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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강의안] 하나님 나라의 선교

by 홍도사 2020. 2. 20.
본 강의안은 단기선교를 앞두고 선교팀을 위해 강의한 내용입니다. 인용은 빠져있고, 맥락은 뜬금없을 수 있습니다.

Today’s Topic :그리스도인이 다스린다고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 다니엘 2장은 핍박이 심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조명합니다.
  • 본문은 의도적으로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다니엘이라고 지칭합니다. (야[야훼], 엘[엘로힘]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름은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왕이 볼 때 다니엘은 다니엘이 아닌 벨드사살입니다. 이를 본문이 명시하고 있습니다(2:26). 다니엘은 신앙인이지만, 왕이 볼 때에는 신앙인이 아닌 (바벨론식 이름) [벨드사살]입니다. 재미있게도 악한 통치자는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 뿐만 아니라 그의 꿈을 해석하지 못한 모든 지혜자들을 모두 몰살하려고 합니다. 그때 다니엘의 지혜가 발휘될 새로운 공간이 생깁니다.
  •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함께 기도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에게 나아갑니다. 지혜자들 또한 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지혜자들이 알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하면서요.) 끝끝내 다니엘은 악한 통치자의 문제를 해결하고는 구원을 얻습니다. 다니엘도, 다니엘의 세 친구도, 지혜자들도 구원을 얻습니다. 다니엘 2장의 주제는 [악한 통치자] 아래에서 살아남는 법입니다. 기도하고, 순결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지혜를 통해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악한 통치자의 억압 아래 죽어가는 [이웃]들을 돌아볼 사명마저 간직해야 합니다.

 

  • 다니엘 6장은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통치자입니다(6:16).
  • 다니엘은 하나님을 믿는 선한 통치자에 힘입어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무런 위협과 고난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장에서는 [악한 통치자]아래에서 함께 고난에 처했던 이웃들이, 6장에서는 다니엘을 시기하는 사람들로 대체됩니다. 다니엘의 승승장구를 시기한 이들은 다니엘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왕도 하나님을 믿고, 다니엘도 하나님을 믿는데, 그들의 음모에 의해 다니엘은 위협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왕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음모에 빠집니다(6:12).
  • 이제는 다니엘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왕이 그 해답을 찾아 헤맵니다. 끝내 목도한 광경은 놀랍습니다. 왕의 고뇌가 응답되었습니다. 다니엘은 무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왕조차도 어쩔 수 없었던 법의 강겸함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다니엘을 구원했습니다. (국가보다 하나님이 위에 있음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자 왕은 비로소 다니엘의 대적들에게 복수합니다. 또한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임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 결론적으로 다니엘 2장과 다니엘 6장을 비교하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악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나라나,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처하는 위협은 동일하다는 사실이죠. 통치자가 하나님을 믿으면 좀 더 편하겠지만, 통치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통치자조차 어쩔 수 없는 위기와 위협이 닥칩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며,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게 하는 본문이 바로 다니엘 2장과 다니엘 6장입니다. 결론적으로 다니엘 2장과 다니엘 6장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통치자의 신앙의 여부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개념정리.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일반적으로 선교는 ‘인간’ 혹은 ‘교회’가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증가하도록 돕는 일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의 선교는 [제국주의적 선교]라는 이름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만들 수만 있다면 상대의 국가주권을 침탈하더라도, 그들의 소유를 침탈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회의를 통해 등장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 자체가 상대를 향해 자신을 나눠주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흘러 넘쳐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시기에, 선교 자체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선교’가 될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의료봉사, 커피대접, 청소봉사, 혹은 우리의 미소와 말투까지도요.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정체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구신약성경의 가장 명백한 주제를 고른다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에덴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일치하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는 지구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은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고, 요셉을 힘입어 ‘애굽’이라는 거대한 인큐베이터 속에서 ‘씨’를 증식시킵니다. 훗날 모세를 통해 ‘법’을 허락하시고, ‘여호수아’에서부터 ‘다윗’에 이르기까지 ‘땅’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님 나라’는 ‘씨’와 ‘법’ 사이의 화학적 결합의 실패로 말미암아 끝끝내 하나님을 반역하고, ‘땅’을 잃고 쫓겨나게 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외치며 ‘씨’와 ‘법’ 사이의 화학적 결합 실패를 지적합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이후 ‘법’의 인격화이자, ‘씨’의 대표자이자, ‘땅’ 그 자체이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와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백성 [그리스도인]들을 만드십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죽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다시 만들어진 그들은 성령에 의해 [법]이 내제화된 새로운 [씨]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임인 [교회]는 성령의 임재 아래에, 그들의 새로운 [땅]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성령의 임재 아래에 교회로 모인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듬어지고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의해 통치를 받아, 사랑과 용서와 내어줌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법]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가 온 세계에 도래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정의합니다.

