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공부/신약

고난주간 :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이야기

by 홍도사 2022. 4. 9.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이 공저한, 지금은 절판된 <마지막 일주일>과 닉 페이지의 <가장 길었던 한 주>를 참조하며 작년에 정리한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고난주간에 잘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월요일>

마가복음 11:11-19

 

예수님께서 죽으신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일을 ‘종려주일’이라 명명하고, 죽으시고 부활한 그 다음 주를 ‘부활주일’이라 명명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날들을 <고난주간>이라 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복음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복원하고 그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해왔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 11장 11절에서 19절까지의 본문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지막 일주일 중 월요일날 행하셨던 일들을 기록한 본문으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월요일에 성전에 들어가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는 열매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합니다. 이는 배고파 시장하던 차에 열매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능력을 남용한 본문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화과 나무’는 뒤이어 등장하는 ‘성전’을 상징합니다.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은 것처럼 ‘성전’은 ‘성전’의 기능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온 백성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해야 하는 성전이 한낱 ‘강도의 소굴’로 전락해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배고파 시장하던 이들에게 ‘열매’를 맺어야하는 것처럼, ‘성전’ 또한 하나님이 필요한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없던 무화과 나무처럼, 하나님이 없던 성전은 하등 필요가 없는 존재나 다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의 월요일은 ‘하나님이 없는 성전’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반복되는 예배는, 우리의 반복되는 교회생활에는, ‘하나님’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을 전달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월요일에성전에 하나님이 없음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선물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겐 하나님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화요일>

마가복음 11:20-13:37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치열한 논쟁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녕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예루살렘을 뜨겁게 달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곧 사라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하늘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며, 한낱 소작농에 불과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하늘 아버지를 거역한 것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살해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로마황제보다 하나님이 더 궁극적인 분이며, 죽음 이후에는 부활이 있고, 자신이야말로 모든 하나님의 율법을 꿰뚫고 있는 권위자라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멸망처럼 결국 이 세상에도 끝이 있을 것이라 예고하셨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것처럼 세상 또한 무너질 것이며, 그때에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치열한 논쟁의 한복판에 계셨던 예수님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요일에 이런저런 주제로 예수님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전파괴를 예고한 분, 또한 세상의 종말을 예고한 분,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는 분, 하늘 아버지의 대리자, 로마황제보다 더 크시고 궁극적인 하나님을 말하는 분,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은 한낱 초라한 인간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결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논쟁의 한복판으로 초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의 수많은 지혜로운 말들과, 경이로운 기적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사람들처럼 여전히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화요일, 치열한 논쟁 속에 계셨던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논쟁의 결말은 허무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청중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에 대한 무수한 생각 끝에 결국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화요일, 어쩌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어느때보다 강하게 변론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같지만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달리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설득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수요일>

마가복음 14:1-11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의 섬김을 받습니다.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져와서 이를 깨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 여인의 고결한 섬김을 한낱 낭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고결한 섬김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 칭찬하시고는 후일에도 여전히 이 여인의 고결한 섬김이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마가복음은 한 여인의 고결한 섬김과 사람들의 오해의 처음과 끝에 ‘배신’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14장 1절부터 2절까지는 “예수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배신자를 필요로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한 10절부터 11절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 마음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2절의 필요는 10-11절에서 충족됩니다. 반면 마가복음은 그 이야기 사이에 한 여인의 거룩한 낭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는 다시 한 번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극명하게 대조되는 그룹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제거되어야 할 위험한 세력이었습니다. 그의 말과 행적들은 한낱 백성들을 미혹하는 도구였습니다. 반면 그 대척점에는 향유 옥합을 깨트려 거룩한 낭비를 실천했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거룩한 낭비를 두고서,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결국 사람들의 사특한 계락과 속임수 덕분에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죽으심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흥미롭게도 ‘종교지도자들’과 ‘한 여인’ 사이에 제자들이 위치합니다. 마가복음의 보도에 의하면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지 못하며, 그의 죽으심이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거룩한 낭비라는 사실에는 전혀 이르지 못한 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제자들은 결국 십자가 앞에서 모두 흩어집니다. 반면 십자가 아래에는 세 여인이 남아있습니다(막 15:40-41). 세 여인을 대표하는 여인이 바로 향유 옥합을 예수님 앞에 낭비한 이 여인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누구의 길을 따르게 될까요? 종교지도자들의 길을 따라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까요? 아니면 이 여인의 길을 따라 결국 예수님의 거룩한 낭비를 노래하게 될까요? 적어도 오늘 본문은 가룟유다만큼은 종교지도자의 길을 따라나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의 배신이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과 전혀 가까워보이지 않았던 여인의 고결한 섬김, 거룩한 낭비가 있었습니다. 수요일 아침, 예수님 앞에서 향유 옥합을 깨트린 여인을 다시 기억해봅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꿰뚫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 바로 곁에 있었단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오해한채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행위를 저지릅니다. 우리는 정녕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목요일>

