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품을 수 있을까?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하나됨] 챕터를 읽고.
들어가는 말.
케네스 베일리는 독특한 성서학자입니다. 그는 서문에서 본 책을 통해 고린도전서에 대한 ‘권위 있는 모든 저술을 개관하거나 그것들과 영향을 주고받은 체계적인 연구서(29)’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명시합니다. 오히려 그는 ‘구약성경의 성문 예언서에까지 소급될 수 있는 고린도전서의 수사 스타일과 동지중해 연안 세계의 문화(30)’를 통해 고린도전서의 밝혀지지 않은 지점을 읽겠다고 명시합니다.
정리하자면 그동안의 서구 중심적 성서학계가 연구하지 않았던 영역을 연구했다는 말이겠죠. 특별히 그는 이를 위해 ‘아랍어, 시리아어, 히브리어로 번역한 역본(44)’을 참조했으며 (서구 중심적 성서학계가 간과해왔던) ‘중동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1600 동안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천착하고자 합니다.
케네스 베일리의 독특한 방법론은 [프렐류드:예언적 설교 수사 스타일과 그 해석]에서 얼핏 엿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잘 알려진 문학 양식’인 평행법이 (구약성경뿐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는 짧은 진술입니다. 이를 위해서 구약성서 곳곳에서 사용된 다양한 방식의 평행법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케네스 베일리는) 바울 또한 (구약성경에서 곧잘 발견되는) 예언적 설교 수사법에 의존하여 말했을 것이기에 고린도전서를 예언적 설교 수사법으로 분석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케네스 베일리는 고린도전서를 다섯 가지 논문의 집합체로 읽습니다. 제가 다룰 부분은 (케네스 베일리가 구분한) 첫 번째 논문인 <십자가와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부터 4장 16절까지의 단락입니다.
먼저 케네스 베일리는 1장 10절부터 4장 16절을 크게 네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제점 : 분쟁, 세례, 십자가 (1:10-16) | |
|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 십자가를 통해 계시됨 (1:17-2:2) |
| 하나님의 지혜 : 성령을 통해 계시됨 (2:3-16) |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 : 하나인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 (3:1-4:16) |
문제점 단락(1:10-16)과 해결책 단락(3:1-4:16), 그리고 문제점에서 해결책으로 나아가는 신학적 기초를 진술하는 단락(1:17-2:2, 2:3-16)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분석입니다.
첫 번째 단락. 분쟁, 세례, 십자가(1:10-16)
먼저 케네스 베일리는 첫 번째 단락을 다룹니다. 첫 번째 단락은 고린도전서의 배경이 되는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고리 모양 구성(A-B-C-B-A)으로 분석됩니다. 이에 따르면 핵심 메시지는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10)’입니다. 이러한 핵심을 두고 본문은 분쟁에 대한 내용과 예수에 대한 내용으로 갈라집니다.
사실 첫 번째 단락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케네스 베일리의 장점이 도드라지진 않습니다. 다만 크리소스토모스의 주장을 빌어서 본문은 ‘교회를 무례하게 분열시킨 자들의 이름을 적시하지 않고 대신 사도들의 이름을 거론함으로써 분열자에 대한 비판을 완화시키고(98-99)’ 있다는 사실을 명시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10)’는 주장은 ‘일종의 가면 뒤로(98)’ 숨겨진 파벌의 지도자들과, 파벌에 가담하는 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설득의 기초가 되는 핵심 신학적 논지는 다음 두 단락에서 제시됩니다.
두 번째 단락,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 십자가를 통해 계시됨(1:17-2:2)
이어서 두 번째 단락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절부터 2장 2절까지의 본문을 케네스 베일리는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요. 이를 (이사야 28:14-18이 갖고 있는) 예언적 설교 수사법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석법이 본문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이라면 본 단락의 핵심메시지는 ‘우리가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a)’라는 바울의 선포입니다.
