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직 지역교회 외에는 없었다. 혹은 지방에 초청되는 부흥회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인터넷을 서핑하면서, 아주 간단명료한 스마트폰을 조작하면서, 넘치고 넘쳐나는 ‘설교’를 취사선택하여 듣는다. 마치 고등학생 학부모들이 좋은 학원을 서로 추천하고, 족집게 강사들의 정보를 공유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좋은 설교자를, 그리고 좋은 설교들을 서로 공유하며 들으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예전과는 달리 설교자로 복무하는 전도사는 종종 심판대 위로 올라간다. 마치 예레미야와 하나냐가 동시에 심판대 위에서 싸워야했던 것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거짓 사도들과 함께 심판대 위에서 싸워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과 같은 설교홍수시대, 이른바 성경해석학의 홍수시대에 본인은 월터 모벌리의 『예언과 분별』을 심판대 위에 곧잘 불려 올라가는 한 설교자의 입장에서 읽어보려고 한다. 단순히 ‘거짓예언을 어떻게 분별하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바 전달하는 한 설교자로써 ‘거짓된 설교와 어떻게 싸워서 이겨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읽어보려고 한다. 모벌리의 책은 ‘거짓예언을 분별하는 것’을 넘어서, ‘진리를 어떻게 증언하는가?’의 이야기 또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2.
‘분별’하면 흔히 떠오르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예언자 예레미아와 하나냐의 대립 이야기이다. 두 예언자는 제사장들과 백성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이야기를 서로 주장한다. 하나냐는 바빌론이 패배할 것을 예언하고, 예레미아는 바빌론에 다시 잡혀갈 것을 예언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예언이 옳은 예언인가?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분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과연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분별’을 요구하는 본문 속에서 ‘분별’의 열쇠는 찾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단순히 어떤 주장과 어떤 주장의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 투쟁’만으로 본문을 읽어낸다. (그리고 덧붙여서 예레미아서의 성서기자는 예레미아의 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모벌리는 이런 현대 성서학자들의 해석의 흐름에 논박한다. 이런 유의 해석은 본문의 구도 전체를 잘못 이해함에서 온 해석이라며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또한 현대 성서학자들은 본문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읽는다. 하지만 모벌리는 본문 전체가, 아니 본문을 담아내고 있는 예레미아서 전체가 ‘분별’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진리의 예언자 ‘예레미아’가 거짓된 예언자 ‘하나냐’의 거짓 예언으로 인해 반대에 부딪힌다는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벌리의 제언대로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이야기를 읽어보자. 본 이야기는 단순히 ‘누가 진실된 예언자인가?’라는 분별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진실된 예언자가 거짓된 예언자와 상대해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전달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3.
‘분별’로부터 시작해서 ‘거짓된 증언과 맞서서 진리를 증언하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바울의 이야기가 있다. 특별히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고후 2:17)’들과 대립국면에 놓여있다. 그는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고후 2:17)’이라고 주장하지만 시원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고린도교회의 교우들에게 ‘분별의 기준’을 전달해야만 한다. 바울과 거짓된 사도들 사이에서 누가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자인지 분별할 수 있는 ‘분별의 기준’을 전달해야 한다. 또한 이어서 그가 ‘분별의 기준’을 비춰볼 때 정당한 사도임을 증언해야만 한다. 과연 바울은 어떻게 자신이 진실된 사도임을 증언해낼 수 있을까?
모벌리의 이어지는 성서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단순히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신의 진리가 가진 능력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고초 당하고 당혹해하고 핍박하고 맞아 쓰러지는(고후 4:8-10)’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자신이 대적자들과 논쟁을 했을 때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길 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공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약한 존재’임을 증언한다.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모벌리는 이어서 이러한 바울의 독특한 논증을 ‘십자가’라는 틀 안에서 해석해야 할 것을 제안한다. 바울은 진리의 심판대 위에서 자신을 변명할 기회에 오히려 자신의 무능함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지만,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진리를 논증하고 있다는 것이 모벌리의 통찰이다.
그렇다면 모벌리의 관점에 의하면 과연 이 독특한 ‘분별의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립 속에서도 예레미야에게 찾아볼 수 있었고, 동일하게 바울이 대적자를 상대하는 이야기 속에서도 바울에게 찾아볼 수 있었던 ‘(삶의) 진정성’이다. ‘예수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신실함을 다하신 것’이야말로 유일한 분별의 열쇠이다. ‘누가 진리를 증언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누가 예수의 삶인 죽음의 삶을 따르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4.
