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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1-2022

[창세기 강해 #5] 믿음의 모험, 사랑의 모험(창 22:1-14)

by 홍도사 2022. 2. 13.

 

어제 지현 자매의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아내와 <연인>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그 날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저 처음에는 대화가 좀 통하는 선배와 후배 사이었습니다. 아니 5-6년째 그런 사이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만나서 대화를 하다가 서로는 서로가 각자 <비혼주의>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때 당시 (30살이었는데) 수많은 연애에 지쳐있었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사랑이 식는 연애, 의무감에 지친 데이트, 무엇보다도 혼자서 살기에도 벅찬 삶에 <결혼>이란 무척 버거워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 또 그런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아내에게, <호르몬>이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화학물질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 날 연인으로 시작할 수 있었고, 당시에는 신대원생이자 전도사였고 대학병원 간호사였던지라 만날 시간이 없었던 우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바쁜 일상과 커리어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전처럼 느슨한 연애를 시작한다면 성격상 서로가 헤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따져보면 그 날 이후로 저희 부부는 일종의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의 학자금 빚은 1500만원이었습니다. 한달에 교회에서 받는 돈은 80만원 가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학기마다 들어가야 할 학자금은 300만원을 상회했고 고작 2학기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응당 집으로부터의 지원은 없었고 가정의 형편도 썩 좋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저를 향해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결혼 직전에 본인이 모아둔 돈으로 제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또한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 가운데 돈이 들만한 영역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포기를 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결혼식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결혼식이 끝났는데 오히려 돈이 많이 남게되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후로 지금껏 6년 가량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매번 서로를 향한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양가 부모님과의 관계, 아내 직장 커리어, 그리고 제 인생의 커리어 또한 매번 서로를 의식하며 결정했습니다. 박사과정을 끝내기 전까지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모험을 감행했고, 양가의 자녀에 대한 요구로부터 강경하게 대응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꽤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를 향한 신뢰가 생겼고, 모험이 성공적이었다는 효능감 때문에 지금에야 <행복>합니다만, 연애 초기와 결혼 초기의 모험들은 매번 위태했습니다. 거절당하고, 상처받고, 실패하고, 뒤쳐질 위험이 항상 존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보기에 <사랑>은 모험입니다. 연애는 모험을 최소화한 사랑 소꿉놀이와 같습니다. (10번의 연애를 실패하더라도 후폭풍이 크지는 않습니다.) 결혼은 상대를 향한 첫 모험의 시작과 같습니다. 앞으로 모험의 여정을 함께 할 동반자를 선택하는 첫 번째 모험입니다. 반복되는 모험 속에 서로를 향한 신뢰는 싹트고, 신뢰가 단단해지면 이전보다 더 큰 모험을 할 수 있으며, 반복되는 모험 가운데 동반자와 나누는 (단단해진) 신뢰의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99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채 버텨왔고 견뎌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뒤집어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75세에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갖추지 못한 아브라함이 성숙되고 영글어지길 24년간이나 기다리셨습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첫 번째 약속인 <씨>, 이른바 아들이 곧 생겨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25년을 기다린 끝에) 아들이 태어나고 적어도 10년 정도는 지난 시점의 한 이야기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비로소 <씨>를 보게된,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된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 의하면 (1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등장하십니다. 

우리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에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생각합니다. 먼저 떠올리는 개념은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에 의하면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유혹의 주체는 악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시험>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유혹>의 개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개념은 <확인>입니다. 이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산성과 염기성을 <확인>하는 일과 같습니다. 자가진단키트나 PCR검사를 통해 코로나를 <확인>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확인>해보시려고 등장하셨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요구입니다. 우리는 앞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 하갈을 씨받이로 삼아 <이스마엘>이라는 한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스마엘을 배제하고 이삭을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지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유일한 자식은 <이삭>밖에 없다는 천명이며, 또한 하나님이 약속한 유일한 자식을 다시끔 하나님께 되돌려줄 수 있겠냐는 엄정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난 설교를 한 번 기억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행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미쉬파트>는 올바른 사법적 판단을 의미합니다. <체다카>는 특정 상대를 향한 신실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를 요구하신 이후에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라는 특정 사건을 아브라함과 공유하시면서, 소돔과 고모라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미쉬파트>에 관해 들여다보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깊숙한 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롯의 가족에게 행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체다카>도 깊숙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미쉬파트>, 판결은 공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체다카>, 각 개인을 향한 신실한 태도는 온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미쉬파트>, 구체적인 결정에 대한 신뢰가 있는 상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체다카>, (아브라함을 향한, 또한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태도에 대한 신뢰가 있는 상태입니다. 고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변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조율하려 하지 않습니다. 거절하거나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가 느낀 바에 따르면, 그가 가까이서 관찰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미쉬파트>와 <체다카>는 믿을만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3절) 묵묵히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들과 종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으로 나아갑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돈을 바치는 문제라면, 그가 가진 소나 양이나 혹은 귀한 특정 물건을 바치는 문제라면 여기서 본문은 훈훈하게 끝날 수 있습니다. 설교 또한 여기서 끝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바치는 것은 이미 (적어도) 청소년 정도가 되어버린 한 아들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단순히 아들을 <객체>로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주체>인 아들을 설득해서 제물로 올려드려야 합니다. 아들 이삭이 거부하고 도망가버린다면 하나님의 명령은 거스를 수 밖에 없게 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먼저 (5절a) 종들을 부자관계에서 떼어놓습니다. 상식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니 종들은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직접적이지 않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아들을 설득합니다. (5절b)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명시적으로 공언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장면이 이어 나옵니다. (6절) 그는 실제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 위한 도구인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아들 이삭에게는 번제 나무를 들게 합니다.

