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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고난주간 새벽기도 설교문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수요일

by 홍도사 2022. 4. 13.

마가복음 14:1-11
 
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2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 수요일, 이 날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종교지도자들의 음모가 시작된 날입니다.

종려주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우스꽝스러운 행진은 다소 문제적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분명 정치적인 반란의 의도를 가진 퍼포먼스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예수라는 존재 자체가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종교지도자들은 갈릴리라는 변두리에 사는 한 예언자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에, 그와 논쟁을 펼치면 충분히 망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종려주일에서부터 화요일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바로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없음을 비판하면서 예수님은 성전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못한다고 애써 주장했습니다. 성전은 결국 로마제국에 의해 함락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특별히 화요일, 그러니까 어제 다루지 못했던 본문 중의 하나인 마가복음 13장은 결국 끝내 성전이 무너지는 참혹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전체제를 감독하고 당시 유대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종교지도자들의 총체적인 부패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살펴봅시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예수님을 깔보았을 것입니다. 한낱 갈릴리라는 변두리 지역에서 등장한 촌뜨기로 생각하고 망신을 주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논쟁을 이어간 끝에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의 함락을 예언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그를 죽일 방도를 구하게 됩니다. 특별히 종려주일에 벌인 예루살렘 성문 입성 퍼포먼스는 다소 반란의 일종으로 볼 여지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4장 1절을 보십시오. “유월절과 무교절”을 앞둔 수요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이른바 성전체제의 감독이 되는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합니다. 다만 그들은 (2절) <민란이 날까> 걱정하며 유월절이라는 명절은 피해야되지 않겠냐고 모략을 꾸밉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따라서 <유월절>이라는 명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누구나 가리지 않고 로마제국을 무찌르고 해방될 날을 상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처치하려다가 유대인들 기저에 있는 반란에 대한 열망과 마주하게 된다면, 정말 예수님께서 남기신 예언처럼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폐허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에게 세 명의 수제자가 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입니다. 후일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우두머리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예수님 곁을 꼭 지켜야하는 세 명의 수제자가 예수님을 끝내 떠나버리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세 명의 수제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누가 있는가? 바로 여성 세 명이 있습니다. 이를통해 마가복음은 겉으로 보이는 세 명의 수제자보다 더욱 예수님을 아끼고 따르던 여성 세 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본문은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 본문과 오늘 본문을 대조해본다면 그 중 한 명이 바로 <값진 향유를 부은 여인>이며, 그녀는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임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예수님과 무척 가까이 있던 인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성 특유의 직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심리적 상태과 고민들을 깊이 이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성전체제를 비판하시고,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하시고, 끝내는 성전체제의 멸망을 예언하신 예수님. 일반적으로 둔한 남성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사역은 예루살렘에서도 꽤나 성공적이다” 정도로 평가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우 직관적으로 예수님을 꿰뚫어보는 그녀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미리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죽음을 예감하시고 있었던 그 때에, 또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을 그 때에, 오직 예수님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방법으로 그에게 <공감>을 시도합니다. 한 사람이 죽게 되면 그의 시체에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고대 사람들은 향유를 온 몸에 바르곤 했습니다. 그녀가 했던 공감의 퍼포먼스는 바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꽤 많은 양이었기에 머리로부터 온 몸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발에 이르기까지 기름이 흘려내렸을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 부은 향유의 가격은 당시 소작농의 10달 월급 정도로 어마어마한 고급향유였으며, 아마도 그녀가 결혼할 때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둔 혼수예비용품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낭비>입니다. 철저한 낭비입니다. (4절) 어떤 사람들은 향유를 허비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소작농의 10달 월급에 맞먹는 값이기에 (5절) 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될 것이지 왜 이런 낭비를 하느냐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두고 (6절)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마어마한 <낭비>를 저지르는 이 여인의 행동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의 <공감>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매우 깊이있는 공감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본인의 죽음을 직감하셨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자신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 의해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성전을 비판한 것, 논쟁에서 승리한 것, 그리고 끝내 성전의 멸망을 예고한 것이 결국 십자가로 향하는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 자체가 매우 <낭비>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과연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하셔야 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이야기는 매우 낭비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척 낭비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말들보다도 매우 선명한 해설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낭비하는 분>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는 분입니다. 누가복음은 탕자의 비유에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잔치까지 베푸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낭비하시는 분입니다.

이 여인은 어마어마하게 값진 향유를 예수님 몸에 부으면서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죽음이며, 그가 사랑하는 인간을 위한 거룩한 낭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본인만큼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신 또한 예수님께 자신의 혼수예비용품을 낭비했습니다. 또한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안다는 늬앙스를 담아, 마치 시체가 된 것인양 예수님의 온 몸에 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외롭게 달리실 수 있는 그의 몸을, 관례대로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길거리에 버려져셔 한낱 짐승들의 먹이로 전락하여 무덤에도 묻힐 가능성이 없을 그의 몸을, 미리 장사지내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짤막한 시간에 그 공감을 주고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8절)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여인의 섬김에 담긴 의미를 예수님만큼은 이해하신다고 공감을 표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인간을 향한 거룩한 낭비를 더욱 곱씹어볼 수 있는 본문이 뒤이어 등장합니다. 바로 가룟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10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는 모든 광경을 지켜본 이후에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밀접하게 접촉합니다. 그는 한낱 몇 푼의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결의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극단적인 대조를 봅니다. 하나님이지만 인간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하는 낭비적인 사랑과, 자신이 모시는 스승이지만 고작 돈 몇푼에 스승을 팔아넘기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 수요일, 우리는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사랑의 크기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신 거룩한 낭비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낭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낭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낭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