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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다섯 가지 메시지 정리.

by 홍도사 2022. 12. 31.

레위기의 첫 번째 메시지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다.

레위기를 비롯한 성경 전반에서 핵심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막에, 회막에, 성전에 임재한다는 말은 ‘거주’의 의미가 짙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주하신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것, 거주하시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어와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고, 거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임재’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예배시간 가운데, 특별히 찬양을 함께 부르거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의 마음과 몸에 일어나는 가시적인 영적 현상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사실 이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응당 하나님께 예배할 수도 없지요. 

출애굽기 19장 4절부터 6절을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된 것,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 통틀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 것을 총체적으로 압축한 말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특별히 레위기를 시작하기 전에, 출애굽기 40장은 성막을 만든 이후 봉헌하고, 봉헌에 화답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적인 모습인 ‘구름’이 온 성막을 채우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가시적으로, 성막을 통해)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의 두 번째 메시지 : 예배를 통해 성막은 회막이 된다.

레위기가 시작하기 전 출애굽기가 배경적으로 그려내는 긴장이 있습니다. 바로 (35절)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모세조차 회막에 들어갈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은 회막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잠깐 여기서 우리는 두 단어의 차이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막이라는 단어와 회막이라는 단어입니다. 성막(שׁכן)이라는 단어와 회막(אֹ֫הֶל מוֹעֵד)이라는 단어입니다. 성막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면, 회막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공적으로 만남을 갖는 곳’이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앞에 등장하는 출애굽기의 맥락에서 보면 반복적으로 ‘회막’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막에 임재하셨습니다. 성막에 거주하셔서 살기로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성막’이 ‘회막’이 되기 위해서는, 즉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집에서 이스라엘 백성과의 공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이 야기하는 긴장이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주하고 살게 되셨는데, 모세조차도 하나님 거주하시는 곳에서 만남을 가질 수는 없었더라’

하나님은 이제 성막에서 거주하기로, 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땅에 살고 있는 평범한 백성들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거룩’은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해서, ‘영적인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 그 자체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주를 감당할만큼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예배, 구체적인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맥락, 하나님과 가까이 만나기 위한 맥락(예컨대 지성소에 들어가야만 하는 맥락)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공적인 만남을 갖게 위해 ‘제사법’이 필요합니다.

좀 더 확실한 은유를 들자면 코로나 당시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백신을 맞거나 혹은 PCR검사 후 음성이라는 확인증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제사법은 일종의 하나님과의 공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 (예를 들자면 집에서 온라인으로 유튜브 예배를 드려도 되지만, 교회라는 공적 예배 장소에 나오기 위한) 일종의 절차에 가깝습니다. 결국 핵심은 ‘예배’를 통해 성막은 회막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막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이 공적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인 회막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거룩에 접촉해서 죽지 않을 정도의 ‘구별’, 공적 확인으로의 ‘거룩’을 발급받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총체적 절차로, 예배를 바라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는 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실질적으로 접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레위기의 세 번째 메시지 : 하나님의 임재를 지켜야만 한다.

레위기에는 총 다섯 가지의 제사법이 등장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다섯 가지 제사법이 등장하지만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속죄제’입니다. 속죄제의 의미를 위해서는 속죄제와 속건제 모두가 일종의 ‘죄’, ‘잘못’을 해결하기 위한 제사라는 사실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먼저 속건제는 구체적인 배상을 요하는 제사입니다. 예컨대 도둑질, 착취, 잃은 물건을 줍고 모른척 하다가 들통이 났을 경우에는 제사를 드리고 그와 함께 본래 물건에 1/5을 더해 배상합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배상제’라는 이름이 더 명확하게 뜻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속건제는 구체적인 죄목이 있고, 죄목이 이미 드러났고, 이를 구체적으로 배상할 수 있을 때에 해결하는 제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속건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공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에 의의를 둡니다. (따라서 공정한 배상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꼭 제사를 드려야 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면 사실 모호합니다.)

