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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구약

구약의 묵시문학이란 무엇인가?

by 홍도사 2020. 2. 20.

스티븐 L.쿡의  『묵시문학』을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묵시 세계.

성서의 많은 부분을 여행하면서 독자들은 다양한 세계를 만난다. 다양한 세계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세계가 있으니 바로 묵시 세계이다. 계시록, 혹은 다니엘. 광활하고, 모험적이며, 우주의 운명까지도 포괄한다. 다양한 성서의 세계는 묵시의 세계에 비하자면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묵시세계, 그곳은 중립이 없는 곳이다. 하나님의 동맹군과 하나님의 적군은 너무도 간명하게 구분된다. 선과 악의 선명한 전선, 그리고 독자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한다.

 

묵시 세계에 있어서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관심과 목적, 그리고 현재의 경험에 가져올 충격으로 인한 근심이다. 존 콜린스의 경우에는 사해 두루마리의 묵시 속에서 ‘이 시의 저자가 이동하는 공간은 스올과 지고의 천상을 아우르는 우주의 공간’이라며, ‘미래에 있을 환란과 구원’이 그만의 ‘개인적인 경험’안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묵시 세계에 사로잡힌 저자들은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천상과 지상을 오고가며, 광활하고도 드넓은 세계 속에서 주어지는 크나큰 충격에 사로잡힌다.

 

일반적으로 묵시 세계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묵시적 통치는 영적인 전제, 욕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묵시는 우주와 자연환경, 인간, 인간 공동체의 가시적이며 물리적인 회복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현재 상존하는 인간의 역사는 왜곡된 권력이며, 왜곡된 구조이다. 정치, 사회, 경제를 지탱하는 현실세계는 온통 난장판이다. 이런 현실 속에 주어지는 묵시적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 사회 뿐만 아니라 자연과 공간과 시간을 온통 역전시킨다. 즉, 묵시 세계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절정의 개입에 대한 이야기다.

 

묵시사상이란?

‘묵시적’이란 용어는 헬라어 아포칼립테인에서 유래한다. 성서의 묵시세계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드러냄으로 세속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 너머를 지향한다. 따라서 ‘묵시적’이란 용어는 장르로서는 문학작품, 세계관으로서는 종교적 상상력, 사회적 실체로서는 특정한 종류의 (흡사 이단/사이비 집단으로서의) 집단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러한 ‘묵시적’ 집단은 ‘묵시적’ 세계관을 갖고서 ‘묵시적’ 문학작품을 후대에 남겼다. 따라서 묵시사상은 묵시적 공동체의 묵시적 문학작품을 탐구함으로서 알아볼 수 있다.

 

사해 분파에서 기록된 공동체 규율 두루마리에 따르면 당대에 극도의 긴장을 갖고 공존했던 그룹이 있다. 바로 진리의 영과 불의의 영이다. 이러한 윤리적 이원론은 묵시문학 전체에 퍼져있는 묵시사상의 핵심 모티프라고 볼 수 있다. 각자의 영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놓여 있으며, 모든 인간은 어느 쪽이든 한 쪽에 소속되어 있다. 물론 이런 윤리적 이원론은 절대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종국에 악의 세력을 폐퇴시킨다. 어쨌건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 하에 악의 세력은 여전히 현실 세계 속에 상존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이러한 영적 세계들 속에서 천사 혹은 또 다른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을 힘입어서 하늘과 땅을 연결 짓는다. 이를테면 빛의 제후는 인간이 진리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도록 돕고, 어둠의 천사는 인간이 불의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치열한 영적존재들의 대립, 영들의 대립 속에서 인간은 투쟁을 견뎌내야 한다. 그런 현실 속에서 묵시 본문은 하나님의 즉각적 개입을 탄원한다. 이른바 ‘과격한 종말론’의 한 행태다. 역사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날을 종결짓는다. 악은 사라지며 세계는 새롭게 변화된다. 바로 ‘심판’이다. 형벌과 보상이 마련되어 있으며 진리의 영에 사로잡힌 선한 이들은 모두 보상을 하사받는다. 하나님은 물론 온 세상을 (공백 없이) 다스리고 계시다. 허나 특별한 섭리와 신비로운 계획에 한하여 세상은 잠정적으로 선과 악의 치열한 대립 하에 놓여졌다. 하지만 이는 결국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해결된다. 묵시사상은 이러한 그림 속에서 각자의 윤리적 실천을 그려낸다. 몇몇의 공동체는 개방적이고 전도지향적인 반면(오늘날의 개신교처럼), 쿰란의 경우에는 극도의 비밀주의로 이어졌다. 반면 에세네파는 정치적 적대자들과의 실제적 전투를 예비하기도 했다.

