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버지는 안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친척들 중에서는 꽤 공부를 잘 하셨습니다. 덕분에 시험을 쳐서 안동중학교라는, 안동 내에서는 공부를 잘 하는 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마을은 잔치를 벌였고,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자취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한때 어떤 꿈을 꾸셨을까요?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한때 나는 배를 타고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너다가, 버스와의 교통사고가 난 것입니다. 아마 저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생각보다 쉽게 회복했을겁니다. 그만큼 의학이 발달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970년대 의료시설은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발목을 자르고, 허벅지를 자르고, 결국 무릎 위까지 잘라내셨습니다. 1년 내내 병상에 누워있으셔야만 했습니다. 한때 창창하던 아버지의 인생이 그 날로 꺾여버렸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대구의 영신고등학교에 다니셨습니다. 목사님이 세운 미션스쿨이지요. 물론 아버지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신앙이 없는 분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미래가 꺾여버린 그 순간에 아버지는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요? 하나님은 선하시다면서요?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치하셨나요?” 그런 아버지 앞에 돌아오는 것은 무거운 침묵 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이후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셨습니다. 장애인 특혜가 없던 시절에 다리 한 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면접관과의 장애를 두고 벌인 면접의 영웅담은 지금도 가끔 듣는 이야기입니다. 다리를 잃은 이후에 꽤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에 상처, 몸의 상처가 아닌 마음의 상처, 인생의 상처는 지금껏 남아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다니던 한국해양대학교를 그만두고 신학교를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하셨냐 물었을 때에, 네가 믿는 그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고. 네가 한 번 하나님을 대신해 대답해보라고.
인생은 명료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다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신앙 연차가 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오래 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되었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모르면서 그저 살아갈 따름입니다.
우리가 3주 동안 살펴볼 성경은 바로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예언자 요나와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치열한 수싸움을 담고 있는 재밌는 책입니다. 12권의 소예언서 중의 하나입니다만 다른 예언서들과는 다소 느낌이 다릅니다. 우화 같은 측면이 다분한 책입니다. 차근차근 3주동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나서 1장 1절은 이 이야기가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는 사람에게 일어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어떤 인물일까요? 열왕기하 14장에 잠깐 요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의 왕은 여로보암 2세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어떤 왕인가요? 열왕기하 14장 24절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로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여로보암 1세는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악한 왕의 대표주자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 또한 그와 이름이 똑같은 여로보암 1세처럼 사악한 왕이었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 2세는 생각보다 더 사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언자 중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아모스와 호세아가 바로 그 시대에 활약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실제 여로보암 사후 14년 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왕국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 시절에 활약했던 아밋대의 아들 요나 또한 아모스, 호세아와 함께 ‘하나님께 돌이켜라! 그렇지 아니하면 망할 것이다!’라고 예언했을까요? 아닙니다. 재밌게도 아닙니다. 오히려 열왕기하 14장은 요나가 북이스라엘의 번영을 예언했고, 실제로 예언대로 영토가 확장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요나는 예언자입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도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요나는 왕국에 고용된 예언자입니다. 왕의 귀에 달콤한 말을 예언하는 예언자입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을 위해 예언하는 예언자입니다. 말 그대로 왕국을 위해 일하는 예언자입니다. 반면 아모스와 호세아는 하나님께 고용된 예언자입니다. 왕의 귀에 쓴소리를 하는 예언자입니다. 북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의 흥망성쇠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둔 예언자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요나서를 살피기 전에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바로 요나가 ‘왕국에 고용된 예언자’이며, 북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을 위해 예언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북이스라엘 왕국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민족주의자 내지는 국수주의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주의자, 국수주의자였던 요나를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니느웨는 앗수르 왕국의 수도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끝내 망가트린 앗수르 왕국의 수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요나의 귀에 거슬렸을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요나가 아니라 아모스, 호세아에게 말씀했더라면 그들은 바로 수긍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즉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보다, 국가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높이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랬기에 당시 서슬 퍼랬던 시절 여로보암 2세를 향해 강하게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요나는 왕국에 고용된 예언자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사랑하는 국수주의자, 민족주의자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도망가고자 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3절) 일어납니다. 일어나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입니다. 반쪽짜리 순종입니다. 아니 이는 의도적인 반항입니다. 아마도 요나의 심정은 꼭 이랬을 겁니다. “뭐? 적국에 가서 예언을 하라고요? 아 난 안할랍니다. 나는 당신 말씀보다 우리 조국과 민족이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요나서는 특히 무척 재밌게 요나의 이야기를 묘사합니다. ‘내려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야라드’라고 읽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갑니다. 야라드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야라드합니다. 개역개정은 ‘배를 향해 내려가다’는 문장이 어색하여 의역했지만,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욥바로 내려갔고, 배를 향해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4절) 큰 바람을 바다 위에 (히브리어로 직역하자면) 던지셨습니다. 자신의 말씀을 피해 내려가고 있는 요나를 향해 분노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5절) ‘요나는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다시 한 번 또 야라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나와 하나님 사이의 팽팽한 기싸움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기 싫어서 도망가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도망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게 하기 위해, 요나를 끝까지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결론은 어떻게 될까요?
