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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신약

성서학적으로 해석하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

by 홍도사 2016. 9. 19.


0.들어가는 말.


금일 (9월 18일)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 본문 중 복음서 본문은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알려진 본문이였습니다. 이 본문은 참 난해한 본문인데요. 본문은 그 나름의 세계를 갖고 있어서 각자의 지평, 각자의 고민에 따라 서로 다르게 말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특정한 '정답'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 비유를 해석하기 이전에 주해 자체를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에 가까운, 아주 주관적이고 실존적인 '해석', 이전에 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본문 자체의 짜임새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작업을 조금 나눠볼까 합니다.


먼저 본문의 짜임새를 분석하기 이전에 전제되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아마도 그 단락 자체가 '전승'으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비유 자체가 갖고 있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가 말하는 바가 있을 수 있습니다.
  2. 하지만 '누가복음'의 편집자(혹은 저술가)는 기존에 있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전승을 차용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의미체계, 혹은 해석체계를 만들어낼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는 누가복음 자체 안에서 나름 공명되고 있는 체계의 일부일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마가, 마태, 요한과는 별개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자면 이를 토대로 재구성한 역사적 예수, 혹은 역사적 교리와도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오직 누가 혹은 누가행전 자체와만 연관된 문제일 것입니다.)
  3. 그리고 누가는 이러한 의미체계, 혹은 해석체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기존의 전승을 변용하기도 하고, 새로운 구절(이를테면 추가해설)을 삽입하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원래 비유의 어떤 부분을 삭제해버리기도 할 것입니다만 그건 우리가 알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여기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세 가지의 전제를 갖고 본문을 분석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그렇다면 제가 본문을 분석하기 전에 해야할 작업은 1.누가의 신학 자체를 분석하는 일이거니와, 2.비유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분석하는 일이며, 3.비유가 그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분석하는 일입니다.



1.누가의 신학 분석하기.


누가는 공관복음서의 일종입니다. 달리 말하면 공관복음서와 자료를 공유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가는 공관복음서와 자료를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복음을 남기지 않았을겁니다.) 


이를 위해서 펼쳐봐야 하는 것은 바로 개론서입니다. 저는 마르틴 에브너와 슈테판 슈라이너가 편집한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신약성경개론>을 펼쳤습니다. 누가복음은 나름의 공통된 자료와, 누가복음 자체의 자료를 갖고 어떻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있을까요? 먼저 구조 파트를 탐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게는 279페이지부터 281페이지까지가 인상깊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유심히 살펴본 지점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의 여행(9:51-19:28)" 속에 우리가 해석할 비유가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를 알고 있다면 마가의 여행길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가 자체가 여행길에 어떤 기사를 넣었는지를 기억해볼 수 있죠. 잠시 마가로 넘어가자면 마가는 세 번의 수난예고 사이사이에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그 여행길을 각기 다른 '맹인의 치유' 본문으로 감싸면서 제자들이 맹인과 같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줍니다.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보기는 보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일이 현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제자들과는 다르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나름의 가르침, 즉 제자도를 전달해줍니다. 


누가도 거진 비슷합니다. 누가의 여행길은 본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반적으로 팔레스티나 지리에 별로 정통하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한마디로 누가의 여행길이 역사적 여행길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있던 자료들을 지리가 아닌 다른 것, 이를테면 의미나 신학을 중심으로 재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마가를 중심으로 누가를 썼다는 상상을 해본다면, 누가 또한 '제자도'의 관점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재배치했다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실제 본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래는 상황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던 많은 전승 소재를 자신의 예수 이야기 안에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이죠. 한마디로 지리적으로 확실치 않는 여행길 속에다가 자기가 수집한 예수 전승, 특별히 예수의 어록자료를 중심으로 배열해놓은 것이 누가의 독특한 지점입니다.


책을 살짝 넘겨서 301페이지에서 303페이지에 이르는 <사회 문제>라는 파트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누가가 제시하는 '본보기인 제자들'로 '소유물에 대한 태도'를 꼽습니다. 달리 말하면 누가에서 제시하는 제자도는 무소유 그 자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직접 개론서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성경 본문까지 따라가시면서요) 물론 본 책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소유물에 대한 태도'는 결국 '누가복음의 독자들 내부의 부자들을 비판하는 기능'이며, 더 나아가서 일종의 '문학적 이상'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빈털터리 제자 무리에 대한 경제적 뒷받침' 혹은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한 온정'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모든 소유물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만 삭개오처럼,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을 돕던 여인들처럼 빈털터리 제자 무리를 뒷받침해주던지, 혹은 사회적 낙오자들에 대해 온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제자일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가 제 나름대로 개론서를 읽으면서 분석한 누가의 신학입니다. 물론 누가복음과 관련된 모든 지점을 읽고 누가복음을 정리하는 것이 '정설'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제자도와, 또 재물을 사용하는 것과 연관되었음을 전제하였고, 그에 대한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습니다.


