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선교단체에서 여름수련회를 갔던 때의 기억입니다. 당시 제가 선교단체의 캠퍼스 대표였습니다. 서른 명 조금 넘게 갔었는데, 이전의 수련회보다는 다소 적은 규모였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수련회를 앞둔 캠퍼스의 분위기는 <최대한 많이 데리고 가자>였습니다. 더 나아가 신입생들, 특별히 예수를 안믿는 친구들도 대다수 끌어모아 수련회를 가려고 했던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먼저는 인적구성 대부분이 4학년이었습니다. 새로운 멤버들이 많이 들어와봤자 관리가 안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4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조금 탄탄하게 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니 한 해는 쉬어가자고 했습니다. 덕분에 여타 수련회에 비해 당시 수련회의 분위기는 매우 느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우 가족같은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보통 수련회에 신입생들이 많이 참여하다보면 수련회 전체가 <업무>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챙겨야 할 사람도 많았고, 나름 알게 모르게 생긴 규율들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멤버가 서로 알고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기에 같이 있는게 <업무>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식사당번이니 자리 맡는 당번이니 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원래 하던 그 사람이 가서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자리를 맡았습니다. 하나하나 짜임새있게 구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수련회에서 마주하는 간간히 쉬는 시간에는 매우 느슨한 분위기가 벌어졌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없었고, 딱히 선을 넘지 않는다면 서로 주고 받는 농담과 장난에도 다들 관대했습니다. 타 캠퍼스에 다니고 있던 4살 어린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저와 대화를 하고 싶다며 숙소로 찾아와서는 30분 정도 광경을 살피더니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긴 완전 천국 같은데요?” 자기네 숙소에는 남자와 여자가 따로 모여 얘기하고, 다들 신입생들 교육하는 빡빡한 분위기라는 겁니다. 식사당번, 설거지 당번 등등이 정해져있어서 갑갑하다는 겁니다.
천국. 여러분은 천국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저 세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갈릴리에 살던 예수가 선포했던 천국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신앙고백의 대상인 그리스도 <예수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형과 오빠, 그리고 저의 동생 정도의 나이로 실제 1세기 당시의 살았던 예수란 한 인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짐승의 나라>가 아닌 <사람의 나라>를 꿈꿨던 예수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지금껏 반복되어 온 인류의 역사들과는 전혀 다른 역사, 짐승들이 활약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세상을 꿈꾼 예수. 오늘로 말하면 어떻게든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기 위해 미쳐 돌아가는 이런 유의 세상이 아니라 일상, 이른바 노동, 우정, 사랑, 가족과 같은 매우 인간적인 가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 세상을 꿈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진정으로 선포한 <사람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리가 마태복음을 살펴볼 때에 다룬 본문으로 넘어가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당시에 한 일은 <가르치시는 일>과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과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가지는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일입니다. 바로 <사람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마태복음에서의 용어를 빌리자면 <천국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먼저 예수라는 존재는 (24절)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끌어당겼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라는 한 사람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고쳤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과, 그들이 회복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포합니다. 좀 더 의역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이 있습니다! 가슴에도 가난이 젖어든 사람들이여,
복이 있습니다! 삶이 고통스러워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여,
복이 있습니다! 땅을 빼앗길 정도로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여,
복이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살며 고통받는 사람들이여.
예수님은 총 8번에 걸쳐 복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중 네 번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국한됩니다. 전혀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대선캠페인으로 따지자면 전혀 어떤 후보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여론조사에는 표기되지 않는 사람들, 또한 정치적 영향력도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제 당신들의 세상이 올 것입니다!”라고 부르짖는 외침과 유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선언은 바로 예수라는 한 청년이 전혀 희망없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구호입니다. 뿐만 아니라 희망없는 사람들과 함께 모인 이곳에 하나님의 복이 충만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나라>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짐승의 나라>에서 배제된 사람, 쓸모없던 사람, 전혀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이 바로 <사람의 나라>에서는 환영받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사람의 나라>의 새로운 백성으로 부름받습니다.
