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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성경 무오성 논쟁 : 성경의 무오성을 선용하기 위하여.

by 홍도사 2016. 12. 3.
성경 무오성 논쟁 : 성경의 무오성을 선용하기 위하여.

[서평] 케빈 벤후저 외 4명, 『성경 무오성 논쟁』 (새물결플러스, 2016)




들어가는 말 : 폭력적인 무오성과 목회적인 무오성 사이에서.

 

저의 정체성은 온전한 신학생이자 온전한 목회자입니다. 온전한 신학생으로 저는 성경본문의 다층성이나, 역사적 오류나, 혹은 기타 표현에 대해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며 성경 본문의 오남용을 유발하는 이들과 힘껏 논쟁하기도 합니다. ‘성경이 언제부터 무오했냐? 원본부터 무오했냐? 개역개정부터 무오했냐?’ 반면 저는 온전한 목회자로 교회 안에서 성경본문 자체가 갖고 있는 전인격적 삶에 대한 권위에 대해서 날마다 부각시킵니다. 성경본문의 권위가 단순한 역사책이나, 소설책으로 전락할 때, 필경 교회에서 선포되는 모든 설교는 힘을 잃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오성은 저의 정체성 혼란을 부추기는 신학적 주제입니다. 때로는 목회현장 안에서 성경본문의 권위를 짓밟고 남용하는 이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을 외치며 따끔하게 훈계하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하지만 때로는 신학교의 현장 아래에서 성경의 무오성아래 본문들이 오남용 되고 있는 현실을 보자면 성경의 무오성이란 단어 자체를 폐기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의 무오성은 목회현장 안에서는 권위를 잃어버렸고, 신학교 현장 안에서는 잘못된 권위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성경의 무오성은 선용되어야 할 신학적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양 극단의 현장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용되고 있습니다. 선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성경 무오성 논쟁에서 케빈 벤후저는 <아우구스티누스적 무오성 : 성경 담론의 경륜 속에서 문학적 의미, 문자적 진리, 문해에 정통한 해석>라는 기고문을 통해 성경의 무오성을 성경을 위해 선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본 서평에서는 크게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케빈 벤후저의 논지를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는 1)성경의 권위를 크게 주장하는 복음주의 안에서 성경의 무오성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냐의 질문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의 무오성이 정말 해로운 것인지, 혹은 이로운 것인지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는 2)성경의 무오성을 통해 주장되는 성경의 진리는 어떤 종류의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를 통해서는 성경 자체의 진리는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고찰해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3)케빈 벤후저의 기고문에 대한 다른 저자들의 비판적 질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논쟁점을 제대로 짚는다면 케빈 벤후저의 입장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1)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복음주의 안에서 해롭지 않을까?

 

복음주의는 성경에 대한 최고 권위(279)’를 확언하는 개신교의 갱신 운동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주의 안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해석이 나뉩니다. ‘믿음과 실천의 영역만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279)’ 무류주의자, ‘성경이 다루는 모든 영역, 즉 역사와 과학을 포함하는 모든 영역에 미치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279)’ 무오주의자로 나뉘는 거죠. 케빈 벤후저의 정리를 따르면 무류주의자는 성경의 권위를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시키는 반면 무오주의자는 이를 무한대로 확대(280)’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 안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 파장을 일으킬까요? ‘성경의 무오성이 가져오는 다양한 폐해를 고려할 때 복음주의는 무오성을 지양하고 무류성을 지향해야하지 않을까요? 재미있게도 케빈 벤후저는 여기서 제임스 패커의 말을 빌려옵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에 관한 그리스도와 사도의 가르침에 수반되는 믿음의 항목으로서 유지되어야(284)’한다는 명제 아래에서 복음주의는 성경의 무오성을 선용해야 한다, 아니 선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케빈 벤후저는 무오주의의 남용이 복음주의 안에서 일으키는 폐해를 충분히 고려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류주의를 취함으로 성경의 권위가 종교적인 문제 안으로 국한되는 것에도 이의를 표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정통한 무오성(well-versed inerrancy)을 통해 성경의 무오성을 선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2)성경이 가리키는 진리는 어떤 종류의 것일까?

 

케빈 벤후저는 복음주의 안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선용하는 방법으로 정통한 무오성(well-versed inerrancy)을 제시하는데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란 도구 자체가 무오하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진리 전체가 무오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데요. 과연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진리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는 물음을 먼저 해봐야합니다.

 

이를테면 칼 헨리는 성경에 있는 대부분의 문장은 역사적인 주장이나 그런 주장에 대한 설명(300)’이라 설명하며 성경의 진리 자체를 명제로 축소시키는 우를 범합니다. 말 그대로 진리를 명제라는 종류에 가둬버리게 되면 결국 각각의 문장을 단어들이 어떻게 세상을 지시하고 묘사하는지에 대한 전형적인 실례로 간주(293)’하는 지나친 문자주의적 해석(293)’으로 전락할 위험이 가득하다는거죠. 이를 두고 케빈 벤후저는 언어의 핵심 역할은 사람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301)’이라며 성경의 언어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정보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담론의 차원으로 이해할 것을 권합니다.

