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남편 요셉. (1:18)
마태의 족보 본문은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처럼 보입니다. 유대인 세계에서 메시야는 다윗 언약 안에 뿌리박혀있습니다. 더군다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행위 또한 아브라함 언약 안에 메어있습니다.
사실 예수는 출신이 불분명한 사람입니다. 예수가 메시야라고 주장하려면 다윗 언약 혹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예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바로 그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흥미롭게도 저자 마태는 단순히 혈통 증명에 그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말/라합/룻/우리야의 아내/마리아라는 다섯 명의 여자, 아브라함/다윗의 혈통과는 상관없는 여인들의 이름이 족보 안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특히나 다말/라합/룻/우리야의 아내/마리아는 각각 성적 스캔들과 결부된 여인입니다.)
특히나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 사이에서 솔로몬이 탄생했다(1:6)는 진술이 유의미합니다. 왜 하필 밧세바가 아닌 우리야일까요? 우리야의 혈통 밧세바가 다윗 혈통으로 편입된 과정을 해설하기 위한 장치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야의 혈통 밧세바가 다윗의 혈통으로 편입되었음을 상징하는 장치가 바로 ‘우리야의 아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더 나아가 이런 장치와 유사한 장치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1:16)’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애써 우리야의 혈통 밧세바가 다윗의 혈통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야의 아내’를 사용한 것처럼, 다윗의 혈통 요셉이 마리아의 혈통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리아의 남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혈통에게서 난 솔로몬, 여기서 다윗과 솔로몬 사이에다가 ‘우리야의 혈통’ 밧세바를 편입시킨 것처럼, 족보 본문은 마리아의 혈통에게서 난 예수, 여기서 마리아와 예수 사이에다가 ‘다윗의 혈통’ 요셉을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마태의 족보 이야기는 예수가 다윗의 혈통이며 아브라함의 혈통이란 사실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혈통이며, 다윗의 혈통인 요셉이 마리아의 혈통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담담히 증언합니다. 이어서 본문은 마리아의 혈통에게서 난 예수는, 바로 성령의 혈통, 하나님의 혈통이라고 해명합니다(1:18).
결론적으로 마태의 족보이야기는 다윗의 혈통이 하나님의 혈통 안으로 편입된 이야기입니다.
이는 마태의 신학과도 결부됩니다. 어떤 특정한 혈통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어떤 특정한 전통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에 따른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셉 또한 주의 사자의 현몽에 믿음으로 응답할 때 예수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처럼(1:20-25),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 또한 자신의 전통/혈통이 아닌, 믿음에 따른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늘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 먼저냐? 하나님의 혈통이 먼저냐? (22:41-46)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각기 종교전통에 메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임마누엘(1:23)’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 자체를 부인한다면, 바리새인은 부활을 부인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이어야 된다는 사실에 집착합니다. 1장의 족보이야기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임을 증명하는 족보였다면 문제가 없었겠죠. 하지만 1장의 족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혈통이 다윗의 혈통보다 상위 개념임을 증명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임마누엘(1:23)’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22:42)’이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다윗의 자손일리 없는 정체가 불분명한 예수는 그리스도일리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를 두고 예언적 시편을 인용하며 해설합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그리스도를 두고 다윗이 ‘주님’이라 고백했던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죠.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되묻습니다. ‘정녕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겠느냐(22:45)?’
앞에 있는 족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해봅시다.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혈통 아래 다윗의 혈통 요셉이 (‘믿음의 반응’을 통해) 편입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보다 크지 않고,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큽니다. 다윗의 혈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혈통으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반응이 요구됩니다.
가나안 여인의 혈통, 하나님의 혈통. (15:21-28)
마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는 1차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합니다. 이스라엘의 갱신 이후에 이방인을 향한 복음 선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딸의 귀신들림으로 인해 예수께 찾아온 가나안 여인은 먼저 거절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다윗의 혈통도 아니거니와,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족속의 혈통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앞으로 알아보겠지만) 마태복음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향한 삶의 기본적 잣대와, 그에 따른 치유/이적이 한 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할 경우에(7:12)’ 여호와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질병을 멀리(7:15)’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23-9:35의 본문이 전형적인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고, 그에 따른 복으로 질병이 치유되는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여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아니거니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할 자격도 없기에, 치유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물론 가나안 여인과 동일한 구조가 8:5-13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혈통 요셉이 믿음의 반응을 통해 하나님의 혈통인 예수의 가족으로 편입되었던 것처럼, 또한 백부장이 믿음의 반응을 통해 종의 치유를 경험했던 것처럼, 가나안 여인 또한 믿음의 반응을 보입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15:27)’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적절합니다. 믿음을 칭찬하시고는, 그의 딸을 치유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가나안 여인이 치유를 얻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서 복음을 듣고, 지켜 행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방법은 전통을 고수함에 있지 않고, 혈통이 순결함에 있지 않고, 믿음의 반응 여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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