반면 속죄제는 구체적인 배상을 할 수 없는 ‘부지 중에 범한 죄’에 대한 해결책이었습니다. 회막 내의 구체적 장소(지성소, 성소, 뜰)의 상징적인 지점을 피를 통해 깨끗하게 씻겨내는 제사가 바로 속죄제입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깨끗하게 씻겨낸다는 의미의 ‘정화제’가 더 명확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부지 중에 범한 죄’를 지은 사람의 역할에 따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거나 제사장의 경우에는 성소를 청소하고, 족장이나 평민의 경우에는 뜰을 청소하는 등) 청소하는 장소가 달랐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매우 모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부지 중에 범한 죄’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고, 왜 피를 통해 구체적인 장소를 씻겨내는지도 명확한 의미가 드러나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가지 상상을 통해 정황을 추정해보면, 아마도 속죄제는 어떤 가시적인 ‘재앙’ 앞에서 드렸던 제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 그 케이스가 레위기 10장에 등장하는 나답과 아비후의 급작스럽게 죽는 사건에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마치 요나의 배가 급작스럽게 이유도 없이 폭풍우에 휘말렸을 때에 배에 탄 사람들이 ‘누군가 죄를 범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처럼, 어떤 가시적인 재앙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지 중에 범한 죄’를 찾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죄인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제비를 뽑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를 통해 해결하는 속죄제의 구체적인 정황을 보면, 경중에 따라서 성소 혹은 뜰을 청소합니다. 청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성막에 머물러계시는데, 누군가의 부지 중의 범한 죄로 말미암아 성막이 더럽혀지면 하나님께서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레위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제사라고 볼 수 있는 속죄제는 일종의 ‘하나님의 임재를 지켜야만 한다’는 이스라엘 백성 고유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제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레위기의 네 번째 메시지 : 매년 첫 날마다 회막청소로 새출발을 하자.

레위기 10장에는 끔찍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하나님께 허락받지 않는 불을 피웠다가 둘이 사망하는 재앙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나답과 아비후의 죄를 어떻게 묻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책을 물으셨고, 그들의 목숨을 거둬가셨습니다. 더 큰 문제는 나답과 아비후가 일으킨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실 위험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회막이 더럽혀지고, 끝내 지성소까지 더럽혀진다면, 하나님은 떠나실 것입니다. (실제 포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에스겔서에는 하나님이 떠나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속죄일’이라는 절기, 특별히 신년 절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속죄일에 행하는 일은 단순합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한 해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고합니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들어갈 수 없었던,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지성소로 대제사장이 들어갑니다. 기본적인 속죄제에는 뜰을 정화하는 제사와, 성소를 정화하는 제사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속죄일, 신년 첫 날만큼은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 지성소를 정화합니다. 지성소를 정화하고 나오면 다시 뜰을 정화합니다. 쉽게 말해 회막 전체를 정화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고는 한 염소를 불러와 염소 위에 모든 죄를 얹고서는 광야로 떠나보냅니다. 하나님 계시는 지성소를 청소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던 대제사장과는 달리, 하나님의 보좌에서 가장 머나먼 광야로 떠나는 염소는 동쪽으로 향합니다.

결국 속죄일은 레위기 전체의 핵심 메시지와 같습니다.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시적으로 구현된 것이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이라면, 레위기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유지하기 위해,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지녀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입니다. 그들의 부지 중에 지른 죄악이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떠나시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들의 왕국 역사에 걸쳐서 얼마나 군사력이 많은가로 평가받지 않고, 얼마나 경제력이 윤택한가로 평가받지 않고, 얼마나 외교력이 탁월한가로 평가받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신경썼느냐로 평가를 받습니다.

속죄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날입니다. 그들의 부지 중에 범하였던 모든 죄악이 쌓여서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시게 만들 수 있다는 자각을 하는 날, 따라서 가시적으로, 대제사장은 단 한 번도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던 지성소로 들어가 지성소를 청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는 곳에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반면 그와 반대방향인 동쪽을 향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가시적으로 짊어진 염소를 떠나보냅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속죄일마다 서쪽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동떨어진 곳으로 죄를 청산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되새깁니다.

 

나머지는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