 

미션얼(Missional, Mission + 얼)

[선교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수동적인 조직의 구성원처럼 정의되었습니다. 함께 교제하고 나누고 배우는 모임처럼 인식되었죠. 하지만 근래에 많은 학자들의 고민 끝에 하나님이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또한 ‘선교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재기되었습니다. 그저 교회에 모여서 나누고, 배우는 모임을 넘어서, 교회 밖을 향하여 나아가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다만 유의할 것은 ‘선교적’이라는 형용사 또한 [하나님의 선교]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굳이 (목회자들처럼) 말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는 바리스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하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선생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이 땅 가운데 이룩하는 정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직업 혹은 일상의 소소한 영역을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치환하여, 우리와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을 ‘미션얼’이라고 합니다. 영어 단어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말로 ‘얼’이 정신을 뜻하기도 하기에, ‘미션얼’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국]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곡해가 많은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내지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인데요. 특별히 미국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크게 세 가지의 갈래로 행동이 나뉩니다. 먼저 [보수파]와 [진보파]는 크게 같은 범주로 놓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다니엘 2장을 다니엘 6장으로 만들면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다니엘 6장]의 비전을 갖고 국가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죠. (우리나라에는 특별히 보수파의 신학이 많이 수입되어 득세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은 전통적인 가족체계와 가치를 옹호하고 준수합니다. 동성애 합법화에 반대하고, 종교의 자유 관련 법안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준수’에 커다란 목소리를 높입니다. 보수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을지라도(트럼프), 이들은 크게 관여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통해서 보수적 질서가 확립/준수된다면 그곳이 다니엘 6장과 같은 곳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이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결국 특정 정당을 위한 선거운동으로 점철되곤 합니다. (물론 선거시기가 아니더라도 그와 관련된 법안 발의를 위해 시위하고 행동하곤 합니다.)

 

그 반대편에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파가 있습니다. 미국의 민주당은 ‘인권’과 ‘자유’를 사랑합니다. 성소수자의 인권과 권리, 흑인들의 인권과 권리를 옹호합니다. 또한 미국의 중동국가를 향한 전쟁이나 군사적 행동에 대해서도 크게 목소리를 냅니다. 대북정책 또한 평화적 기조를 유지하려 합니다. 이들이 꿈꾸는 다니엘 6장은 평화와 인권과 자유의 나라입니다. (예:빌 클린턴, 오바마) 이들은 ‘성경의 문자적 준수’보다는 ‘성경의 현대적 해석’에 조금 더 방점을 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보수파와 거의 비슷합니다. 서로 지지하는 정당이 다를 뿐입니다. 보수파나 진보파 모두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 6장으로 바꾸는데 전력을 쏟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니엘 6장에서도 여전히 환란과 시련이 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다니엘 2장과 6장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는 취지 아래에서 정파적으로 변모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도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재세례파’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이들이 일종의 대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미쉬 공동체 같은 경우가 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유사한 성격의 종교단체로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이 있습니다. 이들은 철저히 사회와는 격리된 공간으로 들어가 ‘순수한 교회’를 만드는데 주안점을 둡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처럼 서로의 재물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시도하는 거죠. 세속의 정치와 결합한 정파적인 모습을 통해 [국가]의 변혁을 꾀하기보다는, [국가]를 아예 논의에서 배제한 채로 자신의 교회공동체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되기 위해 힘쓰는 방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정리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다니엘 6장이 아닙니다. 다니엘 6장의 모습은 다니엘 2장보다는 조금 살기 쉬운 환경일지는 모르겠지만, 다니엘 6장이 [하나님 나라]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미쉬 공동체와 같은 [재세례파]가 되어야 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길이 있습니다! 바로 미션얼의 길입니다!

