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책은 신대원 수업 과제로 제출한 내용입니다.
0.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읽으면서 서로 다른 온도차를 발견한다. 성경 속에는 분명 발칙한 주장이 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면 온건한 주장이 있다. 이를테면 노예제도를 예시로 들어보자. 노예제도에서의 해방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라는 '발칙한 주장'이 성경에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노예의 마땅한 윤리를 언급하고 있는 (그래서 노예제도가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은연히 옹호하는) '온건한 주장'이 성경에 있다. 우리는 이 온건함과, 발칙함을 동시에 읽는다. 더군다나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 안에서 함께 읽는다.
크로산은 이와 같은 온건함과 발칙함의 공존 속에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서로 다른 주장의 공존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지만, 성경 속의 '발칙함'을 따르고 싶어 하는 크로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온건함'으로 자신의 불의함을 위장했던 보수적 그리스도인을 목격했던 크로산은, 바로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온건함과 발칙함이 공존하는 성경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온건함'을 통해 자신의 불의함을 위장하는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발칙함'을 따르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인가?
크로산은 이런 고민 속에서 단순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도식을 제시한다. 바로 '하나님의 급진성'이라는 발칙함을 포괄하는 그룹과, '문명의 정상성'이라는 온건함을 포괄하는 그룹이 하나의 리듬처럼 오르락 내리락 거린다는 도식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도식이 성경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 또한 이러한 흐름 안에서 서로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아니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성경을 읽으려면, 이러한 흐름을 잘 파악하고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가 제시하는 도식은 성경 전체에 맞아떨어질 것인가? 또한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정말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그의 읽기방법을 따라야 할 것인가? 그가 어떻게 성경을 읽어나가는지 살펴보자.
1. 성경의 결말.
크로산은 현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첫 챕터에서 그의 간략한 일생을 기록하면서, 그가 가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출구를 제시한다. 바로 ‘역사(13)’. 실제 ‘역사’는 기독교신학사 속에서, 옛 것을 되살리고, 기존의 화석으로 굳어진 것을 파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가 제시하는 ‘역사’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가 제시하는 일화를 살펴보자.
‘예수의 모체를 이렇게 로마제국의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설정하고, 로마제국의 점령과 유대인 대사제들이 로마 제국에 협력한 것 모두에 대하여 예수가 비폭력적으로 저항한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는 흔히 예수에 대한 나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강력한 반대, 또는 예의를 갖춘 반대가 있었다(16)’
이처럼 그는 동일한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읽어낸 비폭력적인 하나님/예수에 대한 이미지와, 그에 반대하는 청중들이 읽어낸 폭력적인 하나님/예수에 대한 이미지가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실제 이런 하나님/예수에 대한 이미지는 인간의 악에 의해 오용될 여지를 남긴다. 이를테면 (그의 인용을 따르자면) 『남은 자들』시리즈에서는 예수의 ‘칼을 쓰는 모든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마 26:25)’는 말씀을 정당한 살인으로 연결 짓는다. 『나니아 연대기』 또한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폭력적 행위에 인간이 참여할 것이라는 플롯으로 사실로 결론 맺는다.
크로산이 보기에 예수의 메시지는 (역사적으로) ‘비폭력적인 하나님의 비폭력적인 나라(27)’이다. 하지만 분명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폭력(28)’과 ‘하나님의 비폭력(28)’이 동일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크로산은 도대체 무엇이 성경의 본질적인 메시지인가에 대한 탐구로 본 책을 시작한다. 크로산은 이와 같은 논의 속에서 하나의 질문을 도출한다. ‘성경의 핵심 사상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서 ‘하나님/예수는 폭력적인가? 혹은 비폭력적인가?’, ‘그가 실현시킬 정의는 폭력에 기초한 보복(retribution)’인가? 혹은 비폭력에 기초한 분배(distributive)인가?’ 더 나아가서, ‘도대체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우리가 핵심 사상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2. 성경의 중심.
