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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by 홍도사 2020. 9. 20.

 

 

형, 복음을 전하려면 교회가 있어야 하잖아요.

어느 날 사역에 지쳐있던 한 전도사 친구가 말했다. ‘형, 복음을 전하려면 교회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어요.’ 무릎을 탁 치는 말이다. 신학교의 현장과 교회의 현장 사이에서 매번 고민하고 씨름하는 지점이 있다. 바로 ‘교회’다. 성경을 읽다보면 교회를 만난다. 신학을 배우면서도 교회를 만난다. 하지만 내가 진정 복음을 선포해야하는 교회, 내가 힘쓰며 분투해야하는 교회, 그 교회는 이전에 만났던 (성경 안에서와, 신학교 안에서의) 교회와는 다르다.

 

(성경에 기록된) 교회가 없는 세상. 거칠게 말하자면 ‘교회를 잃어버린 세상’ 속에서 우리의 복음이해는, 하나님 나라 이해는 얄팍할 수밖에 없다. 또 공허할 수밖에 없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도, 바울의 복음 선포도 결국 고유의 ‘교회’라는 지평 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스캇 맥나이트가 초반부에서 ‘스키니진’과 ‘정장바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양 극단에서 ‘사회변혁’을, 그리고 ‘구속’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캇 맥나이트에 따르면 그들은 서로 닮아있다. 동일하게 성경의 이야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교회’ 없이 ‘하나님 나라’를 논하고 있다.

 

성경이 그려주는 밑그림.

신약학자인 스캇 맥나이트는 ‘하나님 나라’를 논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간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바로 ‘이야기’다. 그는 성경의 진술들을 ‘이야기’로 개념화한다. 그가 제시한 A-B-A'라는 구도로 성경을 읽어보자.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반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여전히 그 창조의 섭리를 밀고 나가신다(플랜 A).

이와 같은 플랜 A속에서 ‘왕’이란 없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타락한 세상을 극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인간들은 반역을 꾀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이 다스린다. 하지만 장로들은 왕을 요청한다.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한 왕의 모델로 다윗을 허락한다(플랜 B).

이런 플랜 B는 오래가지 못한다. 다윗의 통치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플랜 B의 모델인 다윗이 사라지자 곧 이스라엘은 이방의 통치로 넘어간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다윗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남아있다. 현실의 비탄함과 약속의 신실함은 결국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플랜 B의 ‘다윗의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리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플랜 A의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겠다는 의지는 플랜 A'에서 창조적으로 만난다. 왕이신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다. 오직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플랜 A').

 

스캇 맥나이트가 말하는 예수 이해, 복음 이해는 플랜 A와 플랜 B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플랜 A'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복음은 결국 (그가 이전부터 주장해왔던) ‘왕이신 예수 앞에 복종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스캇 맥나이트는 이러한 밑그림 위에서 바로 ‘하나님 나라’를 다시 그려낸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스캇 맥나이트의 제언에 따라서 이러한 밑그림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자. 기초가 부실했던 하나님 나라 이해는 많은 오해들을 야기했다. 특별히 그는 많은 오해들 중의 대표적인 오해 세 가지를 꼽는다. 그리고 그 오해들을 비판하며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를 설파하기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무시간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으로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복음도 그렇게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스캇 맥나이트는 (신약학자답게)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그것이 쓰인 시대’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 속에는 ‘스키니진’과 ‘정장바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숨어있다. 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는 (각기 양 극단의 신자들에게는) 감동적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상황을 무시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1세기 유대의 상황 속에서 독해해야만 한다. 마카비의 전투, 에세네파와 바리새파, 그리고 사두개파가 득실거리던 예수 당대의 상황. 그 속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올바로 독해될 수 있다. 실제 스캇 맥나이트는 이러한 독해 작업을 해나가면서 오늘날을 위한 하나님 나라 이해를 그려낸다. 1)현재의 시대 속에서 2)지배적인 이야기와 맞서며 3)대항문화를 건설하는 것. 그렇다, 그가 말하는 (현재를 위한) 하나님 나라 이해는 다른 무엇이 아닌 ‘교회’이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Justice) 혹은 구속(Redemption)이다?

