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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톰 라이트 #2 : 톰 라이트는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는가?

by 홍도사 2020. 2. 15.

*본 글은 2016년 5월 박영돈 교수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 출간 당시에 작성된 글입니다.

들어가는 말 : 가블러를 기억하며.

‘성경신학’이란 단어를 다룰 때마다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그리고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요한 필립 가블러다. 일반적으로 성경읽기는 기존의 탄탄한 기독교 정통 교의를 지지해주는 방식이었다. 전문적 용어를 쓰자면 성경의 메시지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방식exegesis가 아닌 정통 교의를 성경의 메시지 안으로 밀어 넣어서 읽는 방식eisegesis였다. 따라서 (전통적으로는) 성경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시대 속에서 요한 필립 가블러란 학자는 아주 충격적일 수 있는 선언을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영원히 변치않는 독자적인 영역이지만, 교의시대에 따라 항시 변하게 마련인 영역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이제 이전의 읽기 방식인 이른바 정통 교의를 성경 속으로 밀어넣어 읽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성경 그 자체의 본의를 통해 기독교 교의를 새롭게 구성할 원천 그 자체로 기능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물론 가블러가 완전히 새로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동방교회를 논외로 한 유럽의 상황만을 두고 봤을 때)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단일 교회체제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것은 결국 루터의 성경읽기였다. 그의 성경읽기가 성경 본문의 본의냐 아니냐는 뒤로 하고서라도, 그의 읽기는 결국 로마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단일 교회체제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개신교가 그의 성경읽기로부터 나왔다. 어찌 보면 성경은 (가블러의 선언 이전에도) 기독교 정통 교의들을 비판하고,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종종 엄청난 파급력을 일으켜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지점은 ‘그래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어떻게 읽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인가? 이 질문을 끌어안고 톰 라이트의 저서를 탐독해보려고 한다. 라이트의 성경읽기 방식은 무엇보다도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에 잘 기록되어 있다. 책의 모든 내용이 성경읽기 방식에 대한 그의 논의를 담고 있긴 하지만 특별히 2장, 3장, 5장까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내용을 충실하게 독해해서 요약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지식을 어떻게 얻는가?

우리 앞에 어떤 대상이 놓여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한 대상을 관찰하면서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이는 결국 성경읽기의 문제다.) 이에 대해 엄밀히 다루지 않고서 그냥 성경을 쭉 읽어간다면 결국 (자신도 모르는) 방법론의 함정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방법론의 함정에 매몰되는 현상이 일반 기독교인들에게는 만연하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거칠게 나눠서) 두 부류의 입장이 있다. 먼저는 순진한 실재론자이며, 다음은 현상론자이다.

 

  • 순진한 실재론자들대상을 마주한다면 그들은 아주 의심 없이 그 대상의 실재를 받아들인다. 자신의 관찰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대상이 관찰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버린다.

  • 반면 현상론자들은 반대다. 그들에게 관찰된 결과는 실재에 대한 그들 고유의 경험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의 관찰된 결과가 곧 외부의 실재라고 단정 짓는 것은 (그들에겐) 억측이다.

라이트가 거칠게 나누긴 했지만 이렇게 두 부류는 모두 지식획득에 실패할 것이 뻔한 구도다. 전자는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실재를 관찰하는 자신의 오감에 무오성을 부여한다. 반면 후자는 실재를 관찰하는 자신의 오감에 의심의 시각을 들이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실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갖게 한다. ‘순진한 실재론자’의 관찰은 대상의 잘못된 지식을 얻게 만들 것이며, ‘현상론자’의 관찰은 결국 대상의 지식에 대한 불가지론만 만들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대상의 실재를 고스란히 두면서도, (관찰자의) 시각을 교정하면서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는 것일까?

 

라이트는 이 지점에서 관찰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포하고 있는 ‘비판적 실재론’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비판적 실재론은 1)인식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지만 실재에 올바르게 접근하는 길은 2)대상과의 충실한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방식이다. 조금 쉽게 말하면 나선형 관찰 방식’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가 말하는 비판적 실재론은 단순히 대상을 관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관찰하는 스스로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점검하면서 대상에 대한 관찰결과를 교정한다. 내가 획득한 관찰결과가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연유로부터 왔는지를 엄밀히 점검하는 작업인 것이다.

 

성경읽기의 난맥을 넘어서

앞에서 라이트는 잘못된 읽기 방식의 예시로 (거칠게 나누기를) 소박한 실재론자현상론자를 언급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을 읽는다면 어떻게 읽을까?