성경의 주된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이 질문은 크로산에게 중요하다. 계시록의 결말이 (크로산의 해석에 따르면) 바로 폭력적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인용한다.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는 전체여야 하며, 전체는 시작, 중간, 결말이 있는 이야기(36)’이라는 주장에 힘입어 그는 연구를 지속해나간다. 성경의 결말이 제시하는 폭력적 하나님이 아닌, 성경이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비폭력적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그는 특별히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 ‘희년’에 대한 서로 상반된 견해를 발견한다. 희년이라는 급진적 이상에 대한 레위기의 서술과, 인간 문화 사회 속에서 작용되는 강제적인 방식이 성경이라는 한 책 안에서 고스란히 서술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두고 크로산은 ‘하나님의 급진성’과 ‘문명의 정상성’이 한 권의 책인 성경 안에서 대결하고 있다는 도식을 제안한다(40). 물론 이는 빌레몬과 골로새서에서 발견되는 노예 제도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에 있어서도 동일하다(41).
크로산이 제시하는 도식에 따르면 성경은 마치 ‘심장박동’처럼 하나님의 급진성을 제시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문명의 정상성을 옹호한다. 하나님의 비폭력적인 분배정의가 급진성으로 제시된 이후에는, 다시 하나님의 폭력적인 보복적 정의가 문명의 정상성으로 기존의 급진적 개념을 전복시킨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의 급진성을 계시했다면, (크로산에 따르면) 복음서에 기록된 묵시적 예수가 다시 문명의 정상성으로 돌아오게끔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명의 정상성과, 하나님의 급진성 속에서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무엇이 성경의 핵심적 메시지인가?
크로산은 그리스도교 성경의 규범과 기준을 성경의 그리스도라고 상정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구 부르지 성경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55).’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는 기준이 성경의 그리스도라면, 더 나아가 성경의 그리스도는 마땅히 (크로산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크로산은 문명의 정상성과 하나님의 급진성의 심장박동이 흐르고 있는 성경 속에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더 나아가 (그가 재구성한) 역사적 예수를 토대로 성경을 다시 읽을 것을 권한다.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길이라며.
3. 양심.
하나님의 폭력적인 보복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본문은 바로 ‘선악과 이야기’다. 특별히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를 ‘원죄’에 대한 본문으로 해석해왔다. 크로산은 선악과 이야기가 가진 본의를 살리기 위해 고대 근동의 설화인 길갈메쉬 이야기로 우회한다. 길갈메쉬 이야기는, ‘신의 세계로부터 아래를 향해 창조된 인간(70)’인 길갈메쉬와, ‘동물의 세계로부터 위를 향해 창조된 인간(70)’인 엔키두가 짝을 이루는 이야기다. 그 중에서 2막에서 엔키두가 죽게 되고 길갈메쉬는 (엔키두처럼 될 수 없다며 )영생을 찾아 나선다. 그 결론은 간명하다. 그가 겨우 획득한 영생의 식물은 뱀 한 마리에 의해 강탈당한다. 이 이야기의 교훈 또한 간명하다. 바로 인간은 불멸할 수 없고, 곧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춰서 읽는다면 선악과 이야기도 흡사하다. 아담과 하와가 (엔키두와 길갈메쉬처럼) 짝을 이룬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도 영생을 주는 생명나무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영생을 차지하지 못한다. 다만 성경의 선악과 이야기는 길갈메쉬 이야기와 같은 종류를 변용하여 ‘선악과나무’를 제시한다. 크로산은 이를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의 나무’이며, 더 나아가 양심의 나무라는 점에 주목한다(81). 더 나아가 영생을 강탈당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단순한 하나님의 보복적 처벌로 보지 않고, (길갈메쉬처럼) 영생하지 못하는 존재인 인간에 대한 설명으로 본다. 더 나아가 그들이 처한 현실은 죄에 대한 형벌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선택에 따른 귀결이란 사실에 또한 주목한다(82).
이처럼 크로산은 고대근동과의 비교읽기를 통하여 기존의 하나님의 보복적 처벌로 이해되었던 선악과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복적 처벌’이 아닌, ‘인간의 선택에 따른 귀결’이란 새로운 구도를 제시한다. 그에 따라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은 처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단지 인간의 선택에 따른 귀결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다.
4. 폭력.
