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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바울과 선물 : 새 관점과 옛 관점의 논의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by 홍도사 2020. 2. 14.

*본 서평은 <바울과 선물>의 중요부분을 발췌독한 결과입니다.

본 책의 주요목표는 새 관점과 옛 관점의 대치상황에서 두 진영의 해석전통을 (조화시키는 것이 아닌) ‘재형성(951)’하는데 있습니다.
새 관점과 옛 관점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옛 관점은 종교개혁 당시 주로 루터신학이 해석했던 유대교의 모습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던 유대교와, 그에 맞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기독교의 대립 속에서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려던 전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새 관점은 샌더스 교수의 ‘언약적 율법주의’ 이후로 만들어진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그에 따른 ‘바울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샌더스는 제 2성전기 문헌을 바탕으로 유대교에도 ‘은혜’가 선행했음을 주장합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던 생각이 틀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후로 제임스 던은 유대교의 편협한 민족주의에 맞서 있다는 전제 하에서 ‘바울의 복음’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후 옛 관점 이해에 터하고 있는 진영은 샌더스가 읽었던 제 2성전기 문헌 속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을 찾아내서 제시하며 ‘새 관점’의 주장이 편협한 해석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반면 새관점 이해에 터하고 있는 진영은 유대교의 민족주의 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을 가로지르는 언약사상을 기초로 ‘바울의 복음’을 다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은혜'의 개념은 모두 동일한 개념일까?

저자는 ‘은혜’라는 개념이 동일하냐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그동안 바울신학의 해석자들이나, 제 2성전기 시대의 유대인이나, 바울이나, 모두 동일한 개념으로 ‘은혜’를 정의하고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어서 그는 은혜(다른 번역어로는 ‘선물’)의 다양한 개념의 층위를 제안합니다. (예컨데 간혹 어떤 단어의 특정개념을 극단으로 몰고가면 다른 개념은 들어설 수 없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이른바 6가지의 층위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바울복음의 해석사를 뒤적거리며 각각의 저자들이 다른 층위에서 ‘은혜’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구절절 해설합니다.

 

이어서 묻습니다.

 

“그러면 샌더스 교수가 읽었던 제 2성전기 문헌은 어떨까?”

 

당연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자는 서로 다른 5개의 제 2성전기 문헌 속에서 ‘은혜’의 개념을 각각 추적해나가면서, 동시대의 유대인들조차도 서로 다른 ‘은혜’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석해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묻습니다.

 

‘샌더스 교수의 새 관점이 여전히 의미있을까요?’

 

물론 이 질문은 조금 방향을 바꿔도 됩니다.

 

‘샌더스 교수의 새 관점은 틀렸고 옛 관점이 옳다고 말하는 주장이 여전히 의미있을까요?’

 

 

바울은 '은혜'라는 단어를 '비상응성'의 개념으로 극대화시켜 사용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복음’을 각기 다른 6개의 개념 층위 속에서 ‘비상응성’이라는 개념으로 극대화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합니다. ‘비상응성’이란 말은 서로 상응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처참함을 대조시키는 개념입니다. ‘자격 없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죠.

 

*물론 덧붙이길 이런 바울의 사상은 제 2성전기 유대사상 속에서 매우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이 주장한 ‘복음’은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율법과 할례를 사랑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있는 파괴력이 있었다고 덧붙입니다. ‘자격 없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낸 복음은 결국 남성과 여성, 자유인과 종, 유대인과 헬라인의 각각의 지위와 자격을 덧없이 만드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비상응성 은혜에 기초한 복음은 기존 사회와는 전혀 다른 ‘교회’를 만들어낸 원동력이란 것이 저자의 분석입니다.

 

물론 바울의 비상응성 은혜를 선포했던 복음은 교회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미쳤던 영향이 교회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동일하진 않았습니다. 전혀 다른 맥락과 상황에서 새롭게 재해석되어 오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예컨데 ‘바울의 복음’은 교회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건설된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적으로 기능하기도 했고, 신자들의 교만함을 훈계하는 가르침으로 기능하기도 했으며, 자기들의 행위를 구원과 결부시키는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각설하고 저자는 당대의 정황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오히려 현대의 시대 속에서 바울의 복음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말은 옛 관점에 기초한 바울 이해도, 새 관점에 기초한 바울 이해도 당대의 바울을 오해하고 있다는 저자의 평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옛 관점이 강조하던 은혜와 새 관점이 강조하던 교회 사이의 간극.

다시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비상응성의 은혜’, 즉 아무런 자격과 조건이 없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을 통해 전파되어, 그들 고유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초월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의 주장은 옛 관점 진영에 기초한 바울 이해가 붙들고 있었던 ‘자격 없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동시에, 새 관점 진영에 기초한 바울 이해가 계속적으로 강조했던 혈통과 율법 중심의 이스라엘과는 대비되는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즉, '은혜'와 '교회' 사이의 간극, 즉 옛 관점과 새 관점 사이의 간극을 저자는 인과관계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은 (옛관점이 강조해왔던) "자격 없는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새관점이 강조해왔던) 교회라는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