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입대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논산훈련소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의 눈엔 <조교>가 멋져보였습니다. 인생에서 한 번 군생활을 한다면 <조교>로 복무를 하는 것이 멋져보였습니다. 고민 끝에 <조교>가 되겠다며 <조교자격심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최종까지 올라갔다가 마지막 관문에서 고비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 가졌던 <조교>에 대한 이미지는 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조치원에 있는 <육군방공학교>로 후반기 교육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육군방공학교>에서도 조교를 발탁한다는 공고가 떨어졌습니다. 인생에서 한 번 군생활을 한다면 조교로 군복무를 하는 꿈을 꿨던 저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조교자격심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테스트와 무수한 면접 끝에 합격하게 되었고 덕분에 저는 <조교> 역할을 하며 군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군생활동안 수행한 <조교>는 참 재밌는 역할이었습니다. 저는 대포를 쏴서 비행기를 맞추는 <대공포>를 가르치는 조교였습니다만, 단 한 번도 비행기를 맞추는 훈련에 참가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군생활 막바지에 실습을 가기 전까지는 비행기를 맞추는 무기가 현장에서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오로지 <이론>에만 빠삭하고, <이론>만 가르치는 일이 저희의 역할이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실전>는 하나도 모른채 <이론>만 무수히 가르치다보니까, 어느새 <이론>에 대해 통달하더라는 겁니다. A4 용지로 50장 가까이 되는 무기와 관련된 발표원고를 싹 다 외워야했는데, 금방 외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오로지 <이론>만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알 필요가 없는 무기의 원리, 구성, 정비에 관해서도 결국 다른 교범을 구해서 분석하고, 정비교관님들을 쫓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가르칠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지식인데도 말입니다!)
군생활을 전역하면서 돌이켜보니 두 가지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방법>입니다. 최대한 쉽고 자세하게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방법, 무엇보다 군부대의 특성을 활용해서 상대의 심리를 쥐락펴락 하면서 지식을 습득시키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제가 가르치던 <무기>에 관한 이론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무기를 빠삭하게 공부하라>는 명령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20개월을 무기만 가르치다보니 어느새 무기의 이론에 대해서는 통달한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배운 것이 있습니다. <최고의 공부는 직접 해보는 것>입니다.
저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읽고 암기하고 문제 푸는 공부에 둔한 사람도, 직접 해보면서, 직접 가르치면서, 직접 부딪히다보니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흔히 잘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입니다.
본 이야기 자체를 심도있게 보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의 독특한 특성 몇 가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노래하면서 요한복음은 시작됩니다. 이 또한 독특한 특성이긴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재밌는 특성이 나옵니다. <예수님=말씀>을 노래하는 요한복음 1장 중간중간에 문득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노래하다가(1-5), 문득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냅니다(6-8). 또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9-14), 다시 세례 요한의 말을 인용합니다(15절).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은 시적인 글, <운문>으로 되어있고 반면에 중간중간에 끼어든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산문>으로 되어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왜 예수님에 대한 노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중간중간에 등장한 것일까?” 이는 요한복음의 매우 독특한 특성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증인의 증언>이라는 형식으로 구성된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 자체가 1세대의 제자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실제 보고 만졌던 이들이 후세대의 제자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는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것 밖에 없는 이들에게 <증언>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 대다수는 <예수님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지만>, 요한복음이라는 신뢰할 수 있는 증인들의 묵직한 무게의 <증언>을 읽어가면서 실제 살아있는 예수님을 <증언>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도마>의 부활 이야기에서 제자 도마는 “직접 보고 만져봐야 믿겠다”고 해서 실제 예수님께서 도마를 <직접 보고 만지는> 상황으로 초청하지만, 이후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하신 말씀도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첫 장은 의도적으로 <세례 요한>이라는 한 명의 매우 믿을만한 증인의 증언과, 예수님이 말씀이라는 노래가 하모니를 이루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들으면서, <내가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믿을만한 증인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게 되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을만한 증인의 증언>이라는 아이디어를 갖고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1절) “사흘 째 되던 날”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라면 1장에 등장하는 날짜와 관련된 단어들을 헤아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29절과 35절 43절에는 <이튿 날>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튿 날>은 다음 날이라는 뜻이고, <사흘째 되던 날>은 다음 다음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날짜를 계산해보면, 창세기 1장을 본딴 요한복음 1장의 시작이 <월요일>이라고 한다면, <가나의 혼인잔치>가 일어난 날은 바로 토요일입니다.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은 쉬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인간은 맘을 놓고 쉴 수 있는 날입니다.