이어서 베일리는 동일한 본문(1:17-2:2)을 이사야 50장 5절에서 11절까지의 종의 고난 본문이 지니고 있는 이중 샌드위치 구조로도 분석합니다(A-B-C-B-A-B-C-B-A). 이런 비교를 통해 이사야에서 등장하는 종의 고난은 ‘십자가를 전하는 행위’와 일치됩니다. 세상의 ‘지혜 있는 이들과 총명한 자들’은 종을 박해하는 대적들과 일치됩니다. 결론적으로 십자가를 전하는 이들은 (일시적으로) 수치를 당하겠지만, (종말에는)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총명한 이들을 능히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는 본문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 공동체는 분쟁의 상황 속에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총명한 자들이 비웃을지라도) ‘십자가의 정신’을 본받아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할 것(1:10)’을 첫 번째 요구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 하나님의 지혜 : 성령을 통해 계시됨(2:3-16)
이어서 세 번째 단락입니다. 케네스 베일리는 세 번째 단락을 다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지혜 : 감춰져 있으며 이후에 성령을 통해 계시됨(2:3-10a) |
하나님의 지혜 : 하나님을 통해 곧 그 분의 생각과 영을 통해 계시됨(2:10b-16) |
①하나님의 지혜 : 감춰져 있으며 이후에 성령을 통해 계시됨(2:3-10a)
두 개의 단락 중의 첫 번째 단락은 (이사야 43:25-44:8이 사용하고 있는) ‘높이뛰기 형식’으로 분석합니다. ‘높이뛰기 형식’이라는 구조 안에서 보면 또한 핵심 클라이막스는 ‘그들이 깨달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2:8b)’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어 관계대명사(that which)가 네 번이나 배치되었음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분석합니다.
A | 하나님의 지혜 : 비밀 속에 감춰져 있음 | |||
B |
| 관계대명사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작정하심 | ||
C |
|
| 관계대명사 : 통치자들이 깨닫지 못한 | |
D |
|
|
| 영광의 주의 십자가 |
C’ |
|
| 관계대명사 : 아무도 깨닫지 못한 | |
B’ |
| 관계대명사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심 | ||
A’ | 하나님의 지혜 : 성령을 통해 계시됨 |
이러한 구조 속에서 본문은 (성령을 통해 십자가를 깨달은) 우리에게는 감춰진 비밀이 성령을 통해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해줍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일입니다. 반면 이러한 구조는 (십자가를 깨닫지 못하는) 통치자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비밀 속에서 감춰져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깨닫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눈과 귀가 먼 사람이라는 명료한 진술입니다.
②하나님의 지혜 : 하나님을 통해 곧 그 분의 생각과 영을 통해 계시됨(2:10b-16)
두 개의 단락 중에 두 번째 단락은 고리모양 구성으로 연결된 다섯 장면으로 분석합니다. 이를 통해 보면 중간에 위치한 핵심 메시지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친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2:13)’입니다. 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은혜로 깨달은 이들과(2:12)과 육에 속하여 있기에 깨닫지 못하는 이들(2:14)이 나뉩니다. 이 전체를 둘러싸는 단락(2:10b, 2:15-16)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신) 성령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세 번째 단락에 속한 두 개의 단락을 종합해보면 결국 바울을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은 성령을 힘입어 신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생각을 깨달을 책임이 있고, 더 나아가 이러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진단 하에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각’인 ‘십자가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이 소통되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분쟁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겠죠.
네 번째 단락, 그리스도인의 연합 : 하나인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3:1-4:16)
이제 마지막 단락입니다. 앞의 단락을 상기한다면 성숙한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깊은 것’인 ‘십자가의 생각’을 깨닫고 실천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스스로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바울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빌려왔다고 케네스 베일리는 해설합니다.