크로산은 이어서 폭력에 대한 다음 본문인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수메르의 신화인 두무지드와 엔킴두의 이야기와 흡사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역시나 신이 (문명에서 뒤떨어진) 농부 카인보다는 (신석기 문명에 서있는) 목자의 목축된 양을 기뻐 받으신다. (물론 크로산은 장자중심 사회에서 차자를 택하는 하나님의 도전적 메시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더 나아가 당대의 신석기 시대로부터 떠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른바 인간 행위로 인한 귀결(93)로, 문명진화상의 후퇴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는 카인 앞에 하나님은 (단수인) ‘죄’로부터 떠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본문은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다(you will)'로 읽지 않고 ’너는 죄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you can)'으로 읽어야 함을 명시한다(92-3).
이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인가? 바로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문명 안에 침투한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성경은 더 나아가 목자를 살해한 농부가 첫 번째 도시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폭력은 문명에 깃들어 성장한다. 그리고 성경 본문은 카인을 해한 보복이 일곱 배라면, 이후에 라멕을 해한 보복이 일흔일곱 배라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폭력의 기하급수적 증가(97)’를 암시한다. 이처럼 폭력은 문명 속에서 성장했고, 문명은 폭력을 증대시켰다. 이것이 바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남긴 메시지다. 더 나아가 이런 폭력적 문명은 결국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폭력적 심판으로 귀결된다.
크로산에 따르면 창세기 6장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신의 폭력을 언급하는데, 이는 문명으로 확대된 폭력에 기반을 둔 신의 폭력이며, 신이 인간의 폭력에 휘말려(102)든 결과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신의 폭력으로 이야기를 끝맺지 아니하고 제사와 계약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크로산은 재미있게도 이 장면을 두고 ‘홍수라는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획대는 없지만 최소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103).’고 언급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크로산은 정리하면서 창세기 2-3장은 보복적 정의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인간의 귀결에 대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창세기 6-9장에 보복적 처벌이 나온다는 사실 또한 언급한다. 여기에서 크로산은 보복적 처벌(홍수 심판) 끝자락에 언급된 ‘계약’이란 단어를 붙잡는다.
5. 창조와 계약.
홍수 심판의 끝자락에 언급된 ‘계약’이라는 단서를 붙잡고 크로산은 다시 1장으로 돌아간다. 1장의 하나님의 창조는 형상, 지배, 안식일이라는 키워드를 지닌다. 먼저 ‘형상’이 전달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분배정의의 하나님(112)’이라는 사실이다. 안식일 또한 그 의미를 지닌다. 안식일의 방향은 바로 매주, 모두에게 똑같은 휴식을 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휴식이야말로 예배, 그 자체이다.) 또한 이런 키워드는 서로 종합되어 ‘노예 해방’으로, ‘빚 탕감’으로, ‘휴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의 정점(Climax)는 바로 ‘희년(115)’이다. 그리고 희년과 결부된 속죄일은, 희년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문명 안에 잠든) 죄와 결부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는 창세기 9장에서 기록된 재창조와 결부되어있다. 다만 (노아홍수 이후의 메시지인) 창세기 9장의 창조는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누구든 제 피도 다른 사람에 의해 흘리게 되리라(창 9:6)’는 인간적 귀결을 내포한다. 또한 덧붙여서 ‘일곱 차례나 북소리처럼 반복되(120)’며 계약을 이야기한다. 창세기 9장의 계약은 고대 히타이트의 종주와 봉신 사이의 계약의 모티프를 고스란히 따왔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아직은) 미래의 처벌에 대한 공포에 의한 상벌규정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크로산에 의하면 단지 창세기 9장의 계약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상벌규정이 없는 계약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벌규정은 이후에 신명기적 관점에 고스란히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크로산은 신명기적 관점이 서술된 본문으로 옮겨서 논의를 지속하겠다고 말한다. 왜 무조건적인 계약이 (히타이트의 계약처럼) 조건적인 계약으로 변용되었는지, 왜 상벌규정이 없는 약속이 상벌규정이 가득한 신명기적 계약으로 변용되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6. 축복과 저주.