2.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자리한 독특한 자리.


다음으로 우리가 탐독해야 할 것은 본 비유가 위치한 자리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본 비유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길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는 점점 죽어갑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와 예수를 반대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져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마가에서처럼) 제자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본문이 위치한 주변부를 샅샅히 뒤지는겁니다. 왜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거기에 위치했는지, 더 나아가 그 비유를 해석할만한 단서들이 주변에 있는지 샅샅히 뒤지는겁니다.


제가 찾은 첫 번째 단서는 14장 24절과 26절, 그리고 33절입니다. 16장 이전에 예수께서는 큰 잔치, 이른바 하나님 나라 잔치를 해설하면서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누가의 신학적 관심사인)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이 그 잔치에 초청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런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청받게 되면 우리가 해야 할 임무로써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일종의 제자도입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이 자체도 제자도이지만, 이 이야기 자체가 말해주는 새로운 제자도가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 잔치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사실상 이 본문의 흐름 속에서 도출되는 암시된 제자도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마친 이후 우리가 살펴볼 비유의 재미있는 단락 구분이 시작됩니다.


  • 잃은 양 한 마리와,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
  • 잃은 한 드라크마와, 나머지 아홉 드라크마.
  • 잃은 둘째 아들과, 나머지 첫째 아들.

이 비유의 배열은 점층법입니다. 잃은 것과 남은 것 사이의 비율은 점점 높아집니다. 1%로 시작되었던 비율은 10%가 되고 이어서 50%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점층법이 또 시작됩니다.


  • 돌아온 둘째 아들과, 그로 인해 낙망한 첫째 아들.

  • 해고된 청지기와, 그로 인해 재산을 손해 본 주인.

  • 죽음 이후에 아브라함 품에 안긴 나사로와, 죽음 이후에 스올에서 고통받는 부자.

한마디로 이중 점층법이라 할 수 있겠네요. 탕자의 비유는 나머지 4개의 비유의 가운데에 서서 첫 번째 점층법의 정점을 맡고, 두 번째 점층법의 발단을 맡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점층법의) 절정에서는 잃어버린 아들과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아들을 대비시킵니다. 더 나아가 (두 번째 점층법의) 발단에서는 갑자기 도래한 둘째 아들의 귀환으로 말미암아 화를 내게 됩니다. (실제로 물질적 손해를 보았는지는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이런 이중 점층법은 15장의 서두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잃어버린 그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는 예수를 두고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원망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잃은 것을 찾는 하나님 나라 잔치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게 첫 번째 점층법을 통해서 '잃은 것을 찾는 소중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그렇게 강팍케된 이유를 '돈'에서 발견한 예수께서는 두 번째 점층법을 통해서 '물질'에 마음을 두지만 어떤 특정한 순간에서는 결국 물질을 잃게되는 비유의 두 번째 점층법을 통해서 '물질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3.불의한 청지기 비유 자체가 가진 난점.


참,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8절에 등장하는 주인(호 퀴리오스)가 누구냐의 문제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다시피 퀴리오스는 주인을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도 부르고, 하나님을 퀴리오스라고도 부릅니다. 민경식은 그의 논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는 누구인가?'에서 호 퀴리오스가 바로 예수님을 뜻한다는 사실을 풀어냅니다. 물론 굳이 그의 제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의 핵심주장은 나름 뚜렷하니까요.) 하지만 그의 제언대로 해석해본다면 본문 전체가 아주 아름답고 간명하게 떨어집니다. (실제 비유는 복잡한 수수깨기라기보다는, 아주 간명하게 나눠버리는 쉬운 이야기죠.)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가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떤 소문이냐면 자기가 고용한 청지기가 자신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그 청지기를 해고합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해고된 청지기는 재빨리 부자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그 빚들을 감액해줍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친구로 삼기로 결정합니다. 이런 청지기를 두고 '호 퀴리오스'는 그를 향해 칭찬을 내뱉습니다.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고 말입니다. 더 나아가 11절에는 그가 '불의한 제물로 충성했'음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호 퀴리오스를 단순히 부자로 해석해버리면 그가 충성한 것도 아니요, 지혜 있게 행동한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호 퀴리오스를 예수로 해석해버리면 청지기는 빚을 감액하면서 '부자를 섬기던 사람'에서, '예수를 섬기던 사람'으로 소속을 바꾸었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불의한 제물로 충성한 종이며, 더 나아가 일을 지혜있게 한 종이며, 이 세대의 사람이지만 또한 무지한 상태에서 한 일이지만 지혜로운 일을 하였다는 칭찬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이렇게 읽어버리면 끝내 두 번째 점층법이 성립됩니다. 세 비유 모두 갑자기 첫째 아들, 부자 주인, 한 부자가 타격을 입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와서 타격을 입습니다. 해고를 했는데 그 종이 갑자기 빚을 감액해버림으로 타격을 입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후에 타격을 입습니다. 그리고 타격을 입게되자 그토록 추구해왔던 '돈'이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점층법의 중간인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해설 도중에 이런 말씀을 넣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6:13)'