케네스 베일리의 따르면 3장 1절부터 3절까지는 간단한 고리구조(A-B-C-B-A)로 이뤄져있습니다. ‘신령한 자처럼 대할 수 없는 육신에 속한 이들’(3:1a, 3:3a)은 ‘준비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3:1b, 3:2c)입니다. 이유는 바울이 ‘단단한 음식이 아닌 젖으로 길렀음에도 단단한 음식을 먹을 준비가 여전히 되지 않았기 때문’(3:2a-3:2b)입니다. 어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케네스 베일리는 그에 대한 해설이 바로 3장 3절 후반부에 나와 있다고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달리 말하면 이들은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와 같은) 지도자를 좋게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자체가 사실은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시기와 다툼이라고 진단합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사실상 (시기와 다툼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특별히 베일리는 이 지점에서 바울이 이사야 28장 9절(‘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메시지를 설명하겠는가? 젖을 뗀 자들, 곧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겠는가?’)에서 젖을 먹이는 어미의 이미지를 빌려왔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인에 대한 실천적 해답은 크게 두 본문의 논지로부터 시작됩니다. 먼저는 ‘바울이나 아볼로의 정체’에 대한 본문(3:5-9)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집과 건축자의 비유’에 대한 본문(3:10-17)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본문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함유한 ‘이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에 대한 본문(3:18-4:7)에서 실천적 대답이 완성됩니다.
(지면 관계상 3:5-9에 대한 본문과 3:10-17에 대한 본문을 자세히 다루지 않고 3:18-4:7로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실천적 대답이 완성된 본문(3:18-4:7)을 케네스 베일리는 이사야 44:18-20에서 등장하는 예언적 수사법으로 분석합니다. 중간의 세 단락(4:1-2, 4:3-4, 4:5)을 두고 세 개의 서로쌍 개념(3:18-19a와 4:7, 3:19b-3:21a와 4:6b, 3:21b-3:23과 3:6a)이 서로 마주보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본다면 결국 바울의 핵심 논지는 바울 스스로도 (당연히 아볼로와 게바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터인 예수 그리스도 위에 거룩한 교회를 짓고 있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가 오기까지 그들은 ‘충성’해야만 하고, 이러한 (교회와 청지기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고린도 교인은 알고 (서로의 지도자를 높이며 타 지도자들을 시기하고 다투기보다는) 자중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케네스 베일리는 최종단락(4:8-16)이야말로 본 논문의 진수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성전을 쌓아올리는 청지기들(바울, 아볼로, 게바)와 그들을 두고 시기하며 분쟁하는 고린도교인을 적나라하게 비교하고 있는 단락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교 끝에 바울은 (이전에 성숙하지 못한 교인들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아버지가 되고자 결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4:14a)’ 그리고는 이전과는 달리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4:16b)’
정리하자면 어머니와 같았던 자신의 양육은 끝끝내 ‘십자가의 정신’을 본받아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할 것(1:10)’에 대한 권면의 결실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첫 번째 논문은 이에 대한 신학적 전거를 탄탄하게 제시한 후 바울이 경험하는 삶의 이미지를 그려냅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젖을 먹이는 어머니가 아닌, 자녀들에게 본을 보이며 살아가는 거친 아버지로서의 바울을 제시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본받아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할 것’은 바울이 걸어가고자 하는,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나가는 말.
케네스 베일리의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대한 고유한 해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조분석을 통해서 본문의 명확한 위치를 조정하는데 있어서는 탁월합니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현대적 논문 작성법을 따른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현대적 논문 작성법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는 사람도 아닙니다. 구약성경이 자주 보여주는 예언적 설교 수사법을 능통하게 사용한 사람입니다. (또한 서평에는 쓰지 않았지만 그리스 수사법 또한 의미 있게 활용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수사법을 능통하게 사용했다면 고린도전서의 메시지 또한 흐릿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체계적이고 명료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첫 번째 논문은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신학적 통찰이 없었던 교인들의 분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바울은 그들에게 어미로서 젖을 먹여왔으나 이제는 아비로서 엄격하게 자신을 본받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전과는 달리)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교회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신학적 진술을 체계적으로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시기와 분쟁에 휘말려있다면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육에 속한 자들’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은 시기와 분쟁을 멈추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10)’는 바울의 주장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바울의 체계적인 진술은 효율적이었을까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세기에 건넸던 바울의 체계적인 진술이 케네스 베일리의 손길을 거쳐서 우리에게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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