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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관하여

by 홍도사 2022. 4. 12.

신학적인 논증은 결국 <자료><방법론>의 조합이다. 자료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하느냐에 따라서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방법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독창적인 신학적 논증은 이전까지 쓰지 않았던 <자료>의 범주를 설정하는 것과, 이전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방법론>을 소환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신학공부 2-3년차에 나는, 스스로 <결국 신학은 말장난이구나>라는 결론에 이른 적도 있었다.

부활사건에 대한 논증을 보고 있자면 꼭 그런 느낌이 든다. 다들 <전제>가 없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탐구한 결과라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각자 주장하는 논증을 살펴보면 <자료>의 선택을 왜 그렇게 했는지, 또한 <방법론>의 선택을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탐구하다보면 발견하는 것은 곧 연구자의 <전제>. 말 그대로 그의 신앙이다. 그가 <계몽주의적 관점>에 근거하여 성경 내의 부활과 같은 전근대적 기록을 제거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그가 기독교 복음주의 신앙의 전제를 보수하려고 하는지가 어쩌면 부활논쟁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를 차치하고서라도 <부활>이라는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안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몇 가지 사안을 다루지 않고 뭉게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1)조직신학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부활사건>은 역사 속에 일어난 한 가지 사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직신학은 부활사건을 매우 특수한 단회적인 <계시사건>으로 취급한다. 이를테면 몰트만의 경우에는 역사로부터 부활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스 큉의 경우에는 예수의 부활이 초역사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논평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부활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부적절한 질문이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의 기반이 <부활의 역사성>이라는 점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먹였을 때 떡이 5개인지 7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건이 1회였는지 2회였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떡이 실제 증식되는 기적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각자 갖고 온 도시락을 나누면서 기적이 일어났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예수는 생명의 떡>이라는 메시지를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 의미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부활은 다르다. 부활이 없으면 의미만 있을 수가 없다. 부활은 결국 역사 종말의 선취적 사건이며, <역사성>이 답보되어야만 그에 기반한 <희망>이 있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결국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론조사에 비유해볼 수 있다. 선거가 끝난 이후 출구여론조사가 발표된다. 집계가 모두 마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집계완료 후에 일어날 결과를 미리 보여주는 출구여론조사에 근거하여 나름의 희망을 가진다. 여론조사는 결과의 선취와 같다. 마찬가지로 부활사건이 거짓이라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희망할 종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들 적어도 제자들만큼은 부활이라는 역사적 종말의 사건을 미리 “목격했다”고 가정해야한다. 그래야 그 이후의 기독교 신앙의 역사가 해명될 수 있다.

3)<부활사건>의 역사성만큼은 우리가 입증할 수 없지만, <부활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의 역사성은 우리가 입증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를 통해 둘러서 <부활사건>의 역사성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제임스 던의 경우에는 예수의 부활 사건 이후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지>를 다시 전파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의 경우는 다수의 메시아 운동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운동만큼은 사라지지도 않았고, 지도자가 바뀌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샌더스의 경우도 다른 운동에 비해 예수 운동이 지닌 제자들의 부활체험”이 독특하다고 덧붙인다.

실제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크로산의 경우에는 이를 에둘러 해명한다. 그가 보기에는 <부활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하나님 나라의 지속적인 체험으로 말미암아 예수 운동이 계속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즉, <부활사건>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마저도, <부활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의 역사성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부활사건>에 준하는 <하나님 나라의 지속적인 체험>이야말로 사실상 <부활사건>이지 않을까? 아마도 크로산의 논증을 1세기 당시의 예수의 제자들이 본다면 “우리는 그 사건을 부활사건이라 부르기로 했어요!”라고 답할 것 같다.

나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은 변증할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단순히 <믿어야만 할 영역>이라 생각한다. 믿을 수 없다면 단순히 <희망해야 할 영역>이라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살아냈던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믿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치있을 수 있다. 부활했어야 비로소 종말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믿을 수 없다면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을 것이라고 희망해야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삶의 추진력이 가능하다. 그가 부활한 사실이 없다 한들 결국 종말에는 부활을 해야만, 즉 종말에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해야만, 오늘을 사는 의미가 있다.

만약 부활이 있지도 않았고, 부활을 희망하지도 않은채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오늘날 살아내는 삶이 가능은 할까? 가능은 할 것이다.

다만 <자기 취향에 따라 사는 삶>과 크게 다르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역사의 끝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 취향대로 사는 삶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적어도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끝에는 결국 선이 온 세상을 압도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삶이다. <자기 취향>을 극복하고, 종말에 도래할 참된 평화의 세상의 <취향>을 열렬히 수용하는 삶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부활체험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참고로 본 글은 김동건 교수의 <예수:선포와 독특성>을 읽고 이를 토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매우 정리가 잘 된 좋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