신명기 전승은 기존의 제사 전승과는 다르다. 상벌규정이 지배할뿐더러, 저주가 축복보다 더 많다. 분배정의의 하나님보다는 보복적 처벌의 하나님이 우세하다. 무슨 이유일까? 크로산은 기원전 700-600년대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아시리아 방식의 계약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당대의 아시리아 방식의 계약에서 영향을 받은 성경의 신명기적 전승은 현재로부터 미래로, 또한 현재로부터 과거로 계약의 무게 추를 이동시킨다. 신명기적 전승은 이에 따라서 현재의 복됨을 과거의 순종으로, 현재의 화됨을 과거의 불순종으로 해석한다. 물론 역사는 신명기적 관점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신명기적 관점의 역사를 전승시킨 역대기적 관점의 역사가의 역사 기술을 근거로 알 수 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비교하면 므낫세든, 요시아든, 역대기가 열왕기의 역사를 수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명기적 사관의 원칙을 지켜내기 위해서 역사 자체를 수정했다. 크로산의 진단에 따르자면 ‘역사를 새로 쓰지 않았다면, 신명기적 전승의 상벌규정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140)’역사를, 그들은 갖고 있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알 수 있는 사실은 신명기적 신학 자체가,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해석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욥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욥기는 처음과 마지막에서 신명기적 해석을 부정한다. 물론 안타깝게도 욥기가 신명기적 해석의 틀을 완전히 뒤엎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신명기적 전승과 제사 전승을 토대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학적 틀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거에 대해서는 역사를 기반으로 무조건적인 계약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무조건적 계약의 틀이 있고, 미래에 대해서는 상벌규정을 기반으로 조건적인 계약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신명기적 전승의 틀이 있다. 이런 신학의 분열을 크로산은 ‘계약상의 분열(142)’이라 규정한다. 여기서 전자를 택하게 된다면 우리는 은혜로운 분배 정의의 하나님, 비폭력적인 하나님을 만난다. 또한 여기서 후자를 택하게 된다면 우리는 폭력적으로 처벌하시는 하나님,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을 만난다. 크로산은 이 기로에서 폭력적 하나님을 암시하는 예언자적 전승으로 넘어간다.
7. 예언과 기도.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총 세 가지의 자의식에 기반을 둔다. 먼저는 하나님과 맺은 계약이며, 다음은 하나님의 어전회의이고, 마지막은 그 소송을 지켜보는 신적인 고소인이다. 그들은 분배 정의를 추구하시는 비폭력적 하나님과 맺은 계약, 그리고 그 분께서 주도하시는 어전회의와 소송에 기반을 두면서도, 그들 고유의 신학을 황홀경 속에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따라서 크로산의 설명에 따르면 예언자들은 ‘비폭력적 분배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최상의 이해와, 계약의 하나님이 폭력적인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최악의 이해 모두를 결합(149)’시켰다.
이런 예언자들의 예언들을 살펴보면 이들의 메시지는 간략하게 정의된다. 먼저는 ‘불의한 상황에서 심각한 위선이 없이는 정의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155)’다는 것과, 두 번째로 착한 일(정의)는 ‘단순히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특히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사회적 취약 계층을 위한 정의(156)’라는 사실을 선포했다. 마지막으로 이런 메시지에 따라서 ‘계약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판결되었을 때(156)’에는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또한 크로산의 해설에 따르면 ‘계약상의 최상의 법을 계약상의 최악의 상벌규정에 기초(157)’하도록 만든 비극이다. 한마디로 분배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촉구의 결론이,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으로 끝맺는다는 지적이다.
크로산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생각이 단순한 인간의 신학적 판단이며, 더 나아가 보복적 하나님의 개입이라기보다는 (앞에서 말했듯) 인간의 선택에 대한 귀결이라고 진단한다. 예언자적 전통은 (앞에서 언급했던) 주장과 전복의 리듬 속에 있다. 따라서 그 안에는 분배정의의 하나님이 약속한 천국에 대한 촉구 메시지와, 그를 거부할 시에 따라오는 지옥을 내리시는 보복적 정의의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가 결부되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패턴을 더 자세히 분석하기 위해 지혜 전통으로 연구의 초점을 이동한다.