 

  • 먼저 소박한 실재론자의 예시부터 살펴보자. 소박한 실재론자는 성경을 통해서 기록된 사건을 고스란히 신뢰한다. 문자가 있는 그대로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는 거다. (물론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이런 소박한 실재론자의 소박한(?)읽기는 결국 성경의 기록된 의도를 읽는 데에 실패한다. 이를테면 덮어놓고 ‘예수께서는 동정녀에서 나셨어!’,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어!’,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어!’라고 외친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사건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려는 의도를 건너뛴다는 것이 문제다.)

  • 반면 현상론자들의 경우에는 사건에 접근하는 동시에 사건을 모두 저자들의 감상평으로 전락시킨다. 따라서 현상론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경저자들의 신학을 기록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고, 그를 지탱하고 있는 사건은 허구인지 진실인지 검증할 수 없는 영역에 불과하다. 그들은 섣불리 ‘예수께서는 동정녀에서 나셨어!’,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으셨어!’,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어!’라고 외칠 수 없다. 다만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동정녀에서 나셨다고 고백했어!’라고 외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현상론자들에 있어서 성경의 역사성은 관심 외의 분야다. 단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신앙, 신학 그것을 읽어낼 따름이다.

  • 여기서 등장하는 새로운 케이스가 하나 있다. 이른바 경건한 독자들이다. 이들은 성경을 읽음에 있어서 저자에게도 관심이 없고, 사건에게도 관심이 없다. 한마디로 신학에도, 역사에도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흔히 말하는 큐티식 성경읽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오류는 성경과 독자를 직접 연결한다는 미명 아래에서 성경의 기록을 (치밀한 주해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한 이야기’로 그대로 읽어버린다. 물론 이런 유의 읽기가 경건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런 유의 읽기로 성경을 올바로 파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라이트는 (앞에서도 암시했지만)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읽기 방식을 고수하고자 한다. 다만 그의 읽기방식을 해설하기에 앞서서 신비평에 대해서 언급한다.

 

  • 신비평은 일반적으로 (사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저자의 의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저자가 직조해낸 텍스트 자체가 의미를 산출할 뿐이다. 얼핏 경건한 독자들의 읽기와 유사한 지점이 있지만 그래도 신비평은 텍스트 전체의 구성을 엄밀히 분석하는 작업을 선행한다. 이는 결국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텍스트 자체가 갖고 있는 (저자의) 잠재적 의도를 분석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저자의 심층이다. 그리고 저자는 홀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 내지는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이기에, 이를 통해서 특정 공동체 내지는 세계의 심층을 읽어낼 수 있다. 라이트는 이 지점, 텍스트가 갖고 있는 (저자의 의도를 넘어선) 심층을 읽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저자의 의도를 초월하여 있는 다중적 의도를 읽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나 우리가 읽으려고 하는 텍스트는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성경이기에 더더욱 요원하다고 본다.)

이제 라이트가 성경읽기를 통해서 (빠지지 않고) 얻고자 하는 것들이 모두 나왔다. 저자의 의도,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사건, 그리고 (정경의 맥락에서)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숨은 메시지. 그럼 라이트는 이러한 포괄적인 것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읽어내고 있을까? 바로 (앞에서 말했던 방법인) 비판적 실재론을 통해서 읽어낸다.

 

비판적 실재론을 통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성경읽기.

인간의 삶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행동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에는 전제된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관찰자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상호간에 대화를 통해서 확산되고, 또한 (그것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오인하게 만든다면) 교정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도를 갖고서 다시 비판적 실재론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대상을 (아무런 전제 없이)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대상을 관찰한다. 따라서 대상을 관찰한 지식 자체는 틀릴 가능성이 있다. 틀린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전제를 하고 있는 ‘이야기’가 대상을 관찰함에 있어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제로 한 ‘이야기’를 교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지속적인 나선형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대상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적합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석된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고? 바로 성경읽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고 치자.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대상인 성경과, 관찰자인 나 외에는 없다. 하지만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다층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우리가 읽는 성경본문이 터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또한 그 성경본문을 읽고 있는 우리가 터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존재하며,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관찰자인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 그런데 관찰자와 성경 사이에 있는 무수한 이야기가 잘못 되었다면 어찌될까? (흔히 교회에서 일어나는 경우들처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본문을 대박이 날 투자처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관심사를 반영한) 암묵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성경은 오인되기 나름이다. 또한 우리가 읽고자 하는 본문이 구약본문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을 오늘날로 고정시킨 이후 노예제도를 합법화하는 방식으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 성경은 오인되기 나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요원한 것은 관찰자와 대상인 성경 사이를 충실히 읽어주는 바른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이야기와, 성경 본문 자체가 전제하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긴밀한 탐구가 요청된다. 뿐만 아니라 (해석의 암묵적 전제인) 이야기들에 대한 반성과 교정이 요청된다. 이를 통해서 성경 본문이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받아들이기 위한 바른 ‘이야기들’을 얻고, 이를 통해서 성경 본문을 읽자고 하는 것이 바로 라이트가 말하는 성경읽기의 제언이다. (달리 말하면 이런 해석학적 노력이 없이는 본문의 의도가 왜곡되기 싶다는 것이 라이트의 주장이다.)

