현실 너머에,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믿음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현실의 눈을 너머서,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믿음과 교회와 세상을 보게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있었던 하나님께서 좌절과 절망의 순간 가운데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던 사건들이 ‘다시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역사한다고 경제 수치가 좋아지진 않을 수 있습니다. 출산률이 높아지진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은 보혜사 성령이 역사하기 전이나, 역사한 이후에나 여전히 동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혜사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면, 힘겨웠던 시절, 어려웠던 시절, 절망과 우울 밖에 없었던 그 시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동행하여주셨던 과거의 기억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힘겨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에 승리했던 기억, 절망과 좌절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시고 인도하셨던 기억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역사로 그 기억이 살아난다면, 우리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다시 마음을 단단히 하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미움과 증오의 세상 가운데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시 힘겹고 어려운 이 시기에, 믿음으로 일어서게 하시는 공동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이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보혜사 성령이여, 우리 가운데 오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일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들,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일들이 다시 생각나게 하시옵고, 이를 통해 다시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