물론 모벌리는 본 책에서 두 가지의 성서해석만 다루고 있지 않다.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분별의 기준’을 나름 정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별’에 대한 질문은 곧잘 ‘어떻게 진리를 증언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형된다. 그리고는 단 하나의 답으로 귀결된다. 바로 삶에의 진정성. 예수를 따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굳건한 그 걸음. 그것이야말로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이러한 모벌리의 결론에는 나름 몇 가지의 반론이 들어올 수 있다. ‘도덕적 삶으로 진리를 판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있을 테고, 또 한편으로는 마틴 루터 킹이나 존 하워드 요더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예언자적 삶을 살아간 인물에 대한 질문도 있을 테다.
이에 대해서 모벌리는 결론부에서 대답을 제시한다. 먼저 그는 ‘도덕적 삶’이란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임을 논증한다. 사실 성경은 도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바로 후패한 우리의 삶에서 ‘은혜’를 통해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의 후패하고도 추악한 삶을 은혜를 통해 도덕적이고도 건실하게 가꿔나간다. 모벌리는 이러한 성경의 거대한 그림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모벌리는 단순한 ‘도덕적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가꿔가시는 우리 삶에의 진정한 큰 그림을 이야기하고, 거기서 터져 나오는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는 ‘마틴 루터 킹’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훌룡한 흑인 인권을 울부짖는 예언자 소명을 다한 사람이었지만 성스캔들로 인해 삶에 있어서 추악한 행적을 남긴 인물. ‘마틴 루터 킹’의 삶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는 거짓인가? 혹은 진실인가? 이러한 질문 앞에서는 응당 앞에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여와도 간단히 해결된다. ‘마틴 루터 킹’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듬어진 사람인가? 혹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거짓 사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처럼 거짓된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키려 했던 사람인가? 분명 이러한 분별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중점으로 그의 삶을 해석하면 어렴풋이 결론은 나올 수 있다. 모벌리는 그가 말년에 노벨평화상 수상과 더불어 그의 간음행위를 포기했다는 사실과 ‘더 금욕해야 할 필요성을 인지’한 사실을 들어서 그의 삶 전체에 흐르는 ‘일관성’을 잡아낸다. 그리고는 이것이야말로 그의 ‘인종차별에 비폭력으로 맞선 삶’에의 ‘진정성’을 입증해주는 결과라고 말한다. (마치 다윗처럼!)
5.
다시 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설교자’의 입장에서 본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정리하고 싶다. 모벌리의 결론부처럼 우리의 삶은 분명 도덕적이지 않다. 어떤 누군가에 대해서 ‘나는 완벽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완벽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어나갈 적에 우리의 삶에는 ‘삶의 진정성’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샘솟는 ‘삶의 진정성’은 곧 우리 삶에서 진리를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된다.
매주 설교 강단에 오를 때면, 그리고 설교강단에서 내려와 곧잘 본인의 신학과 성서해석과는 전혀 다른 신앙적 편견을 접할 때면, 본인은 항상 ‘심판대’ 위에 올라가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름값에 의하여, 명성에 의하여, 혹은 언변의 능숙함에 의하여 다양한 설교들을 줄 세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진지하게 신학을 연구해나가고, 또 성경을 톺아나가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한 편의 신학도로써의 설교자는 매번 좌절에 빠진다. 단순한 몇 가지 예화에 자지러지는 회중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본인이 읽어나가는 신학서적은 무슨 소용인가라는 좌절에 휩싸인다.
이런 신학도이자 설교자인 본인에게 모벌리의 책은 큰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하나냐라는 거짓 예언자에게 목숨을 걸고 대적했던 예레미아의 결기와, 거짓 사도들의 미혹에 맞서서 자신이 예수를 따르는 삶을 담담하게 증언했던 바울의 결기는, 매번 강단에서 ‘여전히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위대한 용기로 다가온다. 본인의 설교는 다른 스타강사들의 가볍고도 천박한, 하지만 아름다운 수사법과 적절한 예화를 갖춰낸 메시지를 이겨낼 힘이 없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 만큼은 거친 풍파를 이겨내며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다. 바로 그 분께서 은혜를 허락하시기에 말이다. 마치 바울처럼! 그리고 예레미아처럼!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M.Div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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