 

묵시 본문 길들이기의 위험성. 

일반적으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하늘과 땅, 그리고 역사를 창조하고,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은 상상력 밖에 있다. 특별히 톰 라이트의 경우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책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묵시문학이 우주의 재창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묵시문학은 초역사가 아닌, 역사내적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를테면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 반면 스티븐 쿡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묵시적 교령 춤 운동’과 쿰란의 시를 기반으로 라이트의 이런 견해를 비판한다. 고대의 묵시사상은 최초의 성스러운 시간을 묘사하는 것이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앙은 죽은 자들의 돌아옴과 땅의 진동을 기대한다. 따라서 스티븐 쿡이 보기엔 라이트의 묵시본문 읽기는 ‘영적 그리고 상징주의적 읽기를 통한 묵시 본문 길들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성서의 묵시문학을 난해한 암호라고 이해해왔다. 반면 근대 이성주의에 기반을 둔 성서비평가들은 묵시문학들이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하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과거 속에 있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사항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읽었다. 소위 말하는 ‘역사주의적 읽기’ 내지는 ‘역사화된 예언 읽기’이다. 실제 이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 11:24는 걸프전쟁으로 읽기 보다는 안티우코스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다니엘 11:24는 안티우코스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를 향한 이야기다. 일차적으로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향하고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예언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걸프전쟁으로의 읽기나, 안티우코스로의 읽기나 결국 묵시적 이미지의 구체화라는 함정에 빠져있다. 이들 또한 ‘묵시 본문 길들이기’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묵시문학을 오점이 없고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로서 환원함으로써 읽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상상력을 잃어버린다. 반면 묵시문학에 담겨있는 인간적 한계와 불완전함에 시선을 빼앗기는 이들도 있다. 이들 또한 묵시문학이 담고 있는 풍부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놓쳐버린다. 둘 다 상반된 읽기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묵시문학의 전망을 위배하는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자크 엘륄은 ‘평범한 위로를 얻고자 희망을 내다버리는’ 행위라고 진단한다. 묵시문학은 오늘날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인 희망을 전달한다. 묵시문학의 올바른 읽기는 세속의 보이는 것들로 옭아매어진 우리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진정한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묵시문학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도, 또한 학문적으로 읽는 것도 결국에는 ‘묵시 본문 길들이기’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스티븐 쿡의 비판이다.

 

묵시 본문 바르게 읽기.

묵시문학은 문자주의, 역사주의로 읽을 수 없다. 오히려 묵시문학은 그 고유의 ‘문자적 의미’를 찾는 치밀한 작업을 통해서만 살아날 수 있다. 먼저 유념해야 할 사실은 묵시적 환상이 결국 성서이상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에스겔, 바울, 요한은 결국 이스라엘의 거룩한 문헌을 공부하던 학생들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을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결국 성서의 네러티브적 전제를 습득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이사야 11:12, 35:10, 40:11, 43:5, 52:12, 60:4, 예레미아 38:10, 에스겔 11:17, 스가랴 2:10에 대한 칠십인역 헬라어 본문들을 머금고 있다. 이는 결국 마지막날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집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묘사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휴거’는 일반적인 우리의 오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인 하나님의 행하실 재결합, 위로, 모임의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성서의 묵시사상은 신화적 모티프를 함유하고 있다. 실제 성서적 전승들은 신화적 주제와 네러티브에 지속적으로 의존했다. 성서의 전승들은 선한 동기를 갖고 신화를 스스로에게 흡수했다. 허나 묵시사상은 그 자체로 신화가 아니며, 신화적 원형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그뿐이 아니다. 성서의 묵시본문은 결국 자기 시대의 반영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묵시본문은 오히려 자기 시대의 현실을 열어젖혀서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의 숨겨진 차원을 보게 만든다. (따라서 묵시본문은 과거의 역사화이자, 미래 전체를 향한 근원적 계시이다.) 이를테면 다니엘 7장은 마카베오 시대를 넘어 세계의 종말을 향하고 있다.

이러한 묵시문학에 대한 바른 읽기는 결국 구원에 대한 급진적인 비전으로 이어진다. 전 지구적 인간 사회, 전 세계의 생태계, 더군다나 시공간적 존재 모두를 향한 구원 말이다. 이는 결국 현실 세계에 상존하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동시에, 악의 현실 속에 울부짖는 우리들을 향한 해방으로 작용된다. 묵시가 아니고서 성도들은 짐승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묵시가 아니고서 성도들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따를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이 순교를 지향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명하다. 바로 그 묵시가 우리의 궁극적 해방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