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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옛 교회의 전통을 따라 복음서를 읽는 방법.

by 홍도사 2020. 11. 21.

신약성경을 통독하려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따라 읽다보면 반복적인 이야기가 재등장한다. 또한 교회에서 곧잘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면 각각의 복음서의 묘사가 서로 섞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왜 예수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를 네 권의 복음서로 기록하고 있을까? 신학을 공부한 설교자의 입장에서도 고민은 이어진다. 각각의 복음서는 비슷한 사건을 서로 다르게 배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난 이야기로 넘어가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비슷한 순서로 전개된다. 설교자 입장에서도 복음서 본문은 난점 투성이다. 서로 비슷한 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에 대한 문제를 학계에서는 '공관복음서 문제'라고 일컫는다. '마가우선설'과 'Q자료 가설'이 대세다. 마가복음이 애초에 있었고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어록(가칭 Q자료)'과 '마가복음'을 기반으로 각자가 수집한 자료를 덧붙여 각자의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가설이 우세다. 이에 기초하여 각각의 가르침과 치유/이적기사가 어떻게 배열되었는지를 바탕으로 마가, 마태, 누가 각각의 신학적 의도를 재구성하는 '편집비평'으로 복음서를 읽기도 한다.(베르너 H. 켈버의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가 좋은 예시다.) 반면 본 책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는 (가설에 기초를 둔 편집비평적 읽기보다) 더욱 고전적인 읽기를 제안한다. 프란시스 왓슨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문헌을 바탕으로 다양한 외경 복음서가 이미 각각의 지역교회 공동체에서 유통되고 읽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중 복음서’가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채택된 사실, 또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선 ‘복음서 기원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각각의 책이 엮여서 한 권의 책으로 유통되었다는 사실(예:사복음서 코덱스)로부터 착안하여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읽기, 이른바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사복음서를 읽는 방식을 제안한다.

 

본 책은 1부에서는 각 복음서가 가진 고유한 특징을 다루고 2부에서는 하나로 합치되는 복음 이야기의 특성을 다룬다. 저자는 1부에서 각 복음서에 대한 통찰이 담긴 독법을 보여주면서 각 복음서가 고유의 특성을 지닌 '네 권의 복음서'라는 방식을 주지시킨 후에, 2부에서는 전환점인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기점으로 네 권의 서로 다른 복음서가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일치되고 있다는 논증을 전개한다. 실제 각각의 네 권의 복음서는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 이전에는 각자의 서사와 관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별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서사의 독특함을 잡아내는 저자의 독법은 매우 흥미로운 동시에 예리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각기 다른 서사는 결국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기점으로 달라진다. 본 책은 '네 권의 복음서'가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겹치는 이 기점에서 에우세비오스의 ‘정경목록’을 소개한다. 에우세비오스는 각 복음서의 공통자료를 분류할 뿐더러, 공통자료가 각 복음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번호를 명시함을 통해, 각 복음서의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함께 읽도록 돕는다. 본 책의 6장과 7장은 각각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과 십자가 처형장면을 둘러싼 각 복음서의 기록을 에우세비오스의 ‘정경목록’의 안내를 따라 읽는 실례를 소개한다. 네 권의 서로 다른 복음서가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만나 서로 조화를 이루는 장면을 통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복음서를 읽어왔다는 자신의 주장을 부각시킨다.

 

물론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보면 생기는 아쉬움도 있다. 각 복음서의 서사가 다르게 진행되다가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합치점을 찾고 있다는 저자의 통찰을 더욱 깊게 들여다보기 위해선 저자가 1부에서 쏟아부은 각 복음서 서사의 특징에 대한 해석이 다소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저자는 고유의 독특하고 예리한 읽기를 엿볼 수 있지만, 각 복음서가 펼쳐가는 각각의 서사에 몰입하기엔 1부의 분량이 다소 얇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다. 덧붙여 (분명 저자가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야고보 원복음>, <도마 유년기 복음>,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 복음>, <유다복음>을 비롯한 알려지지 않은 복음서를 사본으로 이용했던 흔적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다른 다양한 가능성을 접어두고 "어떤 복음서가 필사되고 통용되어야 하는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지난한 과정 끝에 네 권의 복음서를 하나의 복음서로 받아들였다. 이는 결국 네 권의 서로 다른 복음서 각각의 서사 자체가 갖고 있는 어떤 공통되고 일치된 을 암시한다. 서로 다른 서사가 갖고 있는 공통되고 일치된 어떤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네 권의 복음서 각각의 서사 자체를 읽고 연구하는 과정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독자가 본 책의 도움을 넘어서 각각의 복음서 서사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면, 각각의 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서사적 특징, 묘사의 차이, 역사적 배경 및 신학적 주제의 차이를 더욱 면밀하게 볼 수 있다면 저자가 제언하는 '네 권의 복음서'로 읽되,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읽는 읽기가 가진 장점을 더욱 체감할 수 있으리라 본다.

