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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강의안]사귐의 기도

by 홍도사 2020. 2. 20.
본 강의안은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들어가는 말 : 기도생활을 위한 점검.

1)우리에게 하나님은 혹시 산타클로스가 아닐까?
성탄절이 되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기다린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산타클로스로 대변되는 선물을 기다린다. 훗날 산타클로스의 존재가 사라져도 개의치않는다. 선물만 얻을 수 있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라. 당신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기다리는가? 아니면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는가?

 

2)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
많은 한국교회에서 내거는 기도와 관련된 구호 중의 하나는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도만능주의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3)무엇을 구해야 얻을 수 있는가?
당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는가? 하나님께 담대히 구했을 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응답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또 이유는 무엇인가? 혹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기도를 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하나님 때문에 기도하는가? 혹은 기도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가?

기도생활을 점검하기 위해서 던졌던 세 가지의 질문은 하나로 일치된다. 기도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더 나아가 많이들 오해하고 있는 기도응답과 관련되어 기도를 정의하는 편견에 대한 물음이 담겨있다. 우리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가? 혹은 기도의 결과물인 기도응답에 관심이 있는가? 만약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종류의 신이 기도응답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우리는 관심이 없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습득한 ‘감’에 의해 하나님의 이미지를 상상한다. 기도는 ‘감’에 의해 결정된다. 기도를 통해 만사가 변화된다고 외치는 교회에서 자란 이들은 하나님을 ‘만사를 변화시키시는 도깨비방망이’로 이해한다. 간절한 기도만이 응답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회에서 자란 이들은 하나님을 ‘간절함을 요구하는 욕심쟁이’정도로 이해한다. 정녕 성경은 그런 류의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가?

 

흥미롭게도 성경은 기도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성경에 기록된 기도의 분량 중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편은 기도응답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다. 정말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여기에 있는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나를 향한 계획과 섭리를 지니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누구시느냐의 물음은 중요하다. 우리의 당면한 필요를 해결해주시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손바닥 위에 두고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정말 하나님은 선하신가? 정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가? 정말 하나님은 자비로우신가? 시편의 기도는 대부분 이런 류의 질문으로 점철된다.

 

하나님은 누구시냐의 질문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 기도 때문에 하나님 찾기를 멈추고, 하나님이 누구시느냐에 근거하여 기도를 배워가보자.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폐기하고 죄의 형상, 세상의 형상을 택했다. 바로 선악과이야기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형상을 알려주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려주시기 위해 온 분이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시기 위해 온 분이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지점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책임지시는 분이다. 세상의 타락을 인간만의 탓으로 돌리시지 않으신다. 그 모든 책임을 감내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모든 죄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셨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두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요한복음은 십자가의 의미를 수식해주는 좋은 이야기를 하나 전달하고 있다.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인간의 발을 씻기시는 분이다. 친히 낮아짐을 감수하는 분이시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선악과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이야기를 묘사한다면, 이 땅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에 메달리신 예수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이야기를 묘사한다. 구약성경의 첫 시작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서 시작한다면, 신약성경의 첫 시작은 ‘인간을 찾아온 하나님’에서 시작된다. 기도에 대해서 다루기 이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컨셉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와 대화할, 우리와 친분을 쌓을, 우리와 사귐을 나눌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책임을 지시는 분이시다. 낮은 자세로 우리의 발을 씻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눠보자.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모든 일이 가능한 꿈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수께서 데이트를 하자고 카톡을 보내셨다. 장소를 잡고, 약속시간을 잡으셨다. 상상해보라. 장소는 어떤 느낌일까? 약속시간은 언제일까? 어떤 옷을 입고 오셨을까? 어떤 표정으로 오셨을까? 처음 우리를 봤을 때 먼저 건네는 말은 무엇일까? 이런 상상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유념하자.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책임을 지시는 분이셨다. 발을 씻기는 분이셨다. 먼저 다가온 분이셨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이셨다. 상상해보라!