 

성경에 참여하는 읽기.

라이트에게 있어서 신학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테제들의 나열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들의 격자망인 동시에 우리들에게 ‘실천’을 요구하고, 고유한 인간 삶의 맥락 속에서 ‘질문’에 답을 제시하며, 이 모든 것들을 ‘상징’을 통해 향유하는 ‘세계관’ 그 자체이다. 신학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선하신 창조주인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공한다. 동시에 그 이야기들과 함께 (기도 혹은 구제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하는 실천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 인간 삶 속에서 제기되는 무수한 질문들에 대한 고유한 신학적 대답을 제공한다. 그리고 다양한 상징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지탱한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이라는 방식으로 신학을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계시라고 생각되어지는) 신학적 테제들을 전달하는 문서가 아닌, 이야기와 실천과 질문과 상징의 복합체인 (계시라고 생각되어지는) 세계관 자체를 전달하는 문서로 읽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라이트는 암묵적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신학적 테제인가? 혹은 복합적 세계관인가?)

 

암묵적인 질문은 뒤로 하고 그가 제시하는 바대로 계시는 곧 세계관이란 방식으로 성경 속에 담긴 기독교 신학을 탐구해보자.

 

  1. 성경은 (성경 고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2. 마찬가지로 (성경 고유의) 해답을 통해서 인간에게 제기되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

  3. 그리고 성경을 읽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다양한 유의 상징들(십자가, 성경책, 교회당 등등)을 통해 고유한 세계관을 지탱하게 만든다.

  4. 마지막으로 성경은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실천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실천에 참여하라고 독촉한다.

이러한 기독교 신학으로의 (성경으로부터 주어지는) 세계관은 우리에게 공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성경의 이야기 속에서 뿌리박고 살아가야 할지를 제언하며, 또 그렇게 살게끔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리고 큰 의미에서 이것이야말로 계시의 진정한 역할이다.)

 

왜 갑자기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라이트의 성경읽기 방식이 단순히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야기’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참여적 읽기’라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로 (실증주의 전통은) 우리는 지식을 획득함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우리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초연한 지식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우리의 참여와는 무관하게 대상 그 자체가 지식을 보유하고 있고, 우리는 발견할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앞에서 라이트가 논증하듯이) 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읽기는 어떤 방식으로 근대의 읽기를 넘어갈 수 있을까?

 

라이트가 앞에서 수없이 말한 것처럼 대상과 관찰자는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서로 얽혀져있다.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대상에 대한) ‘지식은 인간과 피조세계의 상호관계와 결부’되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라이트의 말에 의하면 안다는 것은 (객관적인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앎의 대상과 관계를 맺는 행위다. 고로 성경읽기는 (바른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의 지식들을 단순히 (초연하게) 취하는 것이 아닌, (바른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가는 성경읽기여야 한다. 더 나아가서 바른 성경읽기는 (세계관으로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 계시 안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성경이 제시하는) 세상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성경이 제시하는) 실천에 참예하는 것이며, (성경이 제시하는) 상징들을 통해 (계시로의) 세계관을 튼튼히 지탱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 읽기와 기독교 신학.

라이트는 성경 읽기에 있어서 (세계관으로의) 기독교 신학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 먼저는 기독교 신학이야말로 성경 읽기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신약성경에 기록된 1세기 사건들의 ‘이면’을 바르게 탐구하기 위해서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탐구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바울의 서신을 올바로 독해하기 위해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바울이 전제하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이 지니고 있는 상징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당시의 질문에 대해 무엇이라 답하고 있는가? 바울은 어떤 실천에 대해 참여하고 있는가? 일괄하자면 ‘바울은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지만 바울 서신에 기록된 사건의 ‘이면’에 올바로 접근할 수 있다.

