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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1-2022

[부활절] 하나님에게도 상처가 있으십니까? (요한복음 20:19-29)

by 홍도사 2022. 4. 17.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세상은 왜 이럴까?”

저는 저의 수능성적과 평소 공부에 비해서 훨씬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입학한 학교는 한때 아버지가 꿈꾸던 학교였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는 저의 대학합격소식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뤄드리는> 감정을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제가 21살 6월경에 <학교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아버지가 저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으셨습니다. 지금처럼 세상이 좋아지지 않은 시절이라 삶 자체가 너무 힘겨우셨습니다. 

아버지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라 매주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배대상인 신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했던 자신을 방관하고 있던 신, 교통사고 이후 1년간 입원해야만 했던 자신을 방관하고 있던 신, 무엇보다도 죽을 힘을 다해 살아온 삶의 여정 가운데 개입하지 않는 신, 그 신이 <전능>하다는 말 그리고 <선>하다는 말은 아버지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자신 앞에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아들 앞에 꺼낼 수 있는 말은 매우 힘이 있어보였습니다. 

21살 시절 저의 신앙은 뜨거웠습니다. 하지만 단순했습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잘 믿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지만 실상 저는 그때 당시 하나님을 좋은 거래상대로 생각했습니다. 교회나가는만큼 삶을 형통하게 풀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봉사도 열심히 하다보니, 하나님은 좋은 대학에 보내주셨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그때 당시에는 막 연애도 뜨겁게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많은 것을 주시는 분이셨고, 삶을 아름답고 형통하게 만드시는 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당시, 더 좋은 것을 드려서, 더 더 좋은 것을 얻으리라는 생각에 신학교를 꿈꿨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행복하지만 않았습니다. 기도 응답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막 신앙을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19살에서 21살 무렵 쏟아지는 축복을 모두 경험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펼쳐지는 삶은 썩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장교복무를 희망했지만 필기를 통과한 이후 실기를 앞두고 다리를 다쳐버렸습니다. 병사입대를 앞두고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져버렸습니다. 응당 신학교 진학은 먼 훗날의 일이 되어버렸고 저의 삶은 이후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모교회는 대구에 있는데, 군대를 다녀오고, 학교는 부산에 가다보니 이 교회도 저 교회도 내 교회처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신앙도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힘든 고비를 꽤 겪고나니 이제는 삶이 평탄하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얼마전 아내와 저는 자녀계획을 위해 몇 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의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저는 태어날 확률이 희박한 존재였습니다. 배아가 형성될 가능성도 낮았고, 착상될 가능성도 낮았고, 낙태될 가능성도 높았고, 태어나서도 죽을 확률이 높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배아로 형성될 당시부터 염색체 세 개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합니다만, 위치가 바뀐 염색체 숫자가 다소 어긋났다면 저는 다운증후군과 같은 장애로 살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앞으로의 자연임신 확률도 0에 가깝다는 결과를 받아봐야했습니다. 제가 배아가 형성될 가능성도 낮았고, 착상될 가능성도 낮았고, 낙태될 가능성도 높았고, 태어나서도 죽을 확률도 높았던 것처럼 저와 제 아내의 배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시도한 한 번의 인공수정은 당연히 착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검사결과를 듣고 아내가 하루, 그리고 반나절을 망연자실했습니다. 혹여나 제가 마음이 상할까봐 제가 없을 때 홀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실망 속에서 저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인생이 왜 이럴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자신의 스승이 처형당한 이후 <숨을 수 밖에 없었던 처지>에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에 쉽게 조소를 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주일학교에서는 쉽게 제자들을 <겁쟁이>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 그리고 배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만 하더라도 대통령선거에서 진 정당의 주요인물들은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로 검찰조사를 당하거나 정치활동이 위축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죄를 지은 일이 있으니 그렇겠지요. 하지만 반대로 뒤집어보면 그들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면 충분히 덮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셨다는 것,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정치범>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우스꽝스러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행진을, 로마제국에서는 <군사적 반란>의 광경으로 판단했다는 말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애초 사순절 첫 번째 설교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갈릴리 세포리스에서는 2000여명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왜 2000명이나 달렸을까요? 예수님만이 다른 두 명의 반란 혐의자와 십자가에 달리는 경우는 꽤 드문 경우입니다. 제자들이 달리지 않은 경우는 오히려 드문 경우입니다. 보통 한 명의 <정치범>을 잡아서 십자가에 달아 죽일 때에는, 샅샅이 조사하여 동지들을 모두 함께 죽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 그 이후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 이 짧은 기간들은 제자들에게 미칠 것 같이 무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검찰이 확대수사를 펼쳐서 예수님이 자주 갔던 단골집까지 털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최측근만 털어버릴 것인가의 수사지침이 결정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왠만한 십자가에 달린 정치범의 전례를 살펴본다면,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싸그리 십자가에 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이른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이틀이 지난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즉 제자들이 주변의 사람들을 피해서 <모인 곳의 문들을 닫>은 상태에서 숨어들어 있었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인 목요일 밤부터 잠행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들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목요일날 밤에 예수님이 잡히셨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물론 매우 졸속 재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다 위를 걸으시던 분, 폭풍우를 잠재우시던 분, 언변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키시던 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회복시키시던 분. 그 분이 재판장에 끌려갔다 한들 다시 걸어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언변으로 제사장들과 로마관리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기적을 통해 결국 끝내 살아서 다시 만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실제 만났던 예수님은 죽음의 고비를 쉽게 넘길 수 있을만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죽었습니다. 허망한 죽음입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시간 동안 체포되셔서, 졸속재판을 지나가신 후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다소 잠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목요일 밤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참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가, 아침 9시경에 일어나자마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현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가 현실로 목을 죄어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 또한 이이렇게 질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예수님은 왜 죽었을까? 그리고 우리 인생은 왜 이럴까?”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논리적으로만 상상해봐도 당연한 말입니다. 전능하지 않다면 그가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전능하다 한들 그가 선하지 않다면 그를 믿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종교나 신앙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기필코 전능해야하고, 선해야 합니다. 이는 논리회로만 돌려봐도 너무나 쉽게 도출될 수 있는 명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다고만 생각해봅시다. 단지 그뿐이라고만 생각해봅시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참해집니다. 무한한 전능함과 무한한 선함을 가진 하나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고, 절규가 있다면, 나는 적어도 그 하나님께만큼은 버림받은 존재라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뒤집어서말하자면 세상에서 너무나 잘 살아가는 사람, 고통과 아픔과 절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상위 1%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실제 고대 근동신화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비슷한 사례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신>이라는 전능성을 가진 존재가 선택한 인류는 극히 소수의 인류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왕>입니다. 