*즉 요한복음은 첫 번째 표적부터, 안식일에 <연회장인 신랑>이 마음을 편히 놓고 푹 쉬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일하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첫 표적부터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안식일>에 능히 일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지금 혼인잔치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감히) 생각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잔치 당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미리 혼인잔치에 필요한 모든 식사와 포도주를 미리 준비해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포도주가 떨어질 경우에 신랑은 나름의 명예에 큰 타격을 받게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마치 <결혼식에 뷔페 먹으러 갔더니 식사가 맛도 없는데다가 부족해서 집에 와서 라면 끓여 먹었다>는 말을 듣는 것과 유사합니다.
따라서 (3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에 그 어떤 누구도 손을 쓸 수가 없고 신랑이 수치를 당하는 경우의 수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 한 사람의 행동을 보십시오. (3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혈통상 어머니이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요한복음 본문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어머니 말씀에 순종했다>고 해석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한 단어를 붙여넣습니다. (4절)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자여>라는 단어는 어머니를 하대하는 호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반면 <여자여>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을 존중해서 붙여드리는 오늘날로 말하면 <사모님> 같은 호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의 어머니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은 것이지 않기 위해서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여자여>라는 단어를 기록합니다. 여기서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는 모자관계가 아닙니다. 육체로 오신 하나님과 그의 정체를 밝히 알고 있는 제자의 관계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봅시다. (4절)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을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제가 신랑입니까? 제가 결혼을 했습니까? 아니잖습니까? 나한테 왜 포도주를 찾으십니까?”라고도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충분히 그런 의미 또한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중의적인 의미를 한꺼풀 더 담아냅니다. “내가 아직 하나님으로 높임받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바로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아직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시진 않은 상태, 즉 십자가에 달리기 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아직은 <십자가>를 지기 전이기에 세상의 모든 권세를 취하지 않으셨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식일에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예수님에게 알리는 <예수의 어머니>는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는 한 명의 증인입니다. 따라서 그는 바로 <증인>으로 <증언>하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5절)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는 단순히 예수님의 말을 듣게 되면 떨어진 포도주를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 않습니다. 안식일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일하시는데,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증언입니다.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겨났던 것처럼, 또한 모든 이들이 보기에 <좋았>던 것처럼,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물을 채우라> 말씀하시니 포도주가 생겨났습니다. 또한 포도주를 밧본 모든 이들이 <좋은> 포도주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 이야기는 단순히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첫 증인으로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전파한 이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한 명의 신뢰할만한 증인인 <예수의 어머니>로 말미암아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증언이 힘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본 이야기는 이렇게 결론납니다. (11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제자들 또한 예수님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믿긴 하였지만, 믿은 바에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고 있었던 신뢰할 수 있는 증인 <예수의 어머니>가 선포한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교회는 약간 규모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덕분에 유아시절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교회학교를 수료하면 신앙을 잘 배울 수 있게끔 돕는 교육과정을 다른 교역자들과 함께 연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제로 하면 좋을까, 더 나아가 어떻게 구성하면 신앙을 잘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았습니다. 우리 자녀에게, 그리고 다음세대에게 어떻게 신앙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무턱대고 뛰어들면 생각보다 많은 자료를 구할 수 있겠지만, 좀 더 근원적인 고민을 해보면 이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한 사람이 신앙을 배우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굳이 따지자면 <성령>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만이 결정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이 생겼을까요?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학습했을까요? 모릅니다. 한 개인의 인생서사를 되짚어보면서 신앙이 풍성해지고 깊어지는데 작동한 다양한 과정들을 되짚어볼 수는 있겠지만,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만한 특별한 <교육방식>을 찾고자 고민해보면 결국에는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제가 내린 결론은 <신앙은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 약간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한 마디를 덧붙여야겠네요. <신앙은 교육과정을 통해 배울 수 없다> 혹은 <신앙은 책을 통해, 학습을 통해 배울 수 없다> 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수동적으로 책상머리에 앉아 교리나 성경말씀을 암송하고 테스트하는 방식이지 않습니다. 한 번 스스로의 인생사를 되짚어보십시오. 부모님을 미워했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고 용서하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 자신을 혐오하고 부정했다가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고 스스로를 용납하면서, 삶의 고난과 굴곡진 인생 가운데 예배하고 눈물흘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면서, 그렇게 인생사와 치열하게 분투하는 가운데 <신앙>은 형성됩니다.