실제 이 본문은 호 퀴리오스를 주인으로 읽느냐, 예수로 읽느냐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는 호 퀴리오스가 속한 8절을 Word-Play로 읽고 싶은데요. 우리는 각자 호 퀴리오스를 예수로 읽을 수도 있고, 주인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으로 읽는 동시에 두 번째 점층법은 깨어지고,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속한 자리는 애매모호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로 읽게 되면 두 번째 점층법도 성립하고, 비유가 속한 자리도 아주 명확해집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읽기 방식을 선택함으로, 그 청지기가 주인을 선택하는 입장에 놓여있었음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Word-Play라고 할 수 있죠.


결국 이 이야기가 향하는 바는 다른 누구가 아닙니다. 15장에서 언급되었던 바리새인입니다. 14절과 15절에 나와있죠.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은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4-15)'



4.누가의 신학과의 연관관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누가의 신학을 개관함에 있어서 누가가 그려내고 있는 사상이 무엇이냐의 문제로 말입니다. 저는 서두에서 개론서를 참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는 제자도를 요구합니다. 그 제자도는 모든 것들, 특별히 재물을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누가 곳곳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수사학적 전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리고는 재물을 모두 포기하지는 않더라도 가난한 자를 구제하거나, 혹은 공동체의 뒷받침이 되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알게 모르게 위선을 통하여 구제하지도 않고, 뒷받침도 되어주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디스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비유의 위치는 이 바리새인 디스와 맞물립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첫 번째 점층법은 '하나님 나라'가 '죄인을 향해 초청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디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끝없이 잃어버린 자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향해 초청장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먼저 초청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에 기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점층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이해 못한 바리새인의 무지를 폭로하는 예수의 (혹은 누가의) 일갈을 발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두 번째 점층법은 그 바리새인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못함을 '돈을 좋아함'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죄인과 세리들과 예수께서 잔치하는 것을 디스하는 이유는, 달리 말해서 돌아오는 죄인들을 환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두 번째 점층법 자체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14절-15절도 말하고 있죠.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이며, 그것을 위장하기 위해 경건을 꾸미는 자입니다. 누가의 신학을 빌려오면 그들은 경건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제를 하지 않습니다. 앞의 만찬에의 초청장 이야기(14:15-24)를 잠시 돌이켜보면 죄인들이 초청장을 받게 된 이유는 먼저 초청장을 받은 이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4장에서 끝없이 드러나는 바에 의하면 초청장을 거절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돈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초청장에 응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점층법은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돈을 좋아했기에 죄인들의 돌아옴을 직시하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을 디스하는 비유의 문맥 속의 4번째 비유입니다.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보다는, 그로 인해 재산을 잃게되는 주인(바리새인을 상징)이 더 비중이 높습니다. 물론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는 이 비유와 연관체계 자체가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 자율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비유가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 그리고 죄인들의 초청을 (돈을 좋아하기에) 거절하는 바리새인을 디스하는 맥락 속에 있다는 사실은 직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누가의 문맥 속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 읽기입니다.


5.나가는 말.


성서해석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주 직관적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읽기 자체를 글로 풀어 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비유 자체가 그리 쉽지 않은데다가, 둘러싼 구성과 누가의 신학까지 다루자니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저의 읽기 방식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더 좋은 읽기 방식이 있다면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과 씨름하며, 어떻게든 본문의 흐름을 잘 살려내는 읽기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학도의 '길'이라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추신. 독일성서공회관주해설이 달려있는 개역성경을 바탕으로 글을 작성하다보니 성경본문을 그대로 인용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병신' 혹은 '소경'이라는 표현은 인권에 대한 이해가 다분히 떨어지는 번역입니다. 그냥 통칭해서 '장애인'정도로 읽어도 좋을텐데요. 이와 관련된 기사는 다음에 있습니다. 한 번 참조해보시길 바랍니다.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8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