8. 지혜와 하나님 나라.
지혜 전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위한 신적인 수단이 지혜(170)’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마치 철학자와 같은데, 단지 요구되는 것은 지혜를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171)’ 외엔 없다. 이런 지혜 전통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분배적 정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조금 미묘한 온도 차를 발견한다. 가난한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 과부들, 고아들을 언급하는 지혜전통은 단순히 분배정의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배적 자선을 이야기 한다. 더 나아가 예언자 전통처럼 보복적 정의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기보다, 오히려 (크로산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 행동의 귀결을 암시한다. 우리가 (분배적 정의의)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거절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귀결로의) 심판 그 자체이다.
지혜 전통의 대표로 살펴볼 다니엘은 1-6장과 7-12장 사이의 온도차가 존재한다. 1-6장에서 다니엘은 친제국적이며, 신명기적 사관으로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그 초점은 무조건적 현세다. 반면 7-12장은 반제국적인 입장이며, 신명기적 상벌규정이 현세가 아닌 내세로 규정된다. 이런 온도차는 (크로산에 따르면) ‘이야기들 속의 신학이 부적절하며, 그런 환상들 속의 신학이 대두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움직임 자체다. 실제 다니엘은 모든 제국의 종말로 하나님 나라를 제시한다. 평화로운 사회, 비폭력적 분배 정의가 구현된 세상, 공정하고 적절한 몫을 받는 세상으로의 하나님 나라는 분명 지혜 전통에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다.
지혜 전통에는 문명의 정상성과 하나님의 급진성이 고스란히 공존하고 있다. 먼저는 분배 정의에 대한 급진적 요구를 분배적 자선으로 완화시킨 문명의 정상화가 숨 쉬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단순한 (예언자 전통의) 보복적 정의를 교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살아 숨 쉰다. 크로산은 여기에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성경 읽기 방식’을 제언한다. 바로 문명의 정상화로 누그러진, 전복된 주장에 대해서는 저항하며 읽을 것과, 또한 급진적 주장을 고스란히 담지하고 있는 본문을 귀 기울여 읽을 것을 말이다.
9. 이스라엘과 로마의 도전.
이스라엘의 영토에 로마가 지배했을 당시 처음 200년 동안 네 차례의 무장폭동이 일어났다(197). 그런데 그 네 차례의 무장폭동들 중에서 첫 두 폭동, 이른바 기원전 4년의 폭동과 기원후 66년-74년의 폭동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는 사실(198)이 주목할 만하다. 그 당시에는 헤롯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온 유대 땅을 로마화시켰다(206). 뿐만 아니라 헤롯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인 안티파스는 세금을 늘릴 목적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갈릴리 호수를 상업화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저항을 무마시키고자 하스모니아 가문의 신부와 다시 결혼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비판이 시작된다.
세례 요한과 예수의 비판은 당대의 시대적 정황을 고스란히 흡수한다. 그들이 전파한 종말론적 비전, 이른바 메시아적 비전은 ‘하나님의 평화(Pax Divina)'를 주창했다(213). 그렇게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대결한 그들은 고유의 이론적 자세화, 실천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으며, 나름의 비폭력 저항운동의 기초를 고스란히 흡수하고 있었다.
10. 예수와 하나님의 급진성.
당대의 (헤롯의 아들이었던) 안티파스 왕이 예수에 대해 함부로 처형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크로산은 세례 요한의 대중적 인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이후, 바로 다른 예언자를 처형하기가 무척이나 껄끄러웠을 것이다. 여기서 크로산은 질문을 던진다. 과연 ‘세례자 요한의 비전과 예수의 비전은 서로 연속성이 있었을까?’ 크로산은 서로 달랐다고 주장한다. 예수운동은 세례자 요한의 프로그램을 계승했지만, 매우 다른 프로그램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한다. 먼저 크로산이 볼 적에 요한은 하나님의 세계 대청소를 예언한 묵시종말론자였다. 더 나아가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해방(내지는 하나님의 폭력)을 믿은 사람이었다.