마가복음 14:12-72, 요한복음 13:1-30

 

목요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떡과 잔을 나눕니다.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이 자신의 살이라 말씀하시고, 잔을 나눠주시면서 이것이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죽음을 준비했을 때, 이미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나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떡과 잔을 나누는 장면인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장 따스한 기억입니다. 이를 그들은 기억했고, 매번 기념했고, 또한 이 날이 바로 자신들이 새롭게 태어난 날이라 고백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떡과 잔을 나누는 이야기와 곁들어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건을 걸치고 대야에 물을 뜨신 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님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종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발을 씻기는 이 장면은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와도 묘하게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떡이 되기 위해 오셨습니다. 목요일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종으로 오셔서 인간을 섬기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밥으로 오셔서 인간에게 먹히셨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의미에 있는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혁명이 발각되어 처형당한 것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한 실패의 죽음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을 섬기기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기 위한 죽음입니다.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예수님은 이 목적에 충실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발을 씻기는 장면과, 떡과 잔을 나누는 장면으로 압축되는 예수님의 삶의 목적의 절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기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타인을 섬기기 위한 종으로의 죽음인 동시에, 타인을 먹이기 위한 빵과 잔으로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의 길로 부름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먹이는 빵과 잔의 길로 부름을 받습니다. 세상은 가장 높아져서 주인이 되기를 욕망합니다. 반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은 가장 높아져서 타인의 것조차도 빼앗아 먹기를 욕망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는 직접 빵과 잔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당신은 정녕 종입니까? 당신은 정녕 밥입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금요일>

마가복음 15:33-41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음모가 절정에 달한 날입니다. 총독 빌라도의 힘을 빌어 드디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았습니다. 교활한 정치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일어나게 될 군중들의 민란을 염려했습니다. 허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동원된 군중을 힘껏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이 과정은 은밀한 음모가 진행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교훈을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던 예수님은 금새 정치범으로 변모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공범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낌새를 알아차린 도마가 “우리도 죽으러가자!”라고 외쳤다고 전합니다. 나머지 복음서는 베드로가 이런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곁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치범으로 선고될 때 그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외롭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동료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정치적 음모로 말미암아 자신의 몸을 숨겼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고 따랐던 대중들도 침묵일 지켰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을 지켜본 새로운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여성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마가복음은 그들이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셨을 때부터 따르며 섬겼던 여인들이라 소개합니다.

흥미롭게도 세 명의 여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장례를 마무리하기 위해 무덤에 갔다가 부활을 목격한 첫 번째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세 명의 여인은 예수님을 줄곧 따라다니던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대체합니다. 빛도 이름도 없이 묵묵히 따르던 세 명의 여인이 예수님 곁에서 온갖 활약을 펼쳤던 세 명의 수제자를 대체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지켰던 사람이 세 명의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호언장담할 위치에 있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십자가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반면 묵묵하고 조용하게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지금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조용하고 묵묵하고 하지만 끝까지 그 길을 따라가는 여성제자의 마음가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곁에는 명의 여성만이 그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토요일>

벧 3:18-20

 

토요일 예수님의 행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무덤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행적은 기록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베드로전서는 전혀 다른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그 때에 옥에 있는 영에게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는 죽음의 세계인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 원문에는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누락되었지만) “지옥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살던 1세기 유대인 세계는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불의가 가득했던 세상이었습니다. 응당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손해를 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불의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던 의인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냐고 질문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죽음의 세계인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지 않냐고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가르침은 명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세계인 지옥에 갇힌 의로운 사람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현 세상에서 힘들게 살았던 그들은 결국 지옥에서 해방되어 부활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지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지옥에 있는 수많은 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죽었던 이들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당하셨지만 다시 살아나실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의인을 알아보지 못하던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의 삶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의인이 실천했던 사랑, 용서, 정의, 평화의 가치는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다면, 이들 또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정직함을 조롱합니다.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사는 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비웃습니다. 물론 이 세상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이 끝이 난 이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한 세상은 결코 정직함을 조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롭고 정정당당하게 사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사는 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에 부활한 세상에는 정직하고, 의롭고 정정당당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사는 사람들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불의가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정의가 다스리는 세상, 속임수가 만연한 세상이 아니라 정직함이 굳게 세워진 세상이 있습니다. 세상권세를 휘어잡은 악한 영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도 죽게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부활한다면 우리의 시민권이 있는 나라,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