로마 또한 황제를 <신의 아들>이라고, 소수의 선택받은 존재라고 추앙했습니다. 더 나아가 가끔은 로마 황제가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메르지역의 다양한 신화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소수의 지배계층 <왕>들만이 신의 선택을 받고, 신의 형상을 수여받은, 신의 은총을 입고 사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의 전능함은 소수계층에게만 향해있었고, 대부분의 대중들은 신과 동떨어진, 신의 혜택과는 무관한, 신에게 버림받은 한낱 도구에 불과한 존재라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의 선택받은 왕과 지배계층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우리가 읽는 성경은 철저히 소수자에 불과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 무시하기에 딱 좋은 무척 소수의 변두리 종족에 불과합니다. (물론 20세기 이후 유대인이라 이름불리는 존재들은 다릅니다만, 적어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기록한 이스라엘 민족은 극히 세계사적으로 의미도 없고, 숫자도 소수에 불과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정복한 적이 없습니다. 독립왕국을 오래 가졌던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이 유목민 생활이었고, 식민지 생활이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이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실제 오랜 유배생활 끝에 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사어, 죽은 언어가 되어버린 민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기록된 성경은 무척 독특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약자를 편애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전능성과 선함을 갖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누군가를 편애한다면, 그는 세계 속에서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기록된 이 성경은 매우 독특하고도 난해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지만, 무능한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전능함과 선함을 두루두루 갖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작정하시고, 한낱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시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죽음의 위기를 실제 느끼고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마도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하나님, 혹시 하나님도 저희처럼 아프십니까? 혹시 하나님도 저희처럼 고통스러우십니까? 혹시 하나님도 저희처럼 눈물은 흘리십니까? 왜 저희 스승을 버리고, 저희를 버리셨습니까?” 꼭 그런 심정을 가진 제자들이 모인 주일밤, 그 어떤 누구도 제자들이 모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모든 문들을 꽁꽁 닫은 그곳,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고통과 좌절과 눈물 속에서 평강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예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평강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20절)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손과 옆구리”라는 표현은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특별히 <손>은 바로 <못자국>의 상처가 있는 육체입니다. 고대 그리스 문헌을 참조하자면, 일반적으로 재판정에서 유리한 판결을 얻기 위해 증인이 자신이 입었던 상처를 보여주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고 합니다. 즉 아픔과 고통, 눈물 속에 매몰된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강을 빌어주시면서, 스스로의 몸에 아픔과 고통, 눈물의 흔적, 이른바 상처가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이해에 전환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상처가 없는 분이지 않습니다. 그는 상처를 지니신 분입니다. 그는 아픔과 고통을 모르는 분이지 않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겪은 흔적을 지니신 분입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24절) <디두모라고 불리는 도마>는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증언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25절)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내가 직접 봐야지만, 확인해야지만, 믿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통과 절망 가운데 숨어있던 제자들이 “하나님의 상처”를 보았다는 증언으로부터 나온 반응입니다. 도마는 당시 로마사회와 유대인사회에서 박해당하고 힘겹게 지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상처가 있는지 , 과연 하나님도 우리처럼 눈물을 흘리시며 고통과 아픔의 흔적이 있는지 꼭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을 대표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26절) <여드레가 지나서> 이른바 다음 주일이 되어서, 여전히 <문들이 닫혔는데> 똑같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평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콕 도마를 짚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겪은 이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고, 하나님께도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상처가 없다면, 만약 하나님께 고통과 아픔의 흔적이 없다면, 만약 하나님께 눈물흘린 자국이 없다면, 그 하나님은 상처와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눈물이 터져나오는 삶을 사는 평범한 이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전능하고 선하기만 한 분이라면 그 분은 로마 황제의 하나님은 될 수 있고, 대제사장의 하나님은 될 수 있지만, 결코 도마와 같은 박해당하고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결국 끝내 하나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28절)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상처를 가진 하나님은, 충분히 도마의 하나님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상처를 가진 하나님은, 충분히 도마의 주님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은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너의 편이 되어줄테니, 앞으로 너의 삶은 복되고 행복하기만 할꺼야!>이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은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고, 고통과 죽음을 통과하셨으며, 죽음의 상처를 지니고 계신 분이야!>라고 선포합니다. 무엇보다도 무언가 잘못된 것만 같은, 불의하고 악한 무리들만 승승장구하고, 정의가 짓밟히며, 선한 사람들이 행복한 꼴을 못보는 것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위치>에서 그 모든 잘못과 불의를 방관하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치>에서 함께 고통을 겪어내는 분이라고 기독교는 말합니다. 무척 자주 인용되는 예화 중 하나가 엘리위젤 목격담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화입니다. 몰래 스파이짓을 하다가 잡힌 소년이 교수대에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몸무게가 무척 가벼운 그는 쉽게 죽지도 않은채로 오랫동안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엘리 위젤은 “하나님은 어디계시는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 그의 내면 가운데 깊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교수대에 매달려계신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교수대에 매달린 그 소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소년에게 충분히 보상을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바로 부활절의 약속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분명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이후에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세상의 종말에 온 피조물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재판관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며, 죽음당하신 예수님이며, 죽음의 흔적을 지니고 계신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그 날에 재판관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교수대에 매달린 그 소년의 죽음을 충분히 보상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고, 정의롭게 살고, 올바르게 살다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절규, 절망, 아픔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부활절이 올 때마다 세월호가 아른거립니다. 2014년 4월, 처음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던 제가 마주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입니다.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사회적인 참사입니다. 똑같은 죽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죽음에 비해 억울함과 안타까움의 농도만큼은 매우 짙은 죽음입니다. 마지막날 예수님께서 재판관이 되신다면 분명 그 억울함, 그 안타까움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충분히 보상하실 것이라 희망합니다. 그 분 또한 죽음의 흔적을 손과 옆구리에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판에 앞서 모든 이들에게 <손과 옆구리>의 죽음의 흔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망의 흔적에 근거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보상하실 것입니다. 손해를 입었던 의인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삶에 비해 혜택을 누리며 군림했던 악인들은 충분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이와 같은 질문을 직면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이 세상은 왜 이럴까?”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내 인생이 왜 이럴까?”