 

‘스키니진’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정의(Justice)다. 그리고 ‘정장바지’가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구속(Redemption)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개의 극단의 주장은 서로 닮은꼴이다. 앞에서 그가 주장한 것처럼 ‘무시간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양 극단은 ‘무시간적’으로 섣불리 하나님 나라 이해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정의의 요소가 있다. 구속의 요소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는 교회다. 왜 그런가?

 

정장바지들의 하나님 나라는 ‘종교적’이며 ‘영적’인 ‘구속’에 불과하다. 하지만 1세기 유대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땅’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땅’은 결국 ‘백성’과 연결되었고, 그 연결은 (땅과 그 땅에서 평화와 정의와 사랑과 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스라엘’로 자리매김한다. 플랜 A가 (언약관계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에 그쳤고, 플랜 B가 다윗 왕이었다면, 오늘날을 위한 플랜 A'에 이르러서는 무엇일까? 바로 왕이신 예수의 통치를 받으며(플랜 B),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간(플랜 A) 교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종착점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어쩌면 경험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라고. 이러한 명제는 ‘스키니진’만의 명제도 아니요, ‘정장바지’만의 명제도 아니다. ‘정장바지’의 대표주자인 조지 레드의 경우에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다. (반면) 교회는 여자들과 남자들의 모임이다.’라고 주장했다. ‘스키니진’의 대표주자인 니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교회를 하나님의 영역 및 통치와 구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 극단의 동일한 전제에 스캇 맥나이트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닐까?

 

그는 다시 성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진술을 탐독한다. 교회는 무엇인가? 복음서의 진술과 바울서신의 진술은 공통되게 증언한다. ‘교회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라고. 실제 (로마서에 따르자면) 교회는 ‘확대된 이스라엘’이다. 이러한 성경의 진술뿐만 아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탐독해도 마찬가지다. 1)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적인 모임인 ‘카할’이며, 2)왕이신 예수를 중심으로 한 사회정치적 조직체이며, 3)로마 제국 안의 대항공동체이다. 정리하자면 확대된 이스라엘로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회정치적 조직체로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며, 로마제국과 대항하는 대안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다. 스캇 맥나이트의 논지는 단순하다. 성경이, 그리고 ‘교회’라는 단어가, 바로 교회가 하나님 나라임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를 증언하기.

물론 나이브하다. 너무도 나이브하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는 딱 이 지점이 스캇 맥나이트 주장의 핵심이다. 여전히 교회가 하나님 나라일 수 있을까? 성범죄자가 치리 받지 못하는 교회 현장 속에서, 임직을 놓고 나눠지며 다투는 교회 현장 속에서, 성경과 복음이 오용되고 남용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는 스캇 맥나이트의 주장을 인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신약학자로써 스캇 맥나이트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 배수의 진을 친다. 그리고는 ‘Already(이미, 지금)’와 ‘Not yet(아직)’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널리 알려진 개념을 교회에 적용시킨다.

 

아직 도래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오늘날의 교회(지금의 교회)는 암담하다. 초라하다. 고린도교회를 비롯한 성경 속의 수많은 교회도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종말(아직의 교회)를 향해 나아간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새 예루살렘을 향한 요한의 노래는 ‘지금의 교회’에 속한 우리가 ‘아직의 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그리고 ‘지금’과 ‘아직’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교회를 실천적 장(field)으로 이끌어낸다.

