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16년 5월 박영돈 교수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 출간 당시에 작성된 글입니다.
톰 라이트가 그리는 바울을 추적해보자.
라이트 열풍인지 박영돈 열풍인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박영돈 교수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를 구입하고, 또 읽으며, 그에 대한 평을 남기고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접한 결과로는 ‘아직 톰 라이트가 충분히 읽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섣불리 비판을 하기는 꽤 쉬운 일이다. 좌파에 대해서는 우파의 논리를 끌어오고, 우파에 대해서는 좌파의 논리를 끌어오면 된다. 좌파와 우파를 함께 비판하고 싶다면 양비론을 끌어오면 된다. 하지만 적실한 비판을 위해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독해’이다. 그 비판이 날카롭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그 비판 이전의 독해가 얼마나 충실한가라는 질문은 기필코 선행되어야 할 질문이다.
나 또한 박영돈 교수의 칭의론에 대해서 충실한 독해가 되지 않았기에 비판하기가 조금 섣부르다. 하지만 서로 독해가 제대로 안되면서 (대화가 안되는) 논의를 주고받는 것보다는 서로의 충실한 독해를 돕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더 좋은 논의로 가는 지름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톰 라이트의 견해에 조금 가까운 나로서 그에 대한 짧은 글, 내지는 정리된 글을 적는 것이 라이트에게도, 박영돈 교수에게도, 그리고 그 책들을 읽고 결정하는 많은 목회자와 신학도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이렇게 펜을 들었다. (아니 키보드를 들었다.)
톰 라이트는 먼저 박영돈 교수와는 달리 성서학자다. 성서학자라고만 말하기에는 불충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성서를 통해서 1세기 당대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맥락을 추적하는데 자신의 연구역량을 쏟아 부은 학자이다. 단순히 성서의 각 권이 말하는 미시적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주력하기보다는 그가 고민하고 심려를 기울인 방법론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설립 당시의 특정 맥락과 신앙들을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학자다. 그래서 그의 저서 속에는 ‘1세기 유대교’라는 말이 곧잘 등장한다. 또한 구약을 읽을 때조차도 구약 자체의 의미보다는 ‘1세기 유대인들은 어떻게 읽었는가?’라는 전제 아래에서 의미를 추적한다.
그렇기에 그는 성서학자이면서도 일견 교의학자와 흡사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연구속에서 발견되는 신앙고백들과 가르침은 1세기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가르침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 가르치며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성서학자의 길을 가면서도 교의학자와 비슷한 운명을 지니는 독특한 한 사람이 된다.
실제 신약성서의 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는 바로 바울서신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지만) 전통적으로는 바울서신을 올바로 독해하는 것은 결국 기독교 정통 교리를 독해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톰 라이트와 박영돈 교수가 대결하는 지점인 ‘칭의’에 있어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그의 바울 신학을 추적해보려고 한다. 바울 신학에 대한 주저서도 있겠지만 존 파이퍼와의 논쟁을 촉발한 그의 대중서적인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가 적실할 것 같아서 그 책의 많은 부분을 요약 발췌해 보았다. 함께 톰 라이트가 추적한 바울을 한 번 추적해보자.
바울은 어떤 배경 위에서 해석해야 하는가?
톰 라이트는 바울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존의 해석 전통들의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선택한 대화 상대자들은 총 5명이다. 1)슈바이처, 2)불트만, 3)데이비스, 4)케제만, 5)센더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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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슈바이처를 알아보자. 슈바이처는 바울을 유대인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덧붙여서 바울 사상을 묵시적 유대교의 배경에서 해석함을 통해 바울 사상의 중심이 ‘이신칭의’가 아님을 말했다. 더 나아가 그에게 있어서 바울사상의 핵심은 ‘그리스도 신비주의’였다. 라이트는 슈바이처의 주장인 ‘유대인으로의 바울’을 계승한다. 또한 ‘묵시적 유대교를 배경’으로 바울 사상을 해석하는 것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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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불트만이다. 불트만은 종교개혁 당시의 루터사상인 ‘이신칭의’를 실존적으로 가장 말끔하게 해석해낸 학자다. (그에게 있어서 바울은 헬레니즘에 터한 반-유대교적 사상가이다.) 라이트는 불트만의 깔끔하고도 완벽한 솜씨에 감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에 비해서) 바울 해석의 출발점을 잘못 잡은 해석이며, 배경을 잘못 잡은 해석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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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데이비스다. 데이비스는 바울을 ‘나사렛 예수가 유대교의 메시아라고 믿었던 유대교의 랍비’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지금까지의 ‘유대교 폄하’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이 어쨌건 라이트는 데이비스 이후로는 바울을 유대교라는 맥락 위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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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케제만이다. 그는 바울을 묵시적 유대교 위에서 해석함과 동시에 불트만의 ‘반-유대교적 사상’ (엄밀히 따지자면 율법주의와 종교적 오만을 공격하는 칭의신학)을 고스란히 계승한 학자다. 그가 보는 바울 사상의 중심은 ‘악의 권세와 반역적인 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이다. 더 나아가 그는 당대 유대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내부로부터의 비판’이라며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라이트는 이 모든 케제만의 유산을 계승한다. (물론 많은 견해에는 상당 부분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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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샌더스다. 일반적으로 바울사상을 해석하는 전통에 있어서 유대교는 펠라기우스 사상과 동일시되었다. 하지만 샌더스 이후로 당대의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더스는 기존의 주장인 ‘이신칭의’를 토대로 바울을 해석했다. 라이트는 ‘언약적 율법주의’로 규정한 샌더스의 주장만 고스란히 계승한다.
