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린 시절부터 삶이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으로 남들과 비교해서는 얼마나 평탄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저 스스로는 그렇게 여겼습니다. 남들의 인생과 비교할 때 나의 인생은 비극처럼 느껴졌고, 버거웠습니다. 아마도 그 중 하나는 바로 아버지의 장애였을 겁니다. 다리 한 쪽을 고등학생 시절 버스사고로 잃으신 아버지,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아득바득 공부하여 장애인 가산점도 없던 시절 공무원으로 고속 승진을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에게는 양면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수성가한 듬직하고 멋진 가장인 동시에, 사회적 성공과 신체적 장애의 간극 속에서 오는 모든 압박과 그에 기인한 스트레스를 가정에서 풀어내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크게 부족함이 없는 가정이지만, 분명 저는 약간의 어두움 아래서 자라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IMF시절 아버지께서는 더 큰 꿈이라 쓰고 사실은 망상이라고 읽는 또 다른 도전을 위해 공무원직을 그만두셨고 그로 말미암아 재정적인 어려움도 찾아왔습니다. 단란하게 살던 아파트는 팔려야 했고, 이후로 냉난방이 잘 되지 않는 한옥집 월세로, 다시 2-3년만에 조금 더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따져보면 그때 그 시절 겪었던 어려움 덕분에 저는 다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의 인생의 성장기에 겪은 다사다난한 일 덕분에 저는 저 스스로가 인생과 세상을 평탄하지 않는 것으로, 쉽지 않은 것으로, 행복과 기쁨보다는 고통이 많은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평범한 목회자들과는 다소 결이 다른 편입니다. 또한 평범한 목회자들의 설교와도 조금은 결이 다른 설교를 하는 편입니다. 저의 성경해석 기저에는 항상 ‘평탄하지 않은 삶, 쉽지 않은 인생, 행복과 기쁨보다는 고통과 눈물이 많은 세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는 쉬운 기도응답을 말하지 못하겠고, 약간의 헌신과 신앙생활로 얻는 축복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겠고, 찬란한 영광과 기쁨에 대해서 가볍게 말하지 못하는 설교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이후로 저는 기나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조금씩 저의 인식을 숙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평탄하지 않는 삶이지만 지나고 보니 평탄하지 않음으로 배운 것들이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살아내고 보니 쉽지 않은 인생 속에서 깊어진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 가운데 고통과 눈물이 가득하다는 것은 사실인 동시에, 인간은 결국 세상 가운데 있는 고통과 눈물을 행복과 기쁨으로 바꿔낼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올해 들어서 저는 두 번의 황망한 사건을 겪었습니다. (생략)
응당 둘 다 된다는 확신 가운데 진행한 일이었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있음을 확신했던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저는 평탄하지 않은 삶의 연장선상, 쉽지 않은 인생의 연장선상, 고통과 눈물이 많은 세상의 연장선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신앙과 인생을 성숙시켜 오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 너무 매몰되지 않고 길게 봐야 한다는 것과, 길게 보고 차분하게 대비하면 상실의 순간을 기쁨의 순간으로 바꿀 여지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 있는 우리들은 그 가운데 시간을 견뎌내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묘하신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올해 들어서 겪은 두 번의 황망한 사건이 결코 황망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크신 하나님의 섭리, 선하시고 신묘하신 섭리를 알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점이 약간 답답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일곱 가지의 말씀들을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본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이후로, (아마도 로마군인들은)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에 우슬초를 찍어 예수님의 입을 축여주셨습니다. 두 절의 성경구절만 본다면 아무런 신학적인 의미가 없는 장면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죽어가시면서 목말라하셨고, 그에 응한 로마군인들은 포도주를 찍어 예수님의 입술을 축여주셨습니다. 실제 높은 곳에 달려서 온 몸에서 피와 땀을 쏟는다면, 그만큼의 탈수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단정짓기에는 오늘 기록된 본문이 요한복음의 일부라는 점입니다. 네 권의 복음서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많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겠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더욱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학자들이 예측하기로는) 요한복음 저자는 다른 복음서들을 모두 이미 알고 있었고, 이를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복음서를 새로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응당 기존 우리가 읽던 복음서보다는 더욱 의미의 밀도가 높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저자가,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내가 목마르다’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 요한복음 저자는 다른 요한복음 단락에서 이에 대한 단서를 남겨놓지 않았을까요?