신앙은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의 자리에서 배울 수 없습니다. 신앙을 배우고자 한다면 직접 해보면서 배워야합니다. 삶을 치열하게 살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용서해보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을 사랑해보고, 납득할 수 없는 삶의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과정 가운데 신앙은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이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제가 앞서 말했던 조교생활을 통해 배웠던 것과 유사합니다. 직접 해보면서 알게 됩니다. 직접 겪으면서 배웁니다. 직접 부딪히며 형성됩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예수의 어머니>의 자리로 초청합니다. 실제 삶으로 들어와 예수의 하나님되심을 증언하고 그 과정 가운데 예수님의 영광을 맛볼 것을 촉구합니다. 요한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17:21) “아버지여, 아버지도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를 전문용어로 <페리코레시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 된 것 같이 우리도 함께 하나가 되는 광경.
조금 어려운 단어지만 우리는 이를 상당히 유사하게 묘사한 춤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강강수월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각각의 인격을 가진 세 분이지만, 세 분께서 마치 <강강수월래>를 추시는 것 처럼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하나되어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라고 고백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성부, 성자, 성령의 <강강수월래> 안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 되어> 함께 추는 춤으로 초청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멋지게 삼위 하나님과 함께 강강수월래에 발맞추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를 두고 요한복음 17장 3절은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삼위 하나님과 강강수월래를 함께 추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팬더믹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오미크론이 우세종이 되어 기존의 폐쇄적 방역방식을 포기하고 다소 열린 방역방식으로 전환한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코로나 팬더믹 가운데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할 수 밖에 없고 방역지침을 준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다양한 제반활동도 당분간 중단되었습니다. 가끔은 제대로 아는 지식도 없이 분주한 교회에게 경고를 내리는 것이 아니였을까 싶은 생각도 들 정도로 교회는 코로나와 함께 무척 조용해졌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굳이 <교회활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의 어머니>가 했던 증인의 증언 활동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 내의 얼굴이 안보이는 지체에게 안부전화를 해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두 명 혹은 세 명이서 만나 안부를 물을 수도 있습니다. 또 기도제목을 주고 받고 서로 중보해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그동안 모자랐던 부분을 채워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볼 수도 있고요. 짬을 내서 성경을 공부해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가정예배를 세워나가볼 수도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가장 큰 유익을 얻은 인물은 바로 <예수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예수의 하나님되심을 증언했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믿게 되었으며, 또한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증거를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에서 이런 유의 활동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직접 해봐야 알게 됩니다. 직접 해봐야 깨닫게 됩니다. 직접 해봐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과 손을 맞잡고 강강수월래를 추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한 번 고민해보십시오. 또 기도해보십시오.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을 알아가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참여하십시오. 증언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그 분을 배워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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