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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고난주간 새벽기도 설교문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 목요일

by 홍도사 2022. 4. 14.

마가복음 14:17-25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의 목요일은 흥미로운 사건들이 많습니다. 성찬, 세족, 그리고 겟세마네 기도 이 모든 일이 목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끝내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한 바대로> (14:4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체포된 날입니다. 

그들은 수요일만 하더라도 <유월절>이라는 명절에는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며 오히려 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쉽게 바뀌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 가룟 유다에 의해서 예수님을 쉽게 생포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셨을까요? 네,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가룟 유다에게 팔리고 끝내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사실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대비책을 세우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팔려 넘겨지는 숙명과 같은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바로 성찬과 세족을 통해서입니다.

마가복음이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의 순서를 있는 그대로 따라가보겠습니다. 

  1. 먼저(12-16절) 예수님은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성내에 있는 한 집의 다락방을 골라 거기서 유월절 식사를 하자고 이야기하셨습니다.
  2. 이어서(17-21절) 앉아서 식사를 나누기 전에 여기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을 팔아넘길 것을 예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에 대해 당황해하며 서로가 아니라고 부인하기 바쁩니다.
  3. 이어서 (22절-25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찬>을 거행합니다.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로 떡과 잔을 나눈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4. 예수님은 부활을 예고하고 (27-31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이후 (32-42절), 드디어 가룟 유다가 도착하여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43-50절).

이야기의 흐름대로 짚어보자면 크게 두 개의 주제를 다룬 이야기가 함께 엮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바로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이뤄진 식사입니다. 이는 유월절 식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며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기대하며 나누는 식사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에 의하여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진 이야기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 본문은 <유월절 식사>와 <예수께서 넘겨진 이야기>가 서로 탄탄히 엮여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기본적으로 <양>을 잡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아 집의 문설주마다 그 피를 발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죽음의 천사들은 <어린 양의 피>가 발려진 집 대문을 보고 그 집은 <유월>, 즉 넘어갔습니다. 반면 피가 발려지지 않은 이집트의 집에서는 사람의 장자와 짐승의 장자를 모두 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식사의 기본적인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는 1)죽음으로부터 살아남는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2)어린 양이 대신 희생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3)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언약하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이미지는 예수님의 유월절 식사에도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식사를 통해 <떡>을 나눠주면서 이를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잔>을 나눠주면서 이를 자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피>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 번째 이미지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언약을 맺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피>로 언약을 맺습니다. 물론 이 <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게 될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식사에는 대신 희생당하는 어린 양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어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을 잡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잡히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또한 온 인류를 위하여 대신 희생하는 어린 양입니다. 따라서 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얻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감당하셨으며,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 관계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신 성찬의 이야기. 이 이야기가 가룟 유다에 의해 예수께서 넘겨줌을 당한 이야기와 결부된 의미는 분명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가룟 유다라는 배신자가 등장합니다. 배신자와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은밀한 약속에 의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표층에 불과합니다. 사건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가룟 유다에 의해 예수님께서 팔리는 장면은 매우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그가 없었다 한들 예수님께서는 넘겨지시는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대신 세상 죄를 짐지고 가시는 유월절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망에서 구원을 받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유월절 식사의 이야기를 전해야 할 순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덧붙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가장 늦은 시기에 기록된 요한복음의 저자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큰 의미가 있었던 이야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세족>이야기입니다. 세족은 예수님께서 직접 종이 되어서 발을 씻겨준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유대인들은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꽤 부유한 집안이라면 종을 거느리고 있었고, 종들이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하기 전에, (사실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끌려가기 전에) 직접 종이 되셔서 대야에 물을 담고 허리에는 수건을 메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세족 이야기는 성찬 이야기와 서로 상호보완되는 이야기입니다. 

성찬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친히 떡과 잔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잔으로 오셨습니다. 그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세족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종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종이 되어 발을 씻기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두 이야기는 서로 같은 이야기입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백성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의 신화들 또한 인류의 많은 것을 착취하는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백성들의 먹거리가 되어주셨습니다. 또한 많은 권력자들은 백성들을 종으로 부립니다. 세상의 신화들 또한 인류를 종으로 부리는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백성들의 종이 되어주셨습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지는 광경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을 것을 제안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잡히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예고하신 대로 그는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비극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실패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기도문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을 기억하고, 본 사건을 다시 보십시오. 이는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대로 흘러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 성취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떡과 잔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린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넘겨지신 이야기는, 유월절 애굽에서 양을 잡았던 이야기와 동일합니다. 그가 잡히심으로, 그가 넘겨지심으로,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서 사람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린 이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직접 종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낮은 곳인 사망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가 죽음까지 내려감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한 밥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는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한 종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로 머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령받은 우리들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명령받은 우리들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지극히 이기적이며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이제는 세상을 위한 밥이 되라고, 이제는 세상을 위한 종이 되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