반면 예수의 프로그램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이야기한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개입을 예고하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쌍방적인 협력’을 주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완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비폭력 운동은 하나님의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 근저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사상은 분배정의의 하나님 사상을 드러내준다. 이와 같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은 결국 로마제국의 폭력적 억압과 또렷이 대비된다.
크로산은 앞서 세례자 요한은 분석하면서 세례자 요한이 Q복음에 의해 ‘전복’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해방을 꿈꾸던 예언자가, 하나님의 폭력을 꿈꾸던 예언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본 챕터에서 다룬) 비폭력적 하나님 나라를 주창한 예수가 폭력적인 예수로 (성경 속에서) ‘전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논증은 다음 챕터에서 다룰 것이다.) 그리고는 폭력적인 예수의 전승과 비폭력적 예수의 전승 사이에서, ‘역사적 예수’를 기준으로 선택해야만 할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해나간다.
11. 그리스도와 문명의 정상성.
이어서 다루는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라는 하나님의 급진성이, 문명의 정상성으로 전락한 내용이다. 먼저 크로산은 ‘독사의 자식들아(8:44)’라는 예시를 제시한다. 과연 이 언어폭력은 예수의 발언인가? 혹은 후대 편집자의 삽입인가? 그리고 크로산은 세 가지 사례를 거치면서 후대 편집자들이 예수를 폭력적으로 변개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문명의 정상성’ 속으로 예수를 우겨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계시록에서 정점에 이른다. 도살당한 어린양은, 도살하는 어린양으로 바뀐다. 그리고 예수의 비폭력적 저항은 결국 행악자들에 대한 폭력적 살육으로 바뀐다. (크로산에 따르면) 계시록의 예수는, 하나님의 급진성을 고스란히 담은 비폭력적 분배적 정의의 하나님이 아닌, 행악자로 전락한다.
크로산은 여기서 로마적인 것들을 제시한다. 먼저 666을 상징하는 사람이 바로 네로이며, 단순한 네로가 아니라, (죽은 후 부활할 것으로 상정되는) 네로라고 말한다. 네로는 죽은 후에 동방에서 신격화(252)되어 파르티아 군대 사령관으로, 로마에 다시 침략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252). 이런 모티프를 고스란히 따온 계시록은 예수 또한 로마적인 것으로 덧칠해버렸다. 돌아올 네로를 패러디한 다시 오실 예수의 묘사를 두고 크로산은 이렇게 평가한다.
‘매우 끔찍하고 또 끔찍하며 또 끔찍한 역설적 방식으로 요한계시록은 돌아오는 네로 황제와 그의 파르티아 군사력을, 돌아오는 그리스도와 그의 천군천사로 대체시켰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최악의 명예훼손이며, 예수에 대한 최악의 중상모략이다. 이것은 또 성령에 대한 최악의 죄이기도 하다(254).’
이처럼 크로산은 앞에서 주장한 하나님의 급진성과, 문명의 정상성의 ‘리듬’이 예수의 이야기에도 있음을 주장한다. 크로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리듬이 바울서신 전반에도 미치고 있음을 밝혀내고자 한다.
12. 로마와 카이사르의 도전.
크로산은 이제 눈을 돌려서 바울서신에 사용된 모티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밝혀낸다. 그가 주목하는 대상은 바로 아우구스투스(264)다. 아우구스투스는 (혹은 그의 사람들은) 출입구 대들보에 자신의 명칭을 새겨놓았다. ‘황제, 신의 아들, 신(264)’ 아우구스투스는 족보에 의해서, 잉태와 양자됨에 의해서 ‘신적 존재’로 표명되었다. 또한 그에게 명명된 아우구스투스란 이름은 ‘예배할 분(265)’을 상징한다. 이러한 아우구스투스는 신격화됨과 동시에 ‘실제적인 관점에서 만물이 시작되는 날(269)’을 개시할 어떤 인물로 상정되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크로산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에게 돌려진 칭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수는 (바울서신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놀라운 패러디 그 자체이다. 물론 이를 살짝 개조한다. 이를테면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복음들’이라고 말했건만,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바울에게 ‘복음’ 그 자체이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가져올 황금시대는 ‘농업의 신 새턴이 통치하는 것(271)’이었지만, 예수가 가져올 새로운 시대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271)’였다. 물론 서로의 비전과 내용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따왔다.
