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의 대화를 잃어버린 신학.
무엇보다도 ‘읽기’는 과거, 그리고 현재와의 대화이다. 현재의 문제, 고민, 씨름 등을 과거로부터 찾으려는 노력이 읽기이며, 이 과거가 성경이거나 혹은 특정한 선배 신학자들의 고전일 경우 이런 유의 읽기를 ‘신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교회의 많은 문제적 상황, 위기적 현실은 바로 ‘읽기’의 부재이며, 더 나아가서는 ‘신학’의 부재이다.
실제 이러한 ‘신학’이 부재했던 현실이 우리 교회 역사상 존재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의 이야기다. 당시의 부패한 읽기, 부패한 신학에 대항하여 마르틴 루터라는 사제는 바울의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우리의 문제, 고민, 씨름을 갖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결과로 ‘개신교’라 불리는 당대의 대안공동체(이른바 교회)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왜 당대의 대안공동체가 현실로 연결되고 있지 않을까? 아주 단순하다. 당대의 문제에 대한 당대의 해결책이었을 뿐, 오늘의 문제에 대한 오늘의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영석의 『바울의 삼중신학』은 루터가 읽었던 바울을, 오늘의 문제와 고민, 씨름을 안고 다시 읽어내려는 몸부림의 결과물이다. 어떤 면에서 루터와 다른 지점이 있고, 또 다른 유의 바울읽기와 다른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잣대는 ‘(루터와 같은) 전통적 읽기를 계승하고 있는가?’가 아닌, ‘텍스트에 충실한가?’여야 한다. 물론 여기서의 텍스트는 바울서신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컨텍스트인 오늘의 현실이다.
이신칭의를 넘어선, 삼중신학.
실제 루터는 당대의 부패한 가톨릭 교계라는 ‘컨텍스트’에 비춰서 바울서신이란 ‘텍스트’를 읽었다. 가톨릭 교계 안에서, 그리고 그 종교체계 안에서만 가능했던 ‘구원’. 하지만 루터가 바울서신이라는 ‘텍스트’를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교계와 종교체계를 넘어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신칭의’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바울서신의 핵심은 이신칭의임에 틀림없는가?’ 조금 비틀자면 이런 유의 질문과 동일하다. ‘이신칭의는 (초역사적으로) 바울서신의 핵심이어야만 하는가?’
김영석에 따르자면 루터 혹은 존스토트에 의해서 주장된 ‘이신칭의’는 바울서신을 해석하는 ‘법정적 구원의 관점’에 불과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관점들이 있으나 김영석은 그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평가한 이후 ‘삼중신학’을 바울사상의 핵심으로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믿음(혹은 그리스도를 믿음)’,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세 가지 단어가 바울사상의 중추적 뼈대를 형성한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그는 이 세 가지 단어가 전통적 독법과 다르게 읽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며, 그렇게 읽을 때에 바울서신의 난삽함이 조화롭게 정돈된다고 말한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김영석이 주장하는 바울신학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의’는 (기존의 방식처럼) ‘진노와 심판을 피하게 되는’ ‘인과응보식 정의’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세상의 약자’를 택하시고, ‘사랑과 정의를’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로마의 정의에 도전하는’ 하나님 그 분의 통치방식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믿음’은 (기존의 방식처럼) ‘죄인들을 위해 희생 제사를 드린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를 짊어지게 만든 그의 삶을 바탕’으로 해석해야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단순한 교회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체현한 삶의 방식이며 더 나아가서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교훈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겸손해지는’ 모습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에는 이 세 가지의 사상이 단계적으로 나타나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의, 그리고 그 의에 순종한 예수의 믿음, 더 나아가서는 그 자체를 본받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 등장한다는 것이 바로 김영석이 주장하는 요지이다.
개인구원의 읽기를 넘어선 바울읽기.