 

간략하게 스캇 맥나이트의 요지를 요약해보자.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오늘의 경험적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그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일 수 있어?’라고 반문하는 오늘날의 경험적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스캇 맥나이트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일 수 있는 실천적 장을 제시한다. 그리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아파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그 길을 걷는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스캇 맥나이트는 플랜 A와 플랜 B, 그리고 플랜 A'의 구도로서 성경을 읽어냈다. 그리고 아주 유사하게도 그 구도로 ‘스키니진’과 ‘정장바지’를 읽어낸다. (물론 누가 플랜 A인지, 누가 플랜 B인지는 애매하다.) 하지만 결국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플랜 A와 플랜 B를 통합한 것처럼 그도 ‘스키니진’과 ‘정장바지’를 통합한다. ‘정장바지’가 갖고 있는 구속(Redemption)은 하나님 나라의 필수요소다. 세상의 지배 가운데 살고 있는 종된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 요소다. 하지만 구속은 결국 정의(Justice)를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구속된 백성들은 왕이신 예수의 통치 아래에서 세상 속의 대안적 정의를 건설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를 일궈낸다. 그리고 플랜 A와 플랜 B의 만나는 지점이 예수였던 것처럼, ‘정장바지’와 ‘스키니진’은 교회를 통해 만난다.

 

정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일 수 있을까?

본 서평은 스캇 맥나이트가 제안하는 교회의 실천적 원칙에 대해서 생략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이해』의 핵심 주장은 (실천적 원칙을 제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SNS을 통해서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정말 교회가 하나님 나라일 수 있을까? 아니, (그의 주장대로) 교회 밖에서 하는 모든 정의와 평화를 위한 (스키니진들의) 실천이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일일까?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답할 자신도 없고, 식견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스캇 맥나이트가 신약학자로서 교회를,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우리의 시대와는 무관하게, 성경은 여전히 그곳에서 (스캇 맥나이트의 주장처럼)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고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은 고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려고 한다면, 또한 무엇보다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성경을 통해 규정하려고 한다면, 그의 주장은 나이브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논지를 조금은 색다르게 읽을 만한 여지는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로써의 교회는 실천적 장(Field) 위에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범죄자를 치리하지 못하고, 성소수자를 배척하며, 정치권력을 통해 기독교 제국주의의 오래된 꿈을 실현하려고 하는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교회를 염두에 두며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스캇 맥나이트의 주장을 조금 다르게 읽자면 오히려 이러한 집단은 ‘교회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왕이신 예수의 통치를 거부하고, 정의의 실현을 거부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래할 평화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집단은 (스캇 맥나이트의 주장을 급진적으로 읽자면) 결코 교회일 수 없다.

 

또한 더 나아가서 그의 단호한 신학적 주장과 실천적 지침은 오늘날 지역교회를 향한 개혁의 검으로써 기능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다. 더 나아가서 ‘이미’와 ‘아직’사이의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분투하는 대안적 공동체다. 구원받는 이들의 숫자가 더한다는 것만으로, 부흥한다는 이유만으로,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개혁적 입장을 견지한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는 영적투쟁의 길 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교회이기에 현재의 모모든 상황을 막론하고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종교개혁자들의 기치인)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를 항상 외쳐야만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스캇 맥나이트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얼핏 현실의 타락한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 정당화시켜주는 것만 같다. 더 나아가 ‘스키니진’에 대한 비판은 사회참여를 하고 있는 실천적 그리스도인들을 배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캇 맥나이트는 현 시대와 대화를 시도하기 이전에, 성경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신약학자로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주장하는 논지는 단순하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다. 그리고 그 교회는 왕이신 예수의 통치를 따라 ‘지금의 교회’와 ‘아직의 교회’의 팽팽한 긴장 사이를 살아가는 교회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현실 교회의 현재에 대한 치열한 비판지침서로, 더 나아가 개혁될 현실 교회의 밑그림에 대한 개혁지침서로 읽을 여지가 있다.

 

다시 한 번 서두에 언급했던 한 친구의 한탄이 떠오른다. ‘형, 복음을 전하려면 교회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교회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어요.’ (스키니진처럼)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전에, 또 (정장바지처럼) 세상 속에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일궈야 할 것은 교회가 아닐까? 건물이 세워지고, 십자가가 걸린,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이 모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 왕이신 예수의 통치 앞에 굴복한 교회,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 양을 예배하는 교회,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 말이다. 이미와 아직의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어떻게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분투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