지난 교회에서 사역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들끼리 매 학기가 시작되면 <성서마당>이란 이름으로 성경공부를 오픈했습니다. 아마 제가 지난 교회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성경을 펼쳐놓고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으면 배우는 것도 많았고, 깨닫는 것도 많았고, 보람도 많았습니다. 그때 당시 공부를 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세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70세를 넘으신 세 분의 할머니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세 분 다 은퇴권사님으로 기억합니다.
70살이 넘은 할머니와 성경공부를 한다면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큰 고민이 없이 제가 공부해서 가르치고자 했던 책들을 충실히 읽고, 요약해서 차근차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공부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묘한 일치감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지속될수록 어른들의 질문이 날카로웠습니다. 약간은 삐딱하고 비평적으로 바라보는 저의 강의를 잘 이해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느낀 묘한 감정은, 바로 어른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감정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서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하면서 느꼈던 감정입니다. 저는 책을 열심히 공부해서 바울의 삶에 대해서, 바울의 고민에 대해서, 바울의 외침에 대해서 천천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의 질문 대다수가 이와 같았습니다. “아 그거 내가 지금껏 살면서 깨달은 건데 홍전도사가 공부해보니까 그거 진짜 성경에 있다고?”
저는 책을 뒤적거리고 성경구절을 분석하며 <머리>로 이해한 <바울의 가르침>을 말했지만, 어른들은 이미 삶의 애환과 고비고비마다 기도하면서 깨달은 <바울의 가르침>을 <삶>으로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후로 <성서마당>을 준비하는 태도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공부한 것을 가르치는 시간>으로 인식했다면, 이제는 <내가 공부한 것을 확인받는 시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어른들은 오랜 인생을 살아내면서 깨달은 바를 <삶>으로 체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히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일종의 <엘리트 의식>이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점차 <엘리트 의식>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기독교 가르침은 배운 자가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운대에 살고 있는 부유층이 잘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삶의 애환을 갖고 있는 분들, 50년째 소아마비 자식을 키워내던 은퇴권사님, 남편을 후두암으로 잃고 딸마저도 후두암에 걸린채 신음하던 어머니뻘 되시는 집사님, 이른바 삶으로 고통의 폭풍우와 부딪히며 사는 분들이 배운 것은 없어도 기독교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기독교 가르침은 머리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과 삶으로 체득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목사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어 능력이나 책을 읽고 이해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공부 잘하는 목사님들이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반면 누가 봐도 공부를 못하고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목사님들이 기독교 복음을 명쾌하게 꿰뚫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예수가 꿈꾼 <사람의 나라> 또한 이 원리에 기초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라는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사람의 나라>로부터 외면받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탁월한 종교지식을 토대로 예수를 배척했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절박한 필요 때문에 예수께 나아왔던 귀신들린 사람들, 온갖 질병에 시들린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역설이 바로 <사람의 나라>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가 외치는 <사람의 나라>의 원리를 알 수 있는 기도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자주 외는 <주기도문>입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본의를 알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문맥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6장 초반부는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금식을 은밀하게 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 경건한 모습을 남에게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경건한 삶을 살라는 내용입니다.
<주기도문>은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는 단락 속에 속해있습니다. (5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7절) 굳이 많은 내용을 덧붙여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골방에서, 매우 단순하게 기도할 것을 명령하면서 가르치신 기도의 지향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핵심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10절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사람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과 원칙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즉 주기도문은 <사람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기도해야 할 유일한 기도제목이 있다면 <짐승의 나라>가 끝나고 <사람의 나라>가 도래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더 재밌는 것은 <사람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 전에 선결조건이 있다는 점입니다.
