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행위구원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루터의 바울해석에 근거하여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진영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읽어왔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도 동일하게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읽어왔습니다. 자연스럽게 바리새인들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거짓교사들의 정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며, 예수님의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흔히 강단에서 외치는 <이신칭의>의 뜻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숭실대의 권연경 교수는 이 문제를 갖고 이렇게 정리한 기억이 납니다. “만약 누군가가 행함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의 준칙들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면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내 앞에 있는 이를 실제 용서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가난한 이를 잘 대접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 다수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말하는 바와 행하는 바가 다른 “위선”의 문제 앞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내부에 침투한 거짓교사들을 공격하는 바울의 칼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3장 10절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거짓교사들은 <행위구원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기록된 특별한 절기 준수를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NIV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You are observing special days and months and seasons and years! (3:10)”
결국 문제는 <행위구원론>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 백성 자격증을 어디서 발급받느냐>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주장하는 것은 <유대인>이 되어야 발급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E.P.센더스라는 학자는 반복되는 <율법>이라는 것 자체가 특정 규칙에 대한 실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어겼을 때에 제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는 모든 과정을 포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거짓교사들은 <행함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들어오는 <유대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 자격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바울이 주장하는 바도 또한 <믿음구원론>이 아닙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백성 자격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복음의 선포를 들었을 때에 성령이 주어지는 공통경험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갈라디아서의 바울은 이를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징표로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범주 바깥에 있기에, <율법>과도 상관이 없고, <할례>와도 상관이 없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 때문에 충분히 하나님의 백성 자격증을 발급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요!
이제 갈라디아서 내의 거짓교사들과 바울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거짓교사들이 말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마치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구약성경의 구속사를 나열하며 그들은 하나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임을 애써 주장했고, 갈라디아 교회 내의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이 요구하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킴을 통해 완벽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갖출 것을 주장했습니다.
반면 바울이 말하는 바도 간단합니다. <할례> 혹은 <율법>과 같은 유대인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는 오직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계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부터 하나님의 구원목적은 <할례> 혹은 <율법>을 통해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애초 목적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또한 할례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유대인 남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또한 남성과 여성 모두의 하나님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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