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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1-2022

[로마서 강해#1]믿음의 이유는 하나님이시다. (롬1:1-17)

by 홍도사 2022. 4. 24.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일날 부르는 찬양의 멜로디가 마음에 들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다니는 것이 재밌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신앙이 시작된 것입니다. 

신앙이 시작된 후 생각해보니 신기한 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오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신앙을 가진 경우는 매우 특별한 케이스였습니다. 문득 저 자신은 신앙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나 고민해봤습니다. 왜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딱히 답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크게나쁜 짓을 한 적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착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게 신앙을 가질 기회를 주신 것은 아닐까?” 하지만 후일에 신앙생활을 하고 과거를 반추하면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선교원을 다녔습니다. 교회에서 세운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부모님이 사준 성경동화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더듬어보니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온 신앙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되짚어보면 초등학교 시절 지나가다가 구름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걸어다니는 광경을 홀로 지켜본 기억도 있습니다. 또한 중학교 시절에는 미션스쿨에 다니면서 특별관리대상으로 선정(?)되어서 매주 특별한 성경공부를 한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어린 시절 함께 교회다녔던, 하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기억날 것입니다. 왜 그들은 교회를 다니지 않나요? 또한 왜 여러분은 지금껏 교회를 다니시나요?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신앙을 갖고, 신앙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혹자는 중동 사막의 신을 왜 우리 한반도가 섬겨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분명 여호와 하나님은 본래 광야에서 모습을 드러낸 신이며, 오직 유대인들만의 신입니다. 실제 유대인들 대부분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스스로의 민족 내부로 가두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 유대인들은 사실상 자신의 땅을 벗어나 여호와 신앙을 재건하는 기나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사 속에 이어진 하나님의 경험에 대한 온갖 반성과 숙고가 이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신앙은 결국 <유대인>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신앙 대부분은, 언제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유대인들을 위한 일들을 행하실 것이라는 기대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역사한다 한들 오직 유대인과 연관된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아가 이방제국을 정복하고, 오직 유대인들의 편에 서서 유대인들의 왕국을 재건하는 꿈을 꿨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하나님은 철저히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더군다나 1세기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이 오랫동안 고민하면서 세운 <유대인들>의 범주가 있었습니다. 혈통은 정통 유대인,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 여성이 아닌 남자, 병에 걸리거나 귀신에 들리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혜택을 입는 진짜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 때문에 <유대인들>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유대인들>이라는 범주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범주 내에 여성을 포함시켰습니다. 병에 걸린 이를 치유하고, 귀신에 들린 사람에게 귀신을 쫓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범주 내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때 등장한 메시아, 즉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라면,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 유대인들을 통해, 유대인들의 세계 안에서 행하시려고 했던 일이 무엇인지 질문해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위탁받은 부르심을 언급합니다.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스스로 빚을 졌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세계에 있는 온갖 다양한 민족들을 스스로 복음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당시 1세기의 상황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때 당시 대다수의 이방세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유대인들이 믿는 신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과 같은 복음 전도자들이 이방세계에 전도할 때에 가장 기본적인 타겟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여사는 회당에 찾아가서 <우리가 찾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후에는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에 호감을 느낀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표기된 이들) 이방인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복음을 받아드린) 유대인들 일부와 이방인들 일부가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교회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교회가 시작된 요인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거나,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한 동경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쥘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대인들의 색채가 흐려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히려 스스로의 <유대인스러움>이라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갔고, 이방인들 혹은 <유대인>의 정체성이 옅은 유대인들이 교회의 중심세력이 되어갔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로마서의 배경을 따져보면,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 논쟁이라는 큰 사건으로 유대인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로마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과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함께 추방을 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대다수의 교회에서 <유대인> 특유의 색채와 민족성이 옅어지긴 할 것입니다만, 로마교회는 좀 더 이른 시점에 그런 현실을 겪게 됩니다. 대다수의 교회보다 유대인 특유의 색채와 민족성이 옅어진 로마교회에, 바울은 편지를 보내면서 스스로가 <헬라인, 야만인, 지혜있는 자, 어리석은 자>를 위해 복음을 전도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11절) 직접 보고 신령한 은사를 나눠줘야겠지만, 그럴 사정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서 만나지 않고서 교회 안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더욱 탄탄히 세우고자 <로마서>라는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간단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2절)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묻고 따져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1장 이후 바벨탑으로 모든 민족과 언어가 나뉜 사건 이후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씨>를 이을 후손과, 그들이 영원히 거주하게 될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창세기 12장부터 여호수아에 이르기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갖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끝내는 가나안땅을 정복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군사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외교력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인간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행위는 인간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3절에서 4절까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에 근거해 이 땅에 나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부활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최초의 사건으로, 이를 통해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우리가 <공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4절) 부활사건은 결국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바울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는 다음에 등장합니다. (5절)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측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을 따져보면 가능성까지는 있습니다. 조짐은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구약성경은 <유대인> 중심의 구원을 이야기했을 따름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연구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오직 하나님을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규정해왔습니다. 하지만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기존 <유대인>의 범주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창녀도, 세리도, 문둥병자도, 귀신들린 자도, 로마의 백부장도, 가나안 수로보니게 여인도, 사마리아 여인도,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역사가 실제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메시아로 찾아오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방인들이 점차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순종하게 되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헌신하는 일들이 점점 확장되고 있음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 있는 동일한 구도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이방인들이 잘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못나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처럼)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실 것을 <약속>으로 정하셨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지난 교회 고등부를 섬기던 시절 고등부 담당 부장집사님과 여러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부장집사님은 어떤 방식으로 고등부를 좀 더 부흥시킬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고등부 시절 예수님을 접했던 아이들이 앞으로도 신앙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시던 분이었습니다.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당시 부장집사님께서는 오직 <영적 체험>이 돌파구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예배를 많이 경험하게 되면 결국 신앙생활을 끝까지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썩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실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관찰하며 제가 내린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지금껏 꾸준하고 성실하게 해 온 사람들에게 특별한 이유란 없습니다. 또한 갑자기 문득 신앙생활을 그만둔 이들에게 신앙생활을 그만둔 특별한 이유란 없습니다. 물론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영적체험일 수도 있겠고, 제자훈련일 수도 있겠고, 부흥회에서 받은 은혜가 강렬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목사에 대한 실망 혹은 기도응답의 실패 때문에 교회를 떠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잘 정리한 공통된 이유 따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각각의 사례가 제각각 입니다.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여전히 신앙생활을 잘 해나갑니다. 또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신앙생활을 그만둡니다.