이처럼 라이트는 크게 다섯 명의 학자와의 굵고 짧은 대화를 통해 바울사상을 읽어낼 기초 작업을 한다. 먼저는 바울은 헬레니스트가 아닌 유대적 사상가란 사실이며, 다음은 바울사상의 핵심을 치밀한 주해를 통해 다시 밝혀내는 작업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덧붙여서 이러한 그의 밑그림 위에서의 작업은 ‘뜨겁고도 얄팍한 해석’들을 능가할 것이며, 궁극으로는 바울을 올바로 해석하는 방식일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바울은 어디에서부터 어디를 향해 회심했는가?
라이트는 바울의 회심을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이전의 많은 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이다. 도대체 바울이 어디로부터 ‘회심’해서, 어디를 향해 살아가는지가 그의 주된 관심이다. 그가 보기에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서 강경한 샴마이 학파 소속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우익에 가깝다.) 샴마이 학파는 토라의 명령을 개인적으로 순종하는 수준을 넘어선 이들이다. 토라를 읽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이방세계와의 전면적 전투였으며, 자신의 민족 내의 모든 가라지들(토라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라 해석했다. 따라서 회심하기 전의 바울은 이방세계와의 전면적 전투를 준비하는 동시에, 자민족 안에 있는 가라지들(이를테면 그리스도인들)을 솎아내는 ‘열심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라이트의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의 장점은 바울의 회심을 ‘종교’를 넘어서 ‘정치’의 문제를 포괄하는데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또한 왜 그의 신앙이 그리스도인을 잡는 사회적 폭력행위까지 결부되는지 말끔하게 해석하게 한다. (만약 이전의 해석처럼 바울이 토라에 개인적으로 순종하는 선한 사람이었다면 왜 그가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두었을까? 분명 해석이 안되는 지점이다.) 그는 (당대 여타 다른 유대인들처럼) 성전의 재건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회복을 바라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전의 파괴와 땅의 강탈은 결국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민족적 죄악으로 기인한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의 (이방세계와의 전투와 동시에 자민족 내의 가라지들을 솎아내는) ‘열심’은 그 모든 민족적 죄악을 속죄하는데 까지 나아간다고 보았다.
이런 강경한 샴마이 학파 소속의 열심히 충만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다. 그가 만난 예수는 (신적 체험의 일종으로의) 하나님이신 예수라기보다는, 성경의 예언대로 성취된 부활한 (패역한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새-이스라엘로의) 예수다. 그는 부활한 예수로부터 성경의 예언이 정점(Climax)를 찍는 것을 경험했다. 죄와 사망의 세력이 비로소 패배한 것을 보았고,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이 개입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예수는 (죄와 사망의 세력의 억압으로부터) 부활한 이스라엘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인간을 향해 언약을 신실히 지키신’ 분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 안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왕위에 즉위하셨고 이방민족들을 부르시는 것을 보았다. 이제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은 성전의 파괴와 땅의 강탈을 야기한 민족적 죄악을 위해 ‘열심’을 부리는 (다메섹 이전의) 바울이 아닌, ‘인간을 향해 언약을 신실히 지키셔서’ 시온에 왕으로 도래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더 나아가 이방민족을 왕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데 있어서 ‘열심’을 다하는 (다메섹 이후의) 왕의 전령인 바울로 회심하였다.
바울사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울사상의 핵심은 무엇일까? 더 엄밀히 나누자면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전한 것은 무엇일까? 전통적 견해인 ‘이신칭의’를 전했을까?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거저주시는) 이신칭의의 교리였을까?
