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과 고대 근동 우주론>은 말 그대로 [창세기 1장]을 [고대 근동 우주론]에 비추어서 해석한 작품입니다. 지금껏 고대 근동 문헌을 통해 히브리 성서를 읽어온 방식은 꽤나 다양했습니다. 한 극단으로는 ‘히브리 성서가 고대 근동 문헌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27)’는 주장도 있었구요. 다른 극단으로는 ‘히브리 성서가 고대 근동의 공통의 유산을 무의식중에 반영한다(28)’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왈튼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문학적 관련성(28)’에 대한 연구에 머물고 있다고 정리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연구는 ‘문학적 관련성’만이 아닌, ‘공통된 인지적 환경’ 아래에서의 연구라며 그의 연구를 시작하려 합니다. 정리하자면 특정 고대 근동 문헌을 히브리 성서를 인용했거나 혹은 히브리 성서가 특정 고대 근동 문헌을 인용했다는 방식으로 연구하지 않고, 고대 근동 문헌과 히브리 성서가 ‘공통된 인지적 환경’을 갖고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연구해보겠다는 것이 바로 왈튼의 기획입니다.
왈튼의 <창세기 1장과 고대 근동 우주론>은 사실상 3장과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앞에서 요약한 방법론에 대한 소개이고요, 2장은 3장의 논의에 필요한 고대 근동 문헌의 특성을 분류한 표와 그에 대한 짤막한 해석입니다. 3장은 [창세기 1장]을 해석하기 이전에 이집트 문헌, 수메르 문헌 아카드 문헌 등등을 다루면서 재구성한 [고대 근동 우주론]에 대한 내용입니다. 왈튼은 3장을 통해 [창세기 1장]을 읽기 위한 사전준비 과정을 거치는데요. 창조의 동적인 측면과 정적인 측면, 고대 근동의 기능 존재론, 신과 인간의 관계, 우주와 신전의 관계 등등을 고대 근동 문헌의 진술로부터 정리합니다. 달리 말하면 [창세기 1장]이 아마도 공유했을 법한 ‘공통된 인지적 환경’인 고대 근동 우주론에 대한 연구가 바로 3장의 내용인 거죠. 4장은 본격적으로 3장의 연구결과의 빛 아래에서 창세기 1장을 해석해나갑니다. 그렇다고 고대 근동 우주론을 창세기 1장 텍스트 안에 무작정 우겨넣는 방식은 아닙니다. 먼저 성서 텍스트 안에서의 의미와 용법을 충분히 고찰합니다. 그 후에도 명료해지지 않는 기저의 세계관을 메소포타미아의 우주론, 이집트의 우주론과 상호비교하며 퍼즐 맞추기를 시도해나가며 창세기 1장의 본의를 밝혀나가는 작업을 해나갑니다.
그렇다면 [고대 근동 우주론]의 연구 아래에서 왈튼이 해석한 [창세기 1장]은 어떤 모습을 띄고 있을까요? 주목하여 볼 것은 먼저 ‘창조하다’가 띄고 있는 ‘기능적 뉘앙스’입니다. 또한 그와 대비되는 ‘공허와 혼돈’이 띄고 있는 ‘중립적이고 아무 기능도 가지지 않는 모호성’입니다. 이어서 주목할 것은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창조기사가 띄고 있는 ‘정적인 창조’의 맥락입니다. 또한 이와 대비되는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기사가 띄고 있는 ‘동적인 창조’의 맥락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우주의 통치자의 위치를 부여받는 인간창조에 대한 해석과, 성전과 우주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를 그려낸 해석입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다루고 싶은 것은 왈튼이 탐구한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석에 대한 영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왈튼이 탐구한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석이 렌즈가 되어 기독교와 성경 전반을 새롭게 보게하는 영역입니다. 달리 말하면 본 책은 기독교와 성경 전반을 바라보는 [창세기 1장]이라는 렌즈의 초점수정에 대한 사용설명서입니다. 본 책의 실질적 파괴력은 초점수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점이 수정된 렌즈로 보게 되는 이전과는 다른 (기독교와 성경 전반에 대한) 세상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타락한 인간은 ‘반-창조적 행위’로 묘사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전의 존재론적 뉘앙스 아래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반-창조적 행위’는 약간 거리감이 있었는데요. 왈튼의 해석을 따라서 기능적 뉘앙스*로 읽는다면 인간의 타락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행위’로 읽을 수 있고 ‘새 창조’로 묘사되는 예수 그리스도 구속 행위 또한 ‘본래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행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구도가 이전보다 말끔하게 정리된다고 볼 수 있죠.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여섯째 날인 금요일에 일어납니다. 안식일엔 이 땅에 계시지 않죠. 그리고 돌아오는 첫째 날인 주일에 부활합니다. 이 또한 ‘안식=창조의 완성’구도와 ‘성전=우주’의 구도에서 본다면 주님이 무덤에 묻히신 안식일이야말로 기능을 잃어버린 온 세계가 기능을 되찾은 창조의 완성으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성전이라 주장하신 예수의 육체가 부활한 첫째 주일은 새로운 성전의 시작인 동시에, 새로운 우주의 시작, 더 나아가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으로 읽을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래에는 성경의 '창조'를 '없는 물질이 있게 만드는' 존재론적 뉘앙스로 읽어왔습니다. 하지만 왈튼은 창세기의 '창조'를 '기능을 하지 못했던 물질이 다시 원기능을 발휘하게 만드는' 기능적 뉘앙스로 읽을 것은 제언합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본 책에 상세히 기술되어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 책은 성경 전반과 기독교 전체를 다시 읽을 수 있는 통찰들을 제공합니다. 물론 3장의 [고대 근동 우주론]을 탐구하는 진술은 읽기에 난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4장의 [창세기 1장] 해석은 때론 지루하게 보일 수 있고, 때론 끼워 맞추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왈튼의 [고대 근동 우주론]에 비추어 본 [창세기 1장] 해석을 찬찬히 곱씹어본다면 그동안 들어왔던 기독교의 진술과 성경 전반의 진술들을 다시 읽을 여지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시절 주일학교에서 ‘창세기 1장의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해야 기독교를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왈튼의 책을 통해서 ‘창세기 1장의 창조주 하나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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