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교회에서 사역했던 때의 일입니다.
매년 한 주일마다 교육부서는 돌아가면서 <헌신예배>를 드렸습니다. 응당 우리 부서가 <헌신예배>를 드리게 되는 때가 다가오면, 교육부서 전체가 난리였습니다. 어떤 노래로 특송을 해야 하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준비하거나, 혹은 잘 촬영되고 편집된 영상을 준비해서 가장 잘 준비된 <헌신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잘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헌신>하기 위한 것인데,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인데, 왜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만 신경을 쓸까 궁금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무엇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 어떤 영상을 만들 것인지, 정말 정말 중요한데 그 <어떤>은 결국 <메시지>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설득했습니다. 몇 주 주구장창 모여서 애들 귀찮게 연습시키지 말자고 설득했습니다. 어떻게든 내가 책임을 질테니 좋은 <메시지>를 기반으로 예배의 전체적인 서사를 잘 짜자고 설득했습니다. 물론 준비과정에서 선생님들께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애들을 놀려도 되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괜찮았습니다.
따져보면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애들을 열심히 연습시켜서 멋진 무대를 연출하는 것은 <헌신예배>가 지향해야 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예배>에는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따라서 고등부 헌신예배면 고등부에 걸맞는 <메시지>에 맞게, 청년부 헌신예배면 청년부에 걸맞는 <메시지>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기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간혹 이를 <개혁>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맞춰서 예수님의 일곱 가지 면모에 대해서 알아보는 중에 있습니다.
첫 번째 주에는 <사람의 나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당시에 흘러가던 대선국면에 견주어, 지속되고 있는 짐승의 나라와 대조되는 <사람의 나라>를 다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나라>를 주장하셨습니다.
두 번째 주에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나라>의 연장선상에서 <하늘나라>를 가르쳤습니다. 더 나아가 하늘나라, 즉 천국운동을 펼쳤습니다. 천국운동은 <하늘나라>에서 가능한 일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자는 맥락의 운동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하고, 지금 여기서 용서하고, 지금 여기서 올바르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천국운동>의 원리가 온 세상에 퍼지길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오늘은 <성전개혁운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네 권의 복음서는 두루두루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과 행적에 대해서 각자의 관점에 따라, 각자가 갖고 있는 자료들을 배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에 있는 내용이 저 복음서에 없기도 하고, 저 복음서에 있는 내용이 이 복음서에는 없기도 합니다. 반면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사건이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입니다.
먼저 짚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다니는 교회와 성전을 비슷하게 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고대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일종의 하나님께서 앉아서 다스리시는 왕의 보좌였습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은 <성전>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야 했습니다. 또한 <성전>이 앞장서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소외된 이들을 돌아봐야 했습니다. 반면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성전은 <죄>로 더럽혀졌고 제사를 통해 더럽혀진 죄를 청소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해버렸습니다. 성전도 무너져버렸습니다. 나라도 잃고 성전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실상 죽었다 혹은 다른 신들에게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부여하셨습니다. 성전이 없다 한들, 나라가 없다 한들, 영원히 그들과 함께 할 것이며, 그들을 회복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실제 이후의 역사는 이런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라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살면서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을 다시 모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성전이 완공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의 의미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그 뜻을 어겼을 때는 성전이 더럽혀진다는 사실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 또한 성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도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전은 나날이 죄로 말미암아 더렵혀지는데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살게 만들 의지 자체가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성전은 종교기득권과 정치기득권이 묘하게 결탁한 장소와 유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당시 1세기를 살던 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다. 당시 사람들은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분노가 생기곤 합니다. 첫 번째 성전이 실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성전의 제사장들 또한 성전을 바르게 만드는데 관심이 없고 오히려 기득권들끼리 결탁해서 이익만 챙기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빈익빈 부익부가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를 해결할 의지가 성전 제사장들에게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성전이 바로 서 있었다면,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회개의 선언이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제사를 통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제 성전에 들어오는 세금을 털어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컨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과부의 두 렙돈 헌금> 또한, 실제 성전 기득권들이 도와야 할 과부가 도리어 성전에 헌금을 낸다는 역설적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은 성전을 비판했습니다. 성전에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기득권은 물러나고 개혁적인 인물이 제사장을 맡고, 성전 자체를 배불리기 위한 성전행정보다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성전행정을 요구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대에 성전 제사장, 이른바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는 성전개혁운동에 참가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요 2:13-21)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이라는 성대한 명절에, 성전에서 열리는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예수님이 본 광경은 성전 내부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크로산이라는 재치 넘치는 신약학자는 아마도 예수님을 <갈릴리 농촌사람이어서 어른이 된 이후에 예루살렘에 처음 오셨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리고는 기상천외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는 광경을 보고 너무 당황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주장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흠없는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흠없는 제물을 가져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또한 흠없는 제물이라고 하지만 정작 제사장이 흠을 발견하면 제사는 드리지 못하게 되니까요. 따라서 성전 앞에는 흠없는 제물을 파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제사를 돕는 선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면 꼭 선한 의도이지는 않습니다.