크로산은 바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전착한다. 그리고 바울이 예수의 비전을 유대인들에게도, 로마에게도 ‘도전적인(278)’ 것으로 선포했다는 사실을 고수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의 독특한 이야기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옷을 입음으로, ‘문명의 정상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급진성’을 ‘문명의 정상성’으로 우겨넣었다. 물론 이는 성경 전체를 감싸는 하나의 심장박동과 같은 리듬이기도 하다.
13. 바울과 그리스도의 급진성.
크로산은 바울을 해석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먼저 바울이 주로 쓰는 ‘세례’란 어떤 의미였을까? 크로산이 보기에는 세례는 무엇보다도 ‘제국(특히 로마)에 대해 죽는 것(283)’이다. 따라서 바울이 제시한 비전은 남녀평등, 독신권유, 노예제도 폐지, 위계질서 폐지와 같은 아주 신선한 ‘하나님의 급진성’ 그 자체이다. 잠시 그의 디테일한 주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결혼이란 문명의 정상성이 꼭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치며, 노예를 해방하는 것은 단순한 권고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따라야 할 기준 그 자체이다. 또한 더 나아가 로마서 13장은 단순한 제국의 권력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제국의 권력에 폭력적으로 맞서는 것을 제지시키는 수사적 표현이다.
이처럼 크로산은 바울이 가진 비전 자체가 하나님의 급진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급진성의 토대가, 바로 ‘폭력적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비폭력에 근거해서, 인간의 비폭력을 가르쳤다면 바울은 다르다. 바울은 이를 살짝 전복시켜서 하나님의 폭력에 근거하여 인간의 비폭력을 가르친다. 예는 다음과 같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로마서 12:19-20)’
크로산은 지속적으로 성경 내에 반복되는 리듬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바울은 그래도 ‘하나님의 급진성’을 옹호한 사람인 동시에, 그나마 로마세계가 제공한 ‘문명의 정상성’에 의해 살짝 전복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크로산의 관심은 바울 자체에게 있지 않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를 아예 문명의 정상성 속으로 밀어붙인 후기 바울서신에 있다.
14. 바울과 제국의 정상성.
이어서 크로산은 (예수를 살짝 전복시킨) 바울을, 다시 전복시킨 후기바울서신과, 목회서신 연구에 들어간다. 일단 노예제도에 대한 바울계 서신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앞에서처럼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은 빌레몬서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지침’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9절은 노예와 주인으로 갈라져있다는 제도적 현실을 고스란히 인정한다. 더군다나 예상 외로 노예들에게 지침을 많이 준다. 그런데 디도서 2장 9절-10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노예들에 대한 꾸짖는 어조가 보인다. 더군다나 에베소서에서 보였던 주인들에 대한 권고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의 전복은 노예제도 뿐만 아니다. 여성차별문제, 독신의 문제, 여성 리더쉽의 문제에서도 이어진다. 바울의 입장을 후기바울서신이 전복시키며, 목회서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문명의 정상성 속으로 집어넣어 버린다.
이와 같은 논쟁을 살피는 것은 본문을 해석함에도 유용하다. 이를테면 고린도전서 7장 21절에는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생기면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십시오.’라는 구절이 있다. NRSV는 이 구절을 ‘(노예인) 현재 상태를 잘 이용하십시오.’라고 해석한다. 반면 '(자유의 몸을 얻어) 그리스도를 위해 자유를 이용하십시오.‘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바로 바울이 하나님의 급진성을 옹호했다는 해석적 입장에서만,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바울의 언설은 하나님의 급진성을 대부분 담아내고 있었다. (크로산에 의하면 예수의 비폭력적 하나님을 전복시키긴 했지만.) 하지만 그 바울의 언설은 친바울서신에서 문명의 정상성 속으로 나아간다. 한걸음 더 나아가 목회서신에서는 완전 문명의 정상성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일치된다. 이는 로마의 도덕주의자들도 별 무리없이 찬성할만한 가르침이다. 이처럼 바울의 간명하고도 날 서있었던 실천적 지향점은, 문명의 정상성 아래에 완화된다. 이 또한 크로산이 말한 리듬, 하나님의 급진성이 문명의 정상성 안에 갇히는 그 리듬에 속한 것이다.