 

미션얼:미시적 문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기.

여기서 잠깐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자신을 내어주며 살아갈 때, 바로 지금 여기가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선교학교 지체들이 서로를 양보하고,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격려하면 바로 여기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상 전체가 바뀌진 않습니다. 대통령이 장로라고 마찬가지고, 목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껏해야 다니엘 6장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만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건설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뤄집니다. 다만, 우리가 성령 안에서 재림 시에 맞이할 희락과 평안과 참된 자유를 임시로 맛볼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말하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로부터 올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간단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고 우리의 삶의 태도와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는 일종의 지시어입니다. 표지판입니다. 손가락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오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모두들 다투고 헐뜯는 세상 속에서 사랑과 용서를 베풀면, 바로 우리의 그 태도 덕분에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죠.

 

[하나님 나라]는 오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합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렇기에 진보파와 보수파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궤를 벗어난 운동입니다. 물론 그들의 운동과 그들의 투쟁은 이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정신이 법제화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니엘서 2장보다는 6장이 더 살만한 나라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곳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재세례파 운동도 아름답고 멋진 운동이긴 하지만, 그 운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세상 속에서 지시해줄 수는 없습니다. 세상 밖에서 하는 운동이 아닌, 세상 속에서 하는, 세상 속으로 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미션얼이 우리에게 주는 조언은 바로 [문화변혁]입니다. [문화]라고 해서 거대한 문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싼 말하고, 뭔가를 주고 또 받고, 함께 살아가는 아주 미시적이고 세세한 [문화]. 사실 따지고보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고, 거대한 성과도 거두지만, 그 안에 세세한 문화와 구조가 사탄적인 교회나 선교단체가 많습니다. 부산의 유명한 어떤 목사님은 부교역자가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에 소소한 폭력을 가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떤 업무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거나,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시스템이 마비되었다면 ‘질책’과 ‘권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미명 아래에서 모든 것을 대충 은혜로 덮자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명백한 성과를 위해서 아래의 사람들을 착취하고, 폭력하는 행위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하나님 나라]보다는 [사탄의 나라], [지옥]에 가깝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부름받아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체득하여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권을 준비하고, 항공권을 발매하고, 교육에 참여하고, 함께 공동체를 일궈가는 모든 순간순간마다 요원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문화입니다. 서로에게 따스하게 대하고, 서로에게 좋은 말, 선한 말을 베풀고, 서로를 격려하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 사실 경상도 사람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서울 사람들처럼 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아주 미세한, 무의식중에 나타나는 나의 태도와 말이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지시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마가복음은 아주 독특한 복음서입니다. 다양한 문학적 장치와 다양한 의미의 층위들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지점은 예수께서 왕이 되시는 예루살렘 입성장면입니다. 마가복음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은 왕이시다!’는 결론으로 끝나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 기록된 이사야의 예언은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예시합니다. 자연스레 마가복음의 결론은 왕으로 등극하시는 하나님의 대관식으로 끝나야 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결말은 십자가입니다. 혹여나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게 마가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라는 말을 강도들을 통해 말하게 합니다(15:32). 빌라도 또한 예수를 향해 ‘유대인의 왕(15:12)’이라고 고백하죠. 그 고백의 정점은 백부장입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15:39)’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감탄이 섞인 고백과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왕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나라를 열어젖히셨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부활의 영광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의 현존과 함께 제자들은 또 다른 작은 예수가 되어 세상을 살아갑니다.