제사장과 성전은 <흠없는 제물>을 요구하는데, 왜 그들이 해야 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돌보고 있지 않을까요? 왜 그들은 성전세로 거둬들인 수입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을까요? 즉 왜 남에게만 엄격하고 스스로에게만 관대한 것일까요? 따라서 예수님은 이런 성전의 부패한 제도에 대해 분노하시면서 일단의 퍼포먼스를 구현했습니다. (14-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상인이 판매하시는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제물을 파는 상인들을 내쫓으시면서 한 마디를 남기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원래 목적으로 돌려놓으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야 하는 구심점,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 못했을 때 민족의 대표인 대제사장이 나와 이를 참회하고 되돌려야 하는 곳. 따라서 무엇보다도 당대에 극도로 심해져가던 빈부격차를 다잡아야 할 장소. 원래의 목적으로 성전은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전개혁을 외치는 예수님을 두고 요한복음은 매우 의미심장한 해설을 남기고 있습니다. (21절) “성전된 자기 육체” 즉, 요한복음은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을 두고 <성전>으로 새롭게 규정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점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인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건물인 성전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감독하고 하나님의 뜻을 외쳐야 하는 제사장 기득권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의 저자가 보기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예수라는 한 인간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에 걸맞게 살아가기를 애쓰는 공동체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면 함께 모여 그 문제를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빈부격차 해결> 같은 문제는 교회공동체가 직접 손을 벗고 나서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미 그 사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빈부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집사>들이 임명되었고 그들은 과부들에게 골고루 헌금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이 보기에는 <예수>라는 한 인간이 참된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라는 한 인간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공동체가 참된 성전이었습니다. 그들이 실천하는 하나님의 뜻이, 예루살렘 성전의 실천보다 더 나았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각자의 죄를 고하는 것이 예루살렘 성전이 죄사함을 위해 드리는 제사보다 더 나았습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의지가, 예루살렘 성전이 빈부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가진 의지보다 더 나았습니다.
다시 한 번 예루살렘 성전 앞에 선 예수님을 생각해봅시다. 그가 보았던 예루살렘 성전의 광경은 어땠을까요? 겉으로는 화려했을 것입니다.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시의 성전이 솔로몬 성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아름다움을, 이후에 포로기 시절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이 다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헤롯의 성전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있었습니다. 성전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전을 비판하셨고, 더 나아가 스스로 성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모인 이들을 모아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란 이름으로 모인 우리들의 기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1)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2)뜻을 어겼을 경우 함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3)구체적으로 지체들 중에 도와야 할 지체가 있다면 실질적인 돈이나, 말을 통해서 함께 돕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도, 성전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까 예수님은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판과 함께 역사 속에서 무너져내려버렸습니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란 이유로 하나님이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행하지 않는다면, 어긴 바를 서로 고백하며 죄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서로를 돌아보고 돕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당시 성전처럼 멸망의 역사를 걷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시다, 그리고 용서를 빕시다. 그리고 서로를 도웁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전 앞에서 퍼포먼스를 벌이며 우리에게 남긴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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