15. 크로산이 말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가?
크로산은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 먼저는 분배정의와 보복적 정의로 좌우를 구분한다. 그리고 상하는 폭력적 설득력과 비폭력적 설득력으로 구분한다. 성경은 과연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크로산에 따르면 하나님의 급진성은 ‘비폭력적 설득력’을 가지고 ‘분배정의’를 설파하는 입장이다. 반면 문명의 정상성은 ‘폭력적 설득력’을 가지고 ‘보복적 정의’를 옹호하는 입장이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크로산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 될까?’
크로산의 대답은 다시 한 번 간명하게 울려 퍼진다. ‘참 그리스도인의 규범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의 그리스도이며, 성경의 그리스도의 규범은 역사적 그리스도다(330).’ 크로산이 말하고 있는 바는 간단하다. 성경 내에 다양한 주장들이 일종의 리듬이란 패턴을 두고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을 읽어가면서 그 충돌지점 속에서, 어떤 한 입장을 선택하도록 요구받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상반된 입장 속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적 입장에 서야만 하는지를 논증하고 있다. 크로산이 연구한 역사적 예수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는 문명의 정상성이 아닌, 하나님의 급진성에 서 있었다. 그는 폭력적 하나님이 아닌, 비폭력적 하나님을 섬겼다. 또한 보복적 정의가 아닌, 분배적 정의를 꿈꿨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문명의 정상성은 이런 급진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문명’이라는 굴레로 억압하고, 억눌러, 재형성한 결과다. 가인이 건설한 문명이, 문명 그 자체에서 죄를 함유하고 있었듯이, 문명의 정상성이란 코드는 하나님의 급진적인 계시를 집어삼켜서, 우리가 따를만한 규범으로 변형시킨다. 크로산의 제언에 따르면 이런 문명의 폭력성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급진적 계시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16. 나가면서.
일단 크로산의 전제에는 거의 동의를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바울서신을 후기바울서신이 훼손하고, 목회서신이 훼손했다는 그의 전제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복음주의적 주장에 위배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는 마치 (과도한) 이데올로기적 읽기로 흐를 위험이 존재한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예수, 혹은 가르침을 중심으로 성경을 재배열하고 읽을 위험 말이다. 분명 우리가 성경은 우리에게 어떠한 설득 의도를 갖고 있고, 성경 각 권의 논증을 통해, 그리고 배열을 통해, 그리고 다양한 권 안에서 들리우는 메아리들을 통해, 우리를 (어떤 의도를 갖고) 설득하고 있다. 이 사실만큼은 성경만이 아니라, 모든 텍스트를 진지하게 읽는 독자에게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산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이란 텍스트 안에서는 서로 상충되는 주장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반대하고, 대결한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 떨어져서 읽는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주장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크로산이 말한) 하나님의 급진성에 가까운 주장보다는, (크로산이 말한) 문명의 정상성에 가까운 주장으로 타협하곤 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크로산의 대담한 주장과, 그의 발칙한 읽기는 분명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급진성과 정상성의 반복되는 리듬’을 거대 성경 네러티브 속에서 발견하고, 그 리듬 안에서 하나님의 급진성을 선택해 읽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자격이라는 그의 선동(?) 또한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그의 진정성은 탁월하다. 또한 그의 치밀한 연구와, 그에 따른 도식은 매우 말끔하다. 꽤나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텍스트를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이는 또 다른 방식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문명의 정상화라는 기치 아래 예수의 말씀을,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다듬었을까? 어떤 면에서 크로산의 연구는 분명한 만큼, 나이브한 지점이 있다. 또한 그의 ‘부정의 해석학’이 지나치게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 분명 크로산이 던진 질문은 우리에게 유효하다. ‘성경 안에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너희는 어떻게 읽을 것이냐?’ 또한 그 질문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갈림길이 있다. 크로산의 길을 선택하든지, 또 다른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 본문을 읽을 것인가? 또한 크로산의 말처럼, 그렇게 읽음을 통해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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