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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고난주간 새벽기도 설교문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화요일

by 홍도사 2022. 4. 12.

마가복음 12:28-37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 화요일은 이른바 <논쟁의 날>이라고 불립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과 전방위적으로 논쟁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승리한 장군의 퍼레이드에 대한 패러디였습니다. 무력으로 승리하고, 무력으로 승리한 것을 자랑하는 메시아를 조롱하는 패러디였습니다. 예수님의 퍼레이드는 평화의 퍼레이드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평화의 퍼레이드를 환영하는 이들은 소수였습니다. 예루살렘 전체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퍼레이드를 패러디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 나귀새끼를 타고, 환호하는 이들이 나뭇가지와 옷거죽을 들고 환영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 예루살렘의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오늘날 21세기에도 주류 정치인이 아닌 비주류 정치인이 정계에 데뷔하게 되면 조소와 비토가 존재합니다. 갈릴리의 한 예언자가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을 때에, 그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능통한 이들은 예수님을 망신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온 우스꽝스러운 퍼레이를 한 것처럼, 그의 존재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고자 마음을 먹었던 사람들이 꽤나 있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네가 뭔데?” 라는 정서가 존재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은 전방위적으로 논쟁을 펼칩니다. 하지만 분명 이는 “네가 뭔데?”라는 정서에 의존한 극히 소모적인 논쟁이었습니다.
첫번째 벌어진 논쟁은 (11:27-33) “예수님의 권위가 무엇인가?”라는 논쟁이었습니다. 논쟁에 한 걸음 들어서기 전에 한 번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로 모든 말을 하셨고,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가 우스꽝스러운 퍼레이드를 펼친 모든 광경 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27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반문합니다. (30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대답하자니 세례 요한을 박해한 이들이 자신들이고, 사람으로부터 왔다고 대답하자니 대중들이 세례 요한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벌어진 논쟁은 (12:13-17) “세금을 누구에게 바칠까?”라는 논쟁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띈 집단입니다. 반면 헤롯당은 로마제국에 빌붙은 권력지향적인 집단입니다. 두 집단은 오늘날로 말하면 우파와 좌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연합하여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동전에 그려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물은 이후에, 이렇게 정리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이는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가이사에게 바치지 말아야 할 것>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반면 헤롯당의 입장에서는 <가이사에게 바쳐야 할 것>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세 번째 벌어진 논쟁은 (12:18-27) 부활에 대한 논쟁입니다. 당시 부활이 없다고 믿었던 제사장 권력을 독점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있다면 벌어질 사회적 혼란을 가정하여 부활이 실제 있냐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 부활을 오해하는 사람들의 질문과도 유사합니다. 만일 부활이 일어난다면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지 않냐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답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살았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부활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세상은 안정될 것입니다. 신실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온전한 평화의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 가지 논쟁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언변에 대해서 놀라게 됩니다. 그의 지혜에 대해서 놀라게 됩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라는 대표되는 권력자들이 함정에 빠트리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손잡고, 혹은 사두개인들이 각자 어려운 난제를 질문했으나 이를 통해 망신주는 것에도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한 수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논쟁은 단순한 지혜와 언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28절)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의 뛰어난 언변과 지혜에 놀라서 추가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말 그대로 기존의 질문과는 다른 질문입니다. 기존의 질문은 망신주기 위해서,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었으나, 이 사람의 질문은 말 그대로 진지한 질문입니다. 본인의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공부의 흔적이 묻어나는 질문입니다. “모든 계명 중의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9절)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예수님은 당시에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쉐마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서기관은 자신이 공부한 바에 의하면 그 말씀이 옳다며 맞받아칩니다. 그런데 맞받아치는 말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서기관의 말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이는 기본적으로 서기관 중 한 사람과 예수님께서 서로 좋은 말을 주고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관찰한다면, 둘의 대화는 서로 어긋나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쉐마의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쉐마의 말씀으로 대답하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동안의 논쟁에서 사람들이 <유일한 주 곧 우리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서려있습니다.
반면 그 말을 들은 서기관 한 사람은 예수님의 형식적인 논리에는 수긍하지만, 예수님이 진정 의미하고 있는 바, 즉 <예수님이 바로 유일한 주 곧 우리 하나님>이라는 진실에는 전혀 가까이 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에만 수긍할 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의 태도와 반응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는 논평을 통해서, 그가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홀대하거나,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지는 않고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할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유일한 주 곧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결국 <논쟁의 날>의 결론을 지을만한 이야기(12:35-37)는 예수님의 독백으로 마무리됩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그리고는 시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이는 돌려서 말했지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논쟁의 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힘껏 논쟁을 펼쳤습니다. 아마도 지켜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조마조마한 상황이 많았을 것입니다. 말 한 마디 실수했다가는 바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릴 수 있는 함정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혹은 말 한 마디 실수했다가는 유월절 명절에 모인 군중들의 비난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지혜롭게 잘 대처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논쟁의 날인 화요일이 끝날 무렵 나름 기분이 좋게 잠에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무척 지혜로우셨어”정도의 생각으로 말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잠에 드셨을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은 모면했지만, 마지막에 논쟁한 지혜로운 서기관 한 사람마저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성전으로 찾아오셔서 성전과 당시의 신앙을 관리감독하고 있는 지도자들과 친히 말을 섞으시면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애써 입증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화요일, 논쟁을 이어간 목적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는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에 씁쓸한 밤을 주무셔야 했을 것입니다.

고난주간,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할 때 가장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한낱 처녀의 몸에 잉태된 아이로 탄생했지만, 유대땅에서도 변두리에 속한 갈릴리에서 자라났지만, 한낱 노가다꾼의 아들로 인생을 사셨지만, 그리고 십자가라는 로마군의 사형제도에 의해 죽음당하셨지만,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으로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마주하신 죽음입니다.
그의 희생은 하나님으로 감내하신 희생입니다.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고난주간 화요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