이야기를 풀어가는 단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4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는 장소는 우물가입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청합니다. 여기까지는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때에 사마리아여인은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한 예수님이 유대인 남성이라는 점으로 인해 요청을 거절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했습니다. 경멸한 이유는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이유였습니다. 유대인이 보기에 사마리아인들은 이단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들과 하나님 사이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라 단정지었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들을 향해 쌓여있던 비토정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지만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먼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기 위해 다가가면서 남기신 일종의 단서에 불과했습니다. 즉 이 말은 나는 너에게 물을 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줄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눈 장소는 바로 ‘야곱의 우물’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우물을 주신 분은 누구셨을까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에게 우물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현재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줄 사람이신 예수님은 누구실까요? 바로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사마리아인에게도 (영적인) 물을 주실 분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에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주실 ‘물’이 어떤 의미인지가 더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37절에는 ‘명절 끝날 곧 큰 날’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7장 2절을 보면 이때의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농경문화와 연관된 절기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포로기 이후부터는 초막절 행사 중의 하나로 하나님께 물을 부어드리는 행사가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농경문화가 자리잡게 되면서, 더 큰 수확을 위한 때에 맞춰 내리는 적절한 비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마중물을 내어드리는 장면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도 초막절에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물’을 내어드렸을겁니다. 그리고는 그 물을 받으시고는, 시의적절한 때에 비라는 통로로 물을 주시길 간구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에 응답하실 차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대신 응답하신 것입니다. (3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여기서 등장하는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은 무엇인가요? 바로 (39절)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물을 주신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물을 주실 분이십니다. 특별히 초막절에는 온 유대인이 자신에게 시의적절하게 (비라는 통로를 통해) 물을 달라고 간구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야 하는 순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 응답하십니다. 자신을 통해 모든 이들이 물, 즉 생수의 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저자는 그때 남기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곧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고 해설합니다.
이 모든 광경을 토대로 다시 한 번 오늘의 본문(19:28)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목마르다 하셨을 때의 의도는 정말 목마르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즉 유대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물’을 선물할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낼 의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복음이 갖고 있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하나 발견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남성의 목마르다는 외침’에 불과합니다. 로마병정은 그를 조롱하는듯이 우슬초에 포도주를 묻혀 입술만 적셔줄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한 실체는 모든 민족에게 ‘물’, 즉 성령을 선물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하시기 위한 계획을 성취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목마르다고 절규하는 이 장면을 보고 슬픔, 좌절, 절망, 비탄함에 잠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장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자기 내어주심의 장면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찬송의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죄, 구원, 영생, 천국과 지옥 등등. 하지만 저는 오늘 이를 꿰뚫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주제를 말하려고 합니다. 바로 ‘창조’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창조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에 창세기를 생각합니다. 또한 오늘날 과학이 말하고 있는 빅뱅에 기반한 진화의 이야기와, 성경이 말하고 있는 7일만에 창조된 이야기가 서로 상충한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창조는 ‘진화’와 대립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진화’라는 현대과학에 대해 반대하지 않습니다. 과학적으로 이 세상을 탐구해봤더니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7일만에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니 그 사실 외에 다른 가설은 모두 거부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창조’를 이야기할 때 ‘혼돈’과 ‘공허’ 혹은 ‘어둠’을 그 대척점에 둡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대적은 과학이 말하는 ‘진화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를 가로막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혼돈이며, 이 세상에 있는 공허이며, 이 세상에 있는 어둠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창조를 가로막은 것은 아담과 하와의 반역입니다. 그들의 반역이 혼돈, 공허, 어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이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빚어가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따라서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과 이사야 곳곳에 등장하는 창조에 대한 언급을 인용한 후에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해설합니다. “세상에 질서를 부여했던 하나님,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세상을 끝낼지도 모르는 하나님은 여전히 능력과 은혜로 하나님의 의도에 더욱 온전히 반응하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
창조는 무엇입니까? 현재 존재하고 있는 혼돈, 공허, 어둠이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정복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태초, 그러니까 아주 고대에 있었던 어느 날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정복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쉬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성도들의 기도와 협력하며, 하나님은 혼돈, 공허, 어둠을 정복하십니다. 그 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혼돈과 공허, 어둠을 정복하고 끝내 선하신 결과물들을 만들어내십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창조’라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세상 가운데 있는 혼돈, 공허, 어둠을 정복하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삶 가운데 남겨져있는 혼돈, 공허, 어둠의 현실 속에서도 그 너머에 계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다룬 요한복음의 이야기와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신 예수님에게서, 그 너머에 계신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에게서, 그 너머에서 다시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실 부활의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창조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문은 새해에 두 번의 황망한 일을 겪은 저 스스로를 위한 설교이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껏 겪어왔던 수많은 낙망하고 절망할 수도 있는 순간들 속에서, 끝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연단되었던 나날들이 집약된 신앙고백이 담긴 설교이기도 합니다. 저같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먹물들은 무척 쉽고 간단한 말들도 어렵고 화려한 용어로 치장하려고 하는 버릇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최대한 쉽고 간략하게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잘될꺼야’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잘될꺼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혼돈, 공허, 어둠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인생은 쉽지 않을 수 있겠고,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며, 인생사 자체가 고통과 눈물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때도 분명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잘될 겁니다. 결국에는 잘될겁니다. 끝내 잘될겁니다.
‘내가 목마르다’ 외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너머에 계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십시오. 이 이야기는 목마르다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믿는 우리들이 성령을 받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결국 잘되는 이야기, 끝내 잘되는 이야기입니다. 잘될겁니다. 창조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본 설교문은 플레밍 러틀리지(손승우 역)의 <예수의 마지막 말들: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에서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