 

덧붙여 그가 제언하는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를 읽는 전통적이고 신학적인 읽기는 사실상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복음서를 읽어 온 방식에 대한 복원에 가깝다. 프란시스 왓슨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사복음서가 읽히고, 해석되고, 들려지고, 기도의 대상이 되고, 삶으로 살아내면서” 실제 그리스도인의 삶을 형성해가는 방식으로 사복음서를 이용했다고 밝힌다. 뿐만 아니라 켈수스 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당시의 비판자에 대한 교회의 대답 또한 (사복음서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의 삶”이라고 덧붙인다. 뿐만 아니라 (실제 8장에서 언급된) 2세기 기독교 철학자 유스티누스가 묘사한 성찬장면에 보면 각 복음서의 서로 다른 성찬기록이 절묘하게, 마치 한 이야기처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각각의 복음서를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읽어왔다는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저저는 복음서가 교회를 위해 주어진 책이며, 교회에 의해 공인된 책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인지시킨다. 따라서 각각의 복음서를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읽자는 저자의 제안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복음서 읽기에 대한 복원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 다른 네 권의 복음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 서있다. 상황신학에 근거한 다양한 비평, 이를테면 제국주의 비평, 식민주의 비평, 여성비평 등의 방법론을 통해 복음서를 읽을 수 있다. 또한 현대적이지만 또한 고전적인 편집비평을 통해 각각의 복음서 서사가 어떻게 복음서 편집자의 신학적 관심과 관계를 맺는지 읽어나갈 수도 있다. 때론 나이브하게 있는 그대로 읽으며 각각의 복음서 기자가 들려주는 서사에 빠져들 수도 있다. 프란시스 왓슨은 의도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 당시의 문헌들을 자주 소개하고 인용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복음서를 읽었던 방식을 들려주며 복음서가 진정 어떤 책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분명 그가 들려주는 읽기 방식은 전통적이며 신학적인 읽기라 고루하고 따분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복음서가 원래 교회에게 전달되었던 의도를 고스란히 살려서 읽을 수 있는 통찰들이 담겨있다. 두산백과는 고전을 두고 "세계문학이나 각국 문학의 입장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비평을 이겨내고 남아서 널리 애독되는,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라 소개한다. 복음서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온갖 비평을 이겨내고 남아서 널리 애독되고 있다면, 복음서를 애독하는 '고전적인 방법', 이른바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읽기 방법의 도전을 이겨내고 남아서 여전히 사용되는 복음서를 읽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분명 프란시스 왓슨은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를 통해 고전인 네 복음서를 읽는 고전적인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프란시스 왓슨의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는 이미 출간된 비슷한 책 몇 권을 상기시킨다. 본 책과 매우 유사하게 에스겔의 환상을 본따서 마태를 인간, 마가를 사자, 누가를 소, 요한을 독수리로 읽는 방식의 읽기는 리처드 A. 버릿지의 <복음서와 만나다>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다만 <복음서와 만나다>가 각각의 복음서의 정황, 네러티브, 플롯을 읽는 '각각의 복음서 이야기'로 읽는 방식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면, <네 권의 복음서, 하나의 복음 이야기>는 에우세비오스의 '정경목록'을 기점으로 어떻게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읽는 방식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 물론 두 권의 책은 각기 다른 복음서를 어떻게 하나의 복음 이야기로 읽는지에 대한 비슷한 관점을 공유한다. 뿐만 아니라 피터 라잇하르트의 <손에 잡히는 사복음서> 또한 서로 다른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반면 프란시스 왓슨, 리처드 A. 버릿지와는 달리 피터 라잇하르트는 마가우선가설과 Q자료 가설을 거부하는 소수입장을 취한다. 그는 구약의 상징을 신약에서 찾아내는데 있어서는 매우 명민한 학자로 독특한 독법을 보여주지만, 본 책은 '대중강연' 정도의 퀄리티에서 머문다. 참고로 이와 같은 '대중강연' 정도의 퀄리티를 내는 복음서 입문서로는 모나 D.후커의 <복음의 시작:도입부로 읽는 네 편의 복음서>가 있다. (물론 본 책은 네 편의 복음서가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조화되는지에 대해선 다루지 않는다.) 반면 '하나의 이야기'로 읽는 읽기에 집착하지 않고 고전적인 공관복음서 문제에 입각하여 네 공관복음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에 대한 통찰을 전해주는 책으로는 키트 F.니클의 <공관복음서 이해>가 있다. 본 책은 편집비평에 입각하여 마태와 누가가 마가를 확대/개정했다는 가설을 통해 각각의 책을 어떻게 읽을지에 대한 섬세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