하지만 저는 이 질문을 살짝 바꿔서 생각해볼 것 같습니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마저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기초로 다시 질문하고 생각해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평탄하지 않았다면 앞으로의 삶 또한 평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에 애환이 많았다면 앞으로의 삶 또한 애환이 많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는 축복입니다. 고통의 흔적을 지닌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흔적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지를 계시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하고 곱씹었던 시기는 바로 <포로기>라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가 멸망하고, 민족이 흩어져야만 하는 역사적으로 마주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은 바로 십자가라는 고통의 보좌에 앉아계십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고통이 없이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의 흔적이 있는 이들만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고통의 흔적이 있는 이들만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대망하게 됩니다. 평탄하게 잘먹고 잘사는 지배계층에게는 부활이 사변적인 논리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은 이유가 바로 너무 잘 먹고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부활을 믿어서는 안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특별히 혹여나 자신도 십자가에 처형당할까 싶어서 유대인들을 피해 문을 닫고 모여있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부활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려주신 그 사건이, 바로 그들에게도 일어나기를 절실히 믿었습니다.

부활, 그 날에 온전한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정의와 공평은 하수같이 흐를 것입니다. 의인은 보상받을 것이며, 악인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처참하고 억울한 죽음을 겪었던 이들은 사망에서 일어나 생명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그 보좌에 앉아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부활을 희망하십니까? 

앞으로 우리 삶에서 겪는 모든 나날들이, 우리를 빚어내어, <손과 옆구리>에 죽음의 흔적을 지니신 그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일들이, 따라서 부활을 믿고, 희망하게 되는 일들이, 우리 생애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