(15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니느웨는 동쪽에 있습니다. 반면 다시스는 서쪽에 있습니다. 정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싫어 반대쪽을 향해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도망을 가로막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게끔 니느웨로 끌고 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다 위에 큰 바람을 내던지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다시스로 향해 가던 배의 동료들은 바다 위로 요나를 들어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철저히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물고기에게 먹혀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바다에 빠졌고, 물고기에게 물고기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철저히 요나의 입장에서 상상해봅시다. 네, 죽었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물고기 배속에서 의식이 살아있는 그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내용 중에 재밌는 단락이 있습니다.
(2장 6절)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당시 고대 근동 사람들은 산의 뿌리, 즉 지구 중심부 가장 아래에 ‘스올’이라 불리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장소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내려갔다’라고 번역된 동사 또한 야라드입니다.
네,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욥바로 내려가고, 배로 내려가고, 배 밑층으로 내려가고, 결국 ‘스올’이라 불리우는 죽은 사람의 처소로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어떻죠? 그가 내려갔는데, 그곳에 갇히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을 떠보니 스올이 아닌 니느웨였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러 도망갔더니, 어느새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장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는 사명을 맡기셨을까요? 모릅니다. 성경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니느웨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모릅니다. 이 또한 성경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요나서는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는 이유를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든 요나를 불러서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데려다 놓으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요나 또한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일을 끝내 고집스럽게도 행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1살 당시 신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던 저에게 아버지께서 물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정녕 살아계시다면 당신께 왜 이런 심각한 고난을 줬냐고 말입니다. 저는 당시에 나름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책들 몇 권도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이후 신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신정론,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지만 왜 이 세상에서는 악이 여전히 남겨져있는가의 문제. 신정론은 기독교 신학과 성경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분명 쉬운 대답이 아니고 무수한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평생을 걸쳐 씨름하고 있는 주제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주제는 저에게도 무척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제가 쓰는 대다수의 글과, 제가 선포하는 설교 대다수에는 이 신정론의 질문이 담겨져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정녕 살아계시다면 왜 이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생겨나는걸까?”
저는 이 사실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삶의 희망이 꺾였던 무렵,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신정론을 질문했습니다. 그리고는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 아버지의 아들은 목사가 되어, 성경과 기독교를 연구하면서 (목사의 입장에서) 신정론을 질문하고 나름의 대답을 찾으며 설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처럼 말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무신론자 입장에서 질문했던 내용을, 이제 아들인 제가 설교자 입장에서 똑같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나가고 있다는 것… 말 그대로 신묘막측합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요나의 입장으로 돌아가봅시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굳이 적국 앗수르로 가서, 앗수르를 위해,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토록 의지를 갖고 밀어붙이시니, 물고기 밥이 되게 하신 이후에, 죽음 앞에서 살려내셔서까지, 그 일을 감당하시니, 그 주권에 순복했을 따름입니다. 더군다나 니느웨가 요나가 선포한 회개의 메시지 앞에 돌아오는 광경을 보고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적국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빨리 멸망하기를 바랐을테니까요. 하지만 니느웨는 회개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기회를 받았습니다. 요나는 죽을 때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죽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읽고 있는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수도로 삼고 있는 앗수르를 도구로 삼아 북이스라엘을 벌하셨습니다. 바로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아모스,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회초리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이후, 앗수르는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미리 예언했듯이) 회초리의 역할이 다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 요나를 불러 니느웨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던 이유는, 니느웨가 멸망하는 시기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시기가 서로 연동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가 돌아와야, 그만큼 북이스라엘은 연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이 연명하는만큼 니느웨의 수명도 연장됩니다.
이 또한 역사의 신묘막측함입니다. 우리는 이를 두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생은 명료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다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다만 우리 신앙인들은 알 수 없는 중에서도 한 가지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알지 못하는 것, 그 이면에 고집스럽게도, 하나님의 계획을 끝내 관철시키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앞에 일어나는 일의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일어나는 일의 의미를 아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