(12절)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사람의 나라가 오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이미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던 사람들을 용서한 바탕에서 드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죄를 지었던 사람에 대한 용서>는, 적어도 이 기도를 하기 위한 필요요건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에게 죄를 지었던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면 이 기도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14-15절은 이와 같은 사례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사람의 나라>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짐승의 나라>가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반복되는 <짐승의 나라>의 통치, 이른바 제국의 통치를 당하고 있는 이유를 자신들의 <잘못>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짐승의 나라>의 통치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사람의 나라> 이전에 꿈꿨던 것은 바로 <용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그 날을 꿈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그 날에, <짐승의 나라>는 물러갈 것입니다. 그 <용서>를 기다리던 백성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잘못을 행했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풀 것>을 말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가 꿈꾸던 <사람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애초에 로마제국을 대체할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로마황제가 있던 자리, 아니 적어도 대왕 헤롯이나 총독 빌라도가 있던 자리에도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던 이스라엘의 독립, 회복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정녕 관심이 있는 것은 바로 로마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 새로운 <사람의 나라>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꿈꾼 <사람의 나라>는 하늘의 뜻을 온전히 반영하는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의도적으로 <사람의 나라>라 말하지 않고 <하늘 나라>, 즉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천국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바로 예수에게 모여들었던 희망없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숫자가 10명 남짓의 숫자이든, 아니면 100여명 남짓의 숫자이든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3요소 중에서는 주권에도 관심이 없고, 영토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백성>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에게 몰려든 모든 희망없는 사람들이 바로 <백성>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그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먼저 실천한 것은 <용서>였습니다.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을 실제적으로 <용서>해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늘나라, 천국의 백성이 되는데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세리도, 창녀도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는데는 정상의 여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상에서는 비정상이나 다름없었던 귀신들린 사람과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교회 및 선교단체를 관찰하다보면, 혹은 목사를 비롯한 사역자들을 관찰하다보면 뜨악 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목적>은 고결한데, 고결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저열한 <수단>이 동원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신천지의 경우에는 거짓말을 통해 전도를 실천하는데 이를 두고 <모략>이라 치장합니다. 그들이 꿈꾸는 전도가 아무리 고결하다 한들 저열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 교회나 선교단체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좋은 목적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동원되는 수단이 뜨악할 때가 왕왕 있습니다.
반면 예수의 <사람의 나라>, <하늘 나라>, <천국>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로마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겠다는 최종 목표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용서>하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고보면 창녀와 세리를 환영하는 이유, 귀신들린 사람과 간질하는 사람과 중풍병자들을 환영하는 이유 또한 그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천국운동은 목적과 수단이 일치된 운동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천국운동은 일종의 점조직 운동과 같았습니다. 실제 삶 속에서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임, 진정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 그들은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실제로 용서한 이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그들을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용서해주셨다면, 이와 같은 천국이 온 세상에 임하도록 하여주십시오!” 작은 한 사람에게서 실천된 용서가 그 다음 사람에게, 그리고 그 다음 사람에게, 그리고 끝내 온 세상에 실천될 날을 예수는 꿈꾸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는 당시 로마제국을 뒤엎을 혁명을 꿈꾸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꿈을 꿨습니다. 그들은 정예부대를 모집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모으며 로마보다 강한 나라를 세울 꿈을 꿨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가장 세상에서 필요없어보이는 이들을 만나 사랑을 실천하고, 그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실천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는 작은 모임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실제 실천하게 만들고, <천국이 오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의 천국운동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천국운동의 본거지입니다. 예수를 잘 믿어서 천국에 갈 사람들이 엉성하게 모여있는 조직이 아니라, 천국에 가면 구현될 가치와 원칙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여기서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 실천이 온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천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이 그리는 천국의 참된 가치는 어떤 가치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한 가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어른들과 젊은이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서로 이해되지 않는 삶의 서사를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년 남성과 여성들 사이에서도 다소 생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점점 세대가 젊어질수록 사람들이 <부족화>되는 경향, 즉 각자의 취향과 성향의 특별함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가면 어른과 젊은이 사이의 구분이 없을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구분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와 서로 사이의 구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이해>해보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바깥의 어른들까지 이해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어른 한 두명은 이해해보십시오. 구체적으로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이해해보십시오. 교회 바깥에 있는 갈등, 분열, 이해할 수 없음이 교회 안에도 있다면 이곳은 천국의 자격, 교회의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의 천국운동은 바로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천국에서 사랑해야 한다면 여기서 먼저 사랑합시다. 천국에서 이해해야 한다면 여기서 먼저 이해합시다. 천국에서 해야 할 일을 여기서 합시다. 그래야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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