실제 오늘날 교회는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은’ 의를 오히려 자랑하고 있다. 더군다나 더 나아가서 (로마서 1장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의 추악한 의의 행실을 하나님을 핑계로, 도그마를 핑계로 정당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단순한 원죄의 결과인가? 그렇지 않다. ‘읽기’가 실패한 결과요, ‘신학’이 실패한 결과다. 바울신학과 더 나아가서 성경이 담아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준엄한 윤리적 명령을 읽지 못한 결과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영석의 『바울의 삼중신학』은 이러한 준엄한 윤리적 명령을 바울서신으로부터 고스란히 읽어내고 있다. 더군다나 기존의 ‘이신칭의’를 읽어낸 모판이요, 더 나아가서는 ‘값싼 은혜’를 읽어낸 모판이라 할 수 있는 ‘바울서신’으로부터 삼중신학을 읽어내고 정리했기에 가치는 더욱 귀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포괄하는 의로운 통치와, 그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따라 본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윤리적 권고가 바울신학 속에 있다면 우리가 예전처럼 그렇게 비윤리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이신칭의’라는 도그마 속에, ‘원죄’라는 도그마 속에 숨어있을 수 있을까?
실제 김영석은 비윤리적인 교회의 현실에 대한 대안적인 읽기로써 바울을 전유하고 있다. 그가 볼 때에 구약성서에서의 하나님의 진노가 도드라진 ‘완악함’은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완악함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 ‘완악한 마음 위에 뿌리내린 잘못된 삶의 방식’ 그 자체이다. 고로 그에게 있어서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원은 단순한 희생제의의 대체라던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희생제의를 넘어선,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본받아 살아가는 (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자기중심성’을 극복한 새 인류라고 볼 수 있다.
삼중신학을 읽고, 또 넘어서기 위하여.
실제 본인은 김영석의 책을 읽으면서 바울읽기가 새롭게 교정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동안 엉성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바울의 일갈들이 아주 말끔하게 정리되는 기쁨이 있었다. 그의 조언을 따라 바울을 읽으면 바울은 유대적 가치관을 고스란히 승계한 자이며,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마주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방향성을 설파한 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읽기에도 종종 약점이 보인다. 먼저는 첫 번째 챕터에서 나온 해석사에서의 약점이다. 짧은 책이라 한계가 있지만 그의 해석사는 너무 거칠게 분류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새관점 혹은 묵시문학적 관점, 더 나아가 정치사회적 읽기의 관점은 그에 의해서 너무 거칠게 손질되었다. 다음은 장르의 모호함이다. 그의 책을 읽고 있자면 의외로 논거가 꼼꼼하지 못하다는 느낌 혹은 의외로 전문적으로 나아가려고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논거를 충실히 갖춰서 꼼꼼한 학문적 책으로 집필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론적으로 연구범위를 좁혀서 깔끔하게 정리한 책으로 집필된 것도 아니다. 바울서신에 익숙하지 못한 독자들은 길을 잃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해석부분이다. 실제 기존의 읽기방식은 윤리적 명령에 대한 ‘개인적 적용’에 치우쳐있었다. 하지만 바울서신의 주요한 관점은 공동체의 윤리적 집행의 문제이며, 윤리적 문화의 문제였다. 개인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삶을 질서로써, 문화로써 드러내느냐의 문제였다. 그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읽기가 너무 개인적으로 치우치지는 않았는가 살짝 아쉬운 지점이 있다.
정리하면서.
그럼에도 그의 책은 바울서신을 진지하게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통찰들을 던져준다. 더군다나 톰 라이트라던가, 제임스 던, 혹은 전통적인 F.F.브루스와 같은 학자들의 바울개론을 읽어왔던 사람이라면, 또한 바울서신을 충실히 공부해온 사람들이라면 참 많은 것을 건져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모든 것에 무지하더라도 충분히 건질만한 지점이 있다. 바로 책 제목처럼 ‘바울의 삼중신학’에 관한 내용이다. 값싼 은혜를 촉발할 수 있는 기존의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한 바울이해를 넘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그리고 이를 본받아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저자의 진술만 얻어가도 충분히 유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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