아니다, 라이트가 생각하는 바울 사상의 핵심은 ‘왕이 되신 하나님’이다. 일반적으로 ‘신’으로 해석되는 ‘그리스도’는 예수가 신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메시아’라는 의미로, 왕이 되신 예수를 해설하는 단어이다. 예수의 오심은 곧 (성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오심인 동시에, 예수의 왕되심은 곧 하나님의 왕되심이다. 예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는 실상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죄와 사망과 권세들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며, 모든 우주적 세력에 대한 승리를 이룩하신 예수께서 왕이 되셨다는 종말론적 선포이며, 유일신이신 야웨 하나님께서 왕이 되셨다는 선포이다. 따라서 이는 이방인에게, 유대인에게 각각 고유의 의미로 재해석되면서 선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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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가 보기에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핵심은 유일신 야웨 하나님이다.
(불트만을 비롯한 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복음은 철저히 유대적이었다. 헬라적 다신론에 물든 그들에게 바울의 복음은 아주 간명했다. ‘신은 유일하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이다!’는 것이 복음의 주장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전하는 것은 그들의 다신론을 파훼했다. 더 나아가 세상이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을 파훼했다. 창조와 언약이라는 유대사상은 그들에게 피조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제국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진정한 현실을 지배하고 계시는 주(퀴리오스)이시며, 구원자(소테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당대의 현존하는 모든 철학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강력한 능력이 바로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신 유일신 야웨 하나님’의 (유대적) 복음의 힘이라는 것이 바로 라이트의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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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향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또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구약에서 지속적으로 증언되는 사실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1세기 사회의 맥락은 포로기 그 자체였으며, 애굽의 압제 하에 놓여있는 현실과 다름없었다. 그들에게는 해방이, 출애굽이 필요했다. 물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정치적 해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적 해방보다 더 큰 우주적 해방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의 탄탄한 주해를 따라가다 보면 로마서의 맥락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해명이 종국에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결론 맺어진다는 사실에 탄복하게 된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은 기존의 폐기된 이스라엘로부터 (해방되어), 예수 안에서 새롭게 형성된 새-이스라엘(교회)로 지어진다.
이처럼 ‘왕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선포는 결국 이방인과 유대인을 막론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이 복음을 듣는 모든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안에서 (은밀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는다. 온 세계는 지금까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세상의 권세자들을 숭배하고, 세상의 가치들을 숭배해왔다. 하지만 이제 왕이 되신 하나님으로 예수에 대한 복음을 듣는 자들은 기존의 삶에서 돌이킬 수밖에 없다. 기존의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랑과 용서의 공동체에 편입된다. 또한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참 인간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이며, 하나님이 드디어 왕이 되셨기에 (인간인) 우리가 능히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럼 이신칭의는?
여기서 재기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이신칭의는?’이란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신칭의는 바울사상의 핵심 아닌 핵심으로 기능해왔다. 하지만 라이트의 지금까지 논지를 따르자면 이방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또 유대인에게 중요한 것 또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 언약에 대해 신실한 하나님께서 비로소 언약에 대해 신실하게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종합하자면 결국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왕이 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본문에 기록된 ‘이신칭의’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사상의 거대한 핵심주제인 ‘하나님의 왕되심’은 결국 새-이스라엘인 교회를 향한다. 그리고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상관없이 모두 새-이스라엘인 교회로 부름 받아 그 공동체에 편입된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을 택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인 동시에, 예수를 통해 새롭게, 또한 폭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구원행위다. 이러한 맥락에서 ‘칭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이트에 따르면 ‘칭의’는 무시간적인 구원행위라기보다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이 오셔서 왕이 되시고 악의 세력이 패배하는 시점에 일어나는 ‘종말론적 행위’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악의 세력이 패배하는 그 시점에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칭의’이다. (샌더스의 예시를 들자면 1세기 유대교는 ‘칭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 애를 썼다.)
이러한 칭의의 개념을 거대한 언약적 구속사에 대입시키자면 (종말에 일어나는 질문인)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라는 질문이 결국 칭의를 묻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라이트의 치밀한 논증을 따라가면 바울서신에서의 칭의는 결국 ‘이방인들도 (율법과 할례가 아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질문은 (라이트의 논증을 따르면) 종말론적으로 입증되어야하고, 종말에서야 밝혀질 질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예수로 말미암아 앞당겨서 환히 드러난 종말의 현재 속에서) 밝혀지고 현실이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율법과 할례를 뒤로 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총 아래에서) 믿음이 생겼다면, 징표인 믿음를 통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주장할 수 있다. 이는 개혁주의에서 흔히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아닌,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아 받는 구원’의 결과로 주어지는 ‘믿음’의 도식을 오히려 더 간단하고 선명하게 이해시켜준다. 기존 이신칭의의 구도라면 믿음은 율법과 대비되는 ‘구원의 방도’였지만, 라이트가 독해한 바울 사상 아래에서의 믿음은 ‘율법과 할례’라는 민족적 표지와 대비되는 ‘참 아브라함 자손’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라이트가 그려내는 예수와 바울.
