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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신약

마태복음의 종말론

by 홍도사 2022. 1. 21.

 

마태복음 21장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에 강림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기존의 백성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이 일로 버림받게 되고, 여기서 ‘남은 자’들이 모인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나귀와 나귀새끼’를 함께 끌고 와서 예수께서 타고 입성하시는 장면은 크게 두 가지의 구약본문을 반향합니다. 겸손한 왕이 도착하실 것이라는 스가랴 9장의 본문과, 유다 지파의 메시야 등장을 암시하는 창세기 49장의 본문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약속된 유대지파의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더 큰 문맥인 이사야 40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오심’의 노래와 하모니를 이룹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약속된 유대 지파의 왕이자 메시야의 입성인 동시에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하지만 궁극으로 하나님의 오심, 메시야의 입성은 결국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성전정화사건(21:12-17)은 무화과나무 이야기(21:18-22)와 서로 하모니를 이룹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오심을 알아보는데 실패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지파의 왕이신 예수님은, 그들을 심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결국 예루살렘 성전의 함락사건으로 귀결됩니다.

66년에서 73년까지 벌어졌던 제 1차 유대-로마 전쟁은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참고로 네 권의 복음서는 이러한 참혹한 결과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수집했던 예수의 말씀을 토대로 본 사건의 의미를 성찰합니다. 과연 성전이 도륙당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이 선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받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마태복음 24장 3절부터 14절까지의 이야기는 당대의 시대적 혼란에 대한 사후의 신학적 판단입니다. 로마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고, 그로 말미암아 온갖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며, 기근, 지진, 환난이 그들을 덮쳤던 이야기는 제 1차 유대-로마 전쟁 당시의 예루살렘 풍경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예루살렘 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유대 세계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헬라세계로 돌리는 선교적 전환의 신학적 계기로 삼습니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이 말씀은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게 되면 종말이 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리어 예루살렘 함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복음서 기자들의 신학적 고백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마태복음 24장의 내용은 당대 유대-로마 전쟁 당시의 예루살렘 풍경에 대한 묘사에 가깝습니다. 때의 시기와 징조를 잘 분별하라는 말씀(29-35)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마태복음 저자는 곧이어 전혀 상반되는 것 같은 내용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 24장 전반부에서는 전쟁, 환난, 기근,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종말’의 때라고 말하는 것 같다가, 또한 32-34절에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어 종말의 때를 대비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가, 갑자기 ‘때는 모른다’고 말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마태복음이 24장에서 말하는 종말이 중의적이기 때문입니다. 1차적으로 마태복음 24장이 말하고 있는 종말은 ‘예루살렘의 종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오심을 몰라본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심판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의 기본적 문맥은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라’에 가깝습니다. (덧붙여 아마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예언을 가슴에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나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의 1차적 의미에서 머물지 않고, 2차적 의미를 향해 성큼 나아갑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입니다. 따라서 ‘때를 분별하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향한 말씀이고, ‘때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향한 말씀에 가깝습니다.

“때를 준비하라”는 문맥 가운데 있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24:32-33)는 말씀은 성전정화 사건 당시에 구술되었던 무화과나무 이야기와 의도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1장에 등장한 이야기는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준비되지 못했다는 신학적 고발에 가깝습니다. 종말의 1차적 의미인 예루살렘 함락의 이유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미처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무화과 나무의비유를 배우라’는 말씀은 이를 살짝 비틀어 들려줍니다. 종말의 1차적 의미인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준비되지 못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심판받았다면, 종말의 2차적 의미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이 도래한다면 과연 교회는 심판받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냐는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노아의 때, 밭에 있는 두 사람, 맷돌질 하고 있는 두 여자의 비유를 통해 준비되지 않은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과, 도둑을 준비하는 집 주인, 주인을 위해 양식을 나눠줄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의 비유를 통해 다시오심을 잘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25장의 열처녀비유, 달란트비유와 연결되며 그 정점에 바로 ‘양과 염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실패한 이유,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인간 예수로 오신 하나님을 몰라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또한 예수의 다시오심을 몰라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흥미롭게도 마태복음 종말론의 결론부인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속에 숨어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조명합니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이런 이들을 사랑하고 돌본 자들이 옳다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이런 이들 몰라본 자들은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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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게 설명했지만 이것이 마태복음이 말하는 종말론이며, 신약성경 전반에서 말하는 종말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종말론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소망입니다. 따라서 그 강력한 소망은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로 점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성경본문도 ‘곧’ 다시 오실 것이라며 오늘날의 비정상적인 종말론 공동체의 실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집도 팔고, 직장도 그만두고, 일상도 접고, 교회로 모이는 방식의 비정상적 실천 말입니다. 

오히려 마태복음은 ‘곧’ 다시 오실 예수님의 때를 사실은 예수님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말(24:36)을 명시합니다. 이는 철저히 은유적인 묘사입니다. 다시 오셔서 왕으로 좌정하시고 심판하실 분께서 자신이 오실 날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 이는 ‘때’가 어느 때인지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일상으로 돌아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관심을 쏟고 그들을 사랑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할 유일한 기준입니다.

마태복음 24장부터 25장은 분명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띄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배경이 된 1차 유대-로마 전쟁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저자는 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바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명시한 이후에, 교회 공동체조차도 그 심판을 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뒤이어 권면합니다. 교회구성원들 또한 ‘종말’을 준비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준비는 매우 일상적입니다.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는 것, 종말의 때에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결과를 받게 된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대한 태도.

성경은 언제 종말이 올는지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때가 되면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를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는지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를 얼마나 돌보며 사는지에 대해 지극히 관심을 쏟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