따라서 저는 부장집사님께 슬며시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애들한테 추억이라고 많이 쌓게 해주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부장집사님은 그런 저의 반응에 꽤 실망하셨습니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부서를 이끌고나가고 싶은데, 고작 사역을 시작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젊은 전도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초를 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함께 사역을 해나가면서 부장집사님은 어느새 저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신앙이 유지되느냐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인 것 같으니, 언제가는 교회를 떠났다가 후일에 교회로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라도 애들에게 좋은 추억이나 많이 만들어줍시다.” 

실제 당시 3년 정도 사역하면서 거의 20명 정도의 새친구들이 고등부에 방문했었고, 그 중에 6-7명이 교회에 꾸준히 다녔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는 단 1명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상태입니다. 물론 제가 섬기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나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인간은 끝없이 원인을 찾으려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도 원인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셨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연단하신다고 생각하는 이유 또한 <원인>을 애써 찾으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신앙에도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기도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이나 전도사님 때문이거나, 혹은 나를 위해 기도하며 전도했던 친구 때문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욱 심층적으로 따지고 들어간다면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를 신앙인으로 만들 수 있는 독보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이유 중의 이유, 그 원인 중의 원인을 찾는다는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베소서 저자는 이를 두고 <창세 전부터 예정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만들기도 전에 우리가 믿을 것이 정해져있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이 가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무척 신비롭다는 말입니다. 

바울 또한 로마서 초반부에서 하려는 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교회인데, 막상 로마교회에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극히 약화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논쟁> 때문에 예수 믿는 유대인과 예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치열하게 싸웠는데, 그로 말미암아 유대인 전부가 5-6년간 추방을 당했다가 이제 막 돌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방인에 불과한, 헬라인과 야만인이 골고루 섞인 로마교회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바울은 그 이유가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이유가 되신다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하박국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하는 복음의 선포를 읽을 때, 우리는 바울의 의도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은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그의 믿음>입니다. 의인이 악한 세상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의인 스스로가 굳게 붙들고 있는 <의인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꽤 시간이 지난 이후에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 번역본을 보면 <오직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의 믿음>이 <나의 믿음>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박국이 후일에 번역될 때에는 악한 세상 가운데 의인은, <의인이 가진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로마서는 둘 모두를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전체적인 문맥을 토대로 의역한다면, 이는 <오직 의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읽는 것이 가깝습니다. 더 나아가 이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참된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이야기일까요? 현재 로마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해설입니다. 로마교회에서는 전혀 유대인과 상관없는, 쉽게 말하면 전혀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이방의 민족들이 유대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메시아인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사람들, 이른바 헬라인과 야만인들이 현재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고,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과, <약속>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힘껏 주장하고 있습니다.


잠시 우리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교회에 다니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지금껏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우리의 신앙은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이 <신비>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많은 것을 인간적으로 시도하고, 성취하고, 구현하고자 합니다. 교회 운영 또한 <인간적>으로 시도할 때가 무척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지하고 곰곰하게 생각해보면 여전히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 여전히 우리가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들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바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며, <약속>에 스스로의 존재를 철저히 옭아메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신의 약속에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기까지, 하나님이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하나님은 끝까지 자신이 인간과 맺은 약속에 충실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믿게 된 결과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 약속에 대한 끈질긴 태도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전히 교회 다니게 붙들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신비를 기억하십시오. 곱씹으십시오. 무엇보다도 그 신비 가운데 끈질기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