사실 기존의 전통적 교의들은 성서학의 질문에 대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해내질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신앙고백적으로’ 답변을 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재기된 성서학적 질문은 바울과 예수 사이의 지난한 괴리를 짚어낸다. 종교사학파들은 바울이 예수를 오해 내지는 오도하게 만든 헬레니즘 사상가라고 힐난한다. 예수의 메시지는 유대의 메시지였을지라도, 바울의 메시지는 헬레니즘의 메시지란 것이 그들의 요지다. 또 때로는 (어의없게도) 바울의 신학적 도식이 이교적 제의에서 따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라이트가 그려낸 그림은 예수와 바울의 독특한 위치를 분명히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위치 사이를 잇는 교량을 멋지게 만들어낸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바울은 ‘예수를 엄밀하게, 그리고 예술적으로 계승한’ 탁월한 후계자에 가깝다.
그의 해설을 살짝 참조해보자. 예수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소망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님 야훼께서 심판자이자 구원자로 시온으로 돌아오시고 그곳에 충만히 거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악의 세력을 패망시키는 것이었다. 이른바 새로운 출애굽이며, 새로운 해방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단회적이며, 역사를 넘어선 초역사적인 사건이다. 그의 십자가를 짊어짐은 부활을 기대한 ‘자기내어줌’이었으며, 이는 결국 종말을 빈무덤으로 끌어오는 구원행위로 마무리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라이트의 의견을 따르자면) 바울이 예수와 동일한 길을 갔다면 그 길을 바른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단회적이고, 유일한 길을 걸은 자였으며, 예수를 통해서 시대가 변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예수의 사도로 살았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파했고, 이방인들에게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전파했다. 궁극적으로는 (예언자들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시온으로 귀환하셨고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각각의 다른 언어로) 전파하고, 그 전파되는 복음의 능력을 신뢰했다.
조금만 덧붙이자면 이러한 복음의 전파과정 속에서의 문제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였고, 이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신칭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아무런 장벽 없이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향해 편입되는 시기,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 바깥에는 자신들이 ‘참 이스라엘’이라 칭하는 다양한 종파들이 상존하던 시기, 그 시기 속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원하는 언약신학을 개괄하고, 그 안에서의 예수가 지니는 구원사적 위치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시대의 도래 속에서 이방인들이 율법과 할례라는 민족적 표지 없이도 능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있다며 해설한다. (이것이 라이트가 말하는 이신칭의의 올바른 독해이다.)
마무리하면서 : 이신칭의의 정확한 독해를 넘어서 복음의 정확한 독해를 향하여
일반적으로 박영돈 교수와 존 파이퍼는 톰 라이트의 칭의신학을 공격하면서 종교개혁 신학의 교의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의 방법론과 라이트의 방법론, 그리고 그들의 노선과 라이트의 노선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단 하나 그들의 맹점 하나만 짚고 넘어가겠다. 라이트는 ‘칭의’를 올바로 독해하기 위해 애를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올바로 독해하기 위해 애를 썼고, 그에 대해서 연구서와 대중서를 발간한 인물이다. (그리고 박영돈 교수가 읽어낸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또한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에 대한 존파이퍼의 비판에 대한 답변이다. 엄밀히 말하면 바울의 복음이라는 거시적 맥락 속에서 칭의를 해설한 영역만을 다시 집필한 대중서다.) 따라서 그의 복음 이해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칭의 이해를 독해하기 이전에, 그의 바울이해를 독해해야만 한다. (사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존 파이퍼에게, 그리고 박영돈에게 물어야 한다. “그들은 라이트의 바울이해를 제대로 독해하고 있는가?” 라고.)
라이트가 책 전반에서 해설하고 있는 바울의 복음을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할 틈이 없다. 예수가 십자가에 메달리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그로 말미암아 왕으로 등극하신 것도, 또한 그 복음을 선포하며 그 결과로 믿음을 심어주신 것도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탁월한 신실하심에 매료되고 감화되며, 예수께서 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한 몸으로 받아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의 신실하심을 따라 올곧게 걸어가는 교회의 구성원으로 부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다. 라이트는 복음을 1세기 유대교 지평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세기 유대교 지평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범주를 나누어서 사회상을 분석함을 통해 우주적 변혁으로의 복음이 끼치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파장까지도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복음의 장엄함과 위대함을 모두 담아냈다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개인구원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죄와 사망의 권세라는 맥락 속에서 (뜬구름 잡는) 구원의 맥락을 읊는 것보다야 훨씬 실재적으로 와닿게끔 말이다.
라이트의 저서에 대한 충분한 독해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본 글을 작성했다. 이유는 단 하나다. 학도의 양심과, 목회자의 양심으로 한 연구서를 충실히 독해하고, 충실히 비판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라이트의 연구방법론이 기존 신학자들의 연구방법론과는 다르기에 처음에는 익숙해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치밀한 그의 연구이기에 충실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 글이 라이트의 바울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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