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여기서의 핵심 포인트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시작을 가능케 만들었던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오늘 여기 우리가 속한 자리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느낄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전달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은 성령 안에서 십자가를 지는 삶의 태도입니다. 성령 안에서 십자가를 짊어질 때에 아버지만이 알고 계시는 종말에 이뤄질 천국을 지금 이 순간 맛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우리 뿐만이 아니라, 십자가를 짊어지는 우리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천국을 맛보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질 때, 그들은 천국소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션얼’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입니다. 일상 속에서, 소소한 사건들 속에서, 우리의 태도와, 말투와, 작고 미묘한 순간들까지 십자가에 메달아 올릴 때, 우리는 비로소 ‘일상 속을 살아가는 선교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작은 말투에, 우리의 작은 태도에 감명 받은 이들은, 우리를 통하여 천국소망을 함께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페리코레시스 : 대제사장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춤에 참여하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단일신’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홀로 독야청정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서로가 함께 친밀하게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며,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스스로가 사랑이시며,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의 넘침은 결국 인간과 피조세계를 창조하는데까지 이르렀고, 끝끝내는 타락한 인간을 다잡아서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데려오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삼위하나님의 일체를 묘사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쉽게 말하면 ‘강강수월레’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세 분의 하나님께서 각각의 역할에 맞춰서 하나의 춤을 추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를 위해,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며 ‘하나의 몸짓’을 만들어나갑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요한복음 17장)는 ‘하나의 몸짓’ 속에 인간 또한 함께 참여하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인간까지 포함한 ‘사위일체’를 꿈꿉니다. 우리 또한 춤의 파트너로 초청하시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이 기도를 함께 따라하면서 우리의 지향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특정한 사역/미션의 해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이 춤에 참예하는데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삶의 ‘디테일’ 속에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이 춤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말투, 행동거지, 무의식 모든 것이 나 자신을 내어주고, 나 자신을 양보하며, 타인을 대접하는 격조있는 태도를 갖출 때에 우리는 이 춤에 참예합니다. 다만 명심할 것은 우리가 이 춤의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또한 명심할 것은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홀로 이 춤의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이겠죠. 우리는 서로를 타자에게 내어줌으로, 타자를 주인공으로 초청함으로 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자면 이 춤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 자신을 내어주고, 타인을 대접하는 총체적인 나라입니다. 그 나라 속에서 모든 불의와 고통은 끝이 납니다.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도래합니다. 우리의 춤은 끝끝내 타인을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는 초대장이 될 것입니다.

 

결론 : 십자가의 문화 체득하기.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 속에 등장하는 목사님은 무능력합니다. 목회에 실패한 목사님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기도로 자신의 둘째아이를 살리는데도 실패했습니다. 하물며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핑계로 예배시간을 지키는데도 실패했습니다. 교인들은 그를 탄핵했습니다. 그가 무능하다고 결정 내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우리 동네의 목사님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눈에 그는 목사님입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된다고 외치는 그는 진짜 목사님입니다. 둘째 아이를 잃은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진짜 목사님입니다. 그는 더 이상 시무하던 교회의 목사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천히 페달을 밟고 자기의 길을 갑니다. 아마도 시인은 그런 그의 모습 속에서 십자가를 향해 걷는 예수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교인들의 눈에는 목사님이 아닐지몰라도, 시인의 눈에 그는 목사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무의식마저도, 뼛속까지도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세밀한 ‘문화’마저도 예수를 닮으라는 권면입니다. 말투, 태도, 행동 등등. 이러한 삶을 살 때, 우리의 사역과 미션이 실패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그를 목사님에서 쫓아냈지만, 시인은 그를 여전히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채워진 성령이,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증명케하는 것. 우리의 사역이나 특정 과업의 성공이 아닌, 우리의 인격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증명하는 것. 하나님은 그곳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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