 

따라서 성경언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받는 명제 차원에서만 다룰 것이 아니라, 담론의 차원에서 이뤄지는 저자의 의사소통 의도(307)’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이를 위해서는 문단 전체, 여러 문단 혹은 이야기 전체(309)’를 통전적으로 읽어내는 기술과 이야기와 역사, 직간접적 교훈, 격언과 은유로 표현(313)’된 진리를 분별하기 위한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정보를 전달하기보다는 다른 목적들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한다(312).’

 

이를 정리하면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진리는 단순한 정보전달 차원의 명제가 아닌.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드러나는 성경의 언약적 진리입니다. 더 나아가 정통한 무오성(well-versed inerrancy)이 의미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성경 자체의 가르침인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드러나는 성경의 언약적 진리에 대한 (전인격적인)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3)케빈 벤후저의 입장과 논평 사이에서.

 

지금까지의 케빈 벤후저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성경이 전달하는 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난 언약적 진리입니다. 말 그대로 종국에는 참된 것으로 드러날(303)’ 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성경의 무오성은 언약적 진리에 대해 전인격적 우선권을 부여하자는 실용적 태도입니다. 단순히 성경의 자구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치밀하고 꼼꼼하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진리를 우리 삶의 중심축으로 잡자는 말이죠.

 

하지만 이런 케빈 벤후저의 치밀하고도 따스한 입장에 대해서도 다양한 반론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케빈 벤후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만일 성경에서 진리와 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가 당혹스러워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본에 오류가 있거나, 번역자가 그 의미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거나, 혹은 나 자신이 이해하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329)’는 주장을 따라서 성경난제 해석에 있어서 유보적이고도 목회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인용하는 것을 두고 마이클 버드와 피터 엔즈는 (오역이 종종 있었던) 라틴어 성경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가 어떻게 오늘날에도 유효하냐고 묻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케빈 벤후저가 종족학살본문(신명기 20:16-17)을 성경의 구속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해석한 것을 두고 피터 엔즈는 야웨의 행위가 어떻게 고대 부족적 사고 방식과 유사한가(346)’ 묻는 것이 난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합니다. 마이클 버드는 케빈 벤후저의 해석을 두고 과장법이나 기교뿐만 아니라 성경진술의 역사성을 모두를 주장하는 벤후저에게 과장법이나 기교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이 기사가 비역사적인 사건이 되느냐(351)’고 묻기도 합니다.

 

케빈 벤후저는 이러한 이의제기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할까요? 아마도 그가 재반론을 할 기회가 있었다면 목회적인 입장에서, 성경의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자신은 성경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선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부족적 사고도 마찬가지고, ‘성경진술의 역사성또한 목회적인 입장과, 성경의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선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케빈 벤후저의 성경 무오성에 대한 입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성경을 꼼꼼히 해석해서 진리에 이르기까지 노력하되, 이를 위해서는 모든지 선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지혜(287)’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굳건한 신념이 케빈 벤후저의 기저에는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케빈 벤후저에게는 성경의 역사성도, 본문의 다층성도, 난해한 본문의 구성도 어쩌면 부차적인 것에 다름없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로 생명을 주는 지혜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날 언약적 진리니까 말입니다!

 

나가는 말 : 성경의 무오성을 선용하기.

 

케빈 벤후저는 선용론자입니다. 성경의 무오성이 가진 폐해도 있지만 그럼에도 선용할 여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죠. 애써 다루진 못했지만 시카고선언서에 대한 그의 입장 또한 일단은 선용해보자는 입장입니다. 어쩌면 그는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을 닮았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범죄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율법은 문제가 없다! 인간이 문제다!’라고 일갈하듯이, 그는 성경의 무오성에는 문제가 없다! 인간이 문제다!’라며 일갈합니다.

 

다만 우리가 명심할 것은 그는 성경의 진리 자체가 문학적’, ‘문자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문해를 충실히 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은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를 문학적, 문자적 장벽 속에다 꽁꽁 감춰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성경을 괄시하고 경시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생명을 주는 지혜를 선사하지 않고, 성경을 존중하고 그 진리를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지혜를 마음껏 선사하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어쩌면 성경의 무오성은 생명에 이르는 지혜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성경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문득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견지했던 칼 바르트의 언설이 기억나네요.

 

신학자는 성서적 증인들보다 천문학, 지리학, 동물학, 심리학, 생리학 등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학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성서적 증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 마치 자신의 동료인 것처럼 말을 건다거나, 마음에 안 들면 감히 그들을 회피할 수도 있는 어떤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마치 학생인 것처럼 선의로 혹은 싫증 내면서 어깨너머로 보며, 그들의 공책을 수정하고 그들에게 상중하의 점수를 줄 권한을 가진 어떤 사명을 지닌 선생님은 더욱 아니다. (중략) 신학은 좋든 싫든 이 문서들, 성서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칼 바르트, 신준호 역,개신교신학입문, 서울: 복있는 사람, 2014. 38-40.)’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M.Div 

학생과 전도사의 경계, 부산과 대구의 경계, 보수적 기독교와 진보적 기독교의 경계, 

인문학과 신학의 경계 사이에서 양자와 서로 대화하며, 갈팡질팡 방황하는 한 평범한 청년 전도사이자 경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