 

자 이제, 서로 마주 앉았다. 어떤 얘기를 꺼내고 싶은가? 어색했던 분위기가 익숙해졌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마음 속 한 켠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토로해보라. 정말 어떤 요구를 들어달라고 기도할 것인가? 그렇진 않을 거다. 마음 한 켠에 담아두었던 질문, 밤새 고민하며 씨름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누군가와의 관계 등등. 사실 이런 류의 토로하고 싶은 말들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오늘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는 문제들이다. 기도의 첫 초점은 ‘응답’에 있지 않다. ‘나’를 향해 있다.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오면서 딛고 있는 문제, 아픔, 고통에 있다.

 

기도는 어렵지 않다. 이런 간단한 상상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하나님의 컨셉을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나올만한 말들을 하나씩 꺼내는 것. 응답이 없는 고요한 침묵만 이어지더라도,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예수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 더 나아가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미묘한 느낌과 늬앙스를 통해 다시 한 번 나 자신의 문제를 돌이켜보는 것. 때로는 눈물이 나올 때도 있다. 때로는 노래가 나올 때도 있다. 예수 앞이니까 찬양을 불러야겠지만. 때로는 기쁘게 뛰며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괜찮다. 그거 다 기도니까.

 

아픔의 시대, 힐링을 바라다.

우리는 모두 아픔의 시대를 살아간다. 세상은 우리를 생존의 장으로 초청한다. 아등바등거리며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생존조차 불가능한 시대다. 이런 시대 속에서 기도는 무의미한 것 같다. 혹은 내 모든 욕망을 관철시키고 나를 살아남게 하는 능력이 요원할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 아픔의 시대, 생존경쟁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호의를 베푸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아픔의 시대, 힐링을 바라고 있는, 망가진 자아와 내면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을 자그마한 식탁 앞으로 초청하신다. 내면의 이야기, 고통의 이야기, 고요한 울부짖음을 듣길 원하신다.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초점은 또한 ‘나’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며, 또한 ‘나’를 만난다. 내면과의 깊은 대화가 일어나는 장소이며, 그런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장소이다. 기도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직면하자. 아픈 나를 발견하자. 상처로 고통스러워 하는 나를 발견하자. 또한 고통스러운 상처를 은폐하려는 스스로의 모습, 자기방어의 벽을 높이 세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자. 우리가 욕망하는 기도응답보다 더 큰 은혜와 복은 바로 ‘나’를 바로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치열한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배우는 것.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딛고 일어서는 것. 김영봉은 이런 기도의 내용을 ‘사귐’이란 키워드로 정리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다. 하나님을 알고 배우는 것이다. 사귐이 깊어지면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나의 진정한 자아와의 사귐으로 초청한다. 아프고 힘겨워하는, 힐링을 욕망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미워하고만 있었던 나 자신을 끌어안게 만든다. 내가 인정하기 싫었던 나 자신을 딛고 일어서게 만든다. 더 나아가 내 안에 숨어있던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상을 발견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나와의 사귐이 깊이 일어난다. 나는 사귐을 통해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 나를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 이는 결국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 도저히 한 공동체 내에서 포용할 수 없었던 사람. 하지만 사귐은 끝내 타인과의 사랑, 타인과의 화해의 길을 열어젖힌다. 오랜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묘사해왔다. 세 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귐의 달인이시다. 하나님은 홀로 사귀시는 분이시다. 성부께선 성자와 성령을 사랑하신다.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을 사랑하신다. 성령께서는 또한 성부와 성자를 사랑하시고 존경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사귐의 세계로 우리를 초청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의지하듯이, 우리 또한 그런 존재로 빚어나가신다.

 

기도의 시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도의 응답 또한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도의 방향이 중요하다.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쓸데 없는 감정도 괜찮다. 시덥지않은 문제도 괜찮다. 이를 통해 사귐이 진전된다면, 이를 통해 나 자신을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질 수 있다면 충분하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아름다울 수 밖에 없다. 오늘의 나를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에, 더 나아가 세상의 최고 선이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깊은 사귐의 기도로 당신을 초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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