  • 마찬가지로 성경을 분석함에 있어서 본문이 전제하고 있는 문화들, 이를테면 (바울과 대립하고 있는) 질문들, 목표들, 의도들은 결국 신학적인 분석, 이른바 세계관 분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왜 바리새인과 예수가 대립하는가? 왜 바울과 에피쿠로스 학파가 대립하는가? 이러한 성경의 보도에 진실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결국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그리고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해서도 세계관적 분석을 해야만 한다. 또한 정확한 (세계관으로의) 기독교 신학이 전제되어야만 날카로운 대립점을 찾아낼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은 결국 성경 읽기에 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반복되어오고 주장되어온 기독교 신학이 있다. 그리고 그 (기독교 신학이라는) 세계관과 대결을 걸어오는 수많은 기타 세계관들이 있다. 이를테면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범신론자들, 혹은 신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이 지점에서 기독교는 근래동안 전승되어 온 기독교 신학으로 맞서곤 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야만 한다. 도대체 기독교 신학은 어디에 근거하여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기독교 신학이 다른 세계관에 맞서서 그 진리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근거인 성경에 탄탄히 기반을 두어야 한다. 어찌 보면 결국 기독교 신학은 성경의 이야기 그 자체이다. 하지만 기독교 신학이 성경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혹은 성경에의 근거가 부실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기존의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큰 위험이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생활을 공적실천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도 큰 위험이 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는 이런 이들이야말로 큰 위험상황이긴 하지만.) 하지만 공적실천의 장에서 다른 세계관과 맞닥들이는 그 시점에 기독교 신학이 성경에의 근거가 부실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여타 이단들처럼) 교회가 해명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보다 그들의 세계관이 세계에 대하여, 더 나아가 성경에 대하여 정합하게 설명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공적진리가 대결하는 장에서 패배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이 공적진리인 동시에, 많은 세계관들과의 대척점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이 탄탄한 성경읽기에 기반을 두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라이트는 자신이 제언한 ‘비판적 실재론’을 기반으로 한 ‘성경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가는 성경읽기’를 통하여 성경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성에 탄탄한 기반을 두는 동시에, 성경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에 더욱 착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는 (서두에서 언급한) 가블러를 계승하면서 자신의 읽기 방법론으로 더욱 탄탄하고, 전통적이며, 공적진리의 장에서 허술하게 부서지지 않는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읽는데 있어서 바른 이야기 세팅을 위해) 1세기 세계관을, 더 나아가 (지속되어온)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를 탐구하는 것에 책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나가는 말 : 이제 새로운 대화를 기대하며.

마블 시네마틱스에서 개봉한 시빌워를 관람하면서 성경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떠올렸다. 다양한 인물들과 각각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블 시네마틱스는 다양한 영화를 촬영했다. 하지만 그 모든 영화들은 결국 마블의 세계관 아래에서 통일되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66권이자 1권인 성경 또한 마찬가지다. 아주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관심들로 기록된 다양한 책들은 이를 포괄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우리들은 66권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일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백한다.

 

그렇다면 66권의 성경은 어떠한 ‘거대한 이야기’를 전제로 하고 있을까? 더군다나 1세기 이후에 기록된 신약성경들은 어떤 방식으로 (구약성경의) ‘거대한 이야기’를 계승하여 고유의 창작물로 남았을까? 이 지점이 라이트의 주된 관심이며, 사실상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의 내용이기도 하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성경 본문이 가진 내용들을 온전하게 독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론을 선택했다는 점이며, 더 나아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읽기 방식과는 조금 낯선 방식이라는 점이다.

 

라이트의 읽기 방식에 대해서 다양한 비평들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그는 ‘거대한 이야기’를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정경 외의 문서들을 수없이 인용한다. 그렇기에 그를 향해서 ‘정경 외의 문서 없이는 정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가?’라고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1세기 문서를 인용하느냐, 인용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닌, 본문을 제대로 읽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라이트는 성경 본문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 다양한 문서들을 참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라이트가 재구성한 바울신학과, 이를 가능케 한 성경읽기 방법론을 다뤄보았다. (지금까지는 톰 라이트와 대화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박영돈 교수의 비판서인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와 대화하는 길이다.

 

대화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 일반적으로 라이트의 지지자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더 엄밀히 말하면 라이트의 지지자들의 발언들이 오해되는 방식대로) ‘1세기 문헌들을 모르면 신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다’의 방법이 된다면 박영돈 교수에게 분명 불리한 판이 열려질 것이다.

  • 마찬가지로 전통적 칭의론의 지지자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칼빈의 말인) ‘성경은 단순하고 명료하기에 가장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취해야 한다’의 방법이 된다면 라이트에게 불리한 판이 열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취해야할까? 바로 가장 변하지 않는 영원한 성경 본문을 기초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박영돈과 라이트) 모두가 동의하는 성경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그것을 얼마나 (한 권의 성경 안에서) 정합한 논리로 해석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66권의 성경 안에서 일치된 논리로 해석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해보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두 학자의 (서로 다른) 주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성경본문을 나란히 놓고 누가 더 정합한 논리로 해석하고 있는지, 본문을 훼손하고 있지 않은지 무릎을 맞대고 겨루어 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