여기서 아들 이삭에게 번제나무를 <지우고>라는 동사가 의미심장합니다. 6절에서는 이삭이 번제 나무를 지게 되지만, 9절에는 똑같은 단어가 반대로 사용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9절에서 <놓고>라는 단어로 번역한 단어가 <지우고>라는 단어와 똑같은 동사입니다. 6절에서는 이삭 위에 번제나무를 놓았지만, 9절에서는 이제 번제나무 위에 이삭을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6절의 묘사는 매우 의도적입니다. 결국 제물이 아들 이삭이라는 사실을 은연 중에 아브라함이 알려준 것입니다.

이삭은 낌새를 눈치챘을까요? 다소 눈치챈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7절) 아버지를 부릅니다. 그리고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있는지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설득합니다. (8절)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는 5절에서 종들 앞에 공언한 바와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며 결국 이삭은 살아 함께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 미묘한 긴장관계를 증폭시키는 문장이 있습니다. (7절) “내가 여기 있노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1절에 기록된 “내가 여기 있나이다”는 문장과 일치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1절에서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반면 7절에서는 아들 이삭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오늘 본문은 의도적으로 <내가 여기 있노라>의 두 번 반복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요구와 하나님의 요구 사이에서 중간에 끼여버린 존재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요구하셨습니다. 반면 아들은 자신 외의 다른 제물을 요구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모험에 대한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아들 이삭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9절)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아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껏 아브라함이 살아오면서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미쉬파트>는 공정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의 <미쉬파트>도 공정할 것이라 믿으며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가 경험한 하나님의 <체다카>는 공정했기 때문에 오늘 자신의 독자 이삭을 향한 <체다카>도 공정할 것이라 믿으며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처음 아내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을 결정지었을 때에는 <호르몬>이 제 삶을 지배했습니다. 아내의 삶 또한 지배했습니다. 같이 있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고 아내의 모든 면모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사랑이 식는 연애와 달랐습니다. 의무감에 기반한 반복되는 데이트와 달랐습니다. 덕분에 너무 좋았고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가 몰랐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사역과 학교생활을 모두 감당하느라 체력적으로 부담되었습니다. 아내 또한 3교대 간호사생활을 감당하느라 체력적으로 부담되었습니다.

함께 살지만 얼굴을 못보는 날도 생겼습니다. 함께 있지만 체력적으로 고갈되어 예전처럼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시간들도 늘어났습니다. 호르몬은 에너지를 증폭시킵니다. 레드불보다 더욱 강합니다. 하지만 호르몬이 감소하면 예전만큼 에너지도 생기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아내를 위해서 김해에서 남포동도 가고, 또 광안리도 가던 체력이었지만 이제는 집앞에 있는 편의점도 갈 수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체력으로 돌아왔습니다. 양가 부모님과의 관계도 쉽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의 세계에 편입되었다는 듯이 툭툭 치고 들어오는 모든 것이 힘겨웠습니다.

솔직히 결혼 초기에는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나?”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해야 할 의무들은 많아졌습니다. 전혀 단란하지 않았던 저희 가족과 아내의 가족에서 계속 저희를 초청해서 식사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또한 날로 요구가 커져갔습니다. 결국에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의 요구를 거절해야 했고, 부모님과의 관계설정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또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을 수용하는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피곤했습니다. 회의도 커져갔습니다. 왜 이혼을 하게 되는지 이해 간다 싶은 지점도 있었습니다. 결혼 또한 늦게 하는 것이 좋다는 선배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서로를 신뢰하는 모험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연애때 하던 사랑과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의 감정이 생겨납니다. 호르몬에 의해 감정적이고 힘이 솟구치는 사랑이 아닌, 은은하지만 상대를 신뢰하고 의지하며 어떤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내적 용기가 생겨납니다. 이른바 영화 기생충에서 이선균이 날린 명대사 <사랑이라고 봐야지>가 그런 느낌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대다수의 독자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너무하시다는 평가를 하곤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는 큰 믿음>에 대해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표면적으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을 때 내리는 결론은 분명 <하나님의 잔혹함, 매정함>입니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로 각을 뜨고 불로 태우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오해의 다수는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관점에만 매몰되어 읽은 결과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등장하여 아브라함을 <아무런 조건과 자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르신 하나님은 이미 아담과 하와에게 배신을 당한 하나님입니다. 또한 이미 노아에게 배신을 당한 하나님입니다. 쉬운 말로 따지면 자신의 연인과 온전한 사랑을 나누려고 모험을 감행했다가 결국 두 번이나 연속으로 실패한 사랑에 무능한 양반입니다. 두 번이나 사랑에 실패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셨습니다. 도전하셨습니다. 그리고 30-40년동안 기나긴 사랑의 추억을 쌓은 이후 창세기 22장에서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이는 모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는 한 인간을 부르셔서 30-40년동안 쌓아올린 사랑을 확인하시는 방법은 매우 강경하고, 매우 극단적입니다. 이는 아담과 실패한 사랑, 노아와 실패한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에 기인합니다. “너 정말 나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어?”라고 연인을 협박하는 이별의 트라우마에 찌들린 한 인간을 상상해보십시오. 오늘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매우 극단적으로 자신이 허락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거칠게 도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거친 도전에 응답했습니다. 아담이 배신했습니다. 노아가 배신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조건과 자격도 없었던 아브라함은 30-40년간의 추억 끝에 하나님의 거친 도전에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의 트라우마가 극복된 수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잡아 각을 뜨려고 할 때에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급하게 하늘로부터 외칩니다. 그리고 긴급하게 아브라함을 말립니다. (12절)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정녕 하나님께서 갈망하셨던 것은 <아브라함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듣고 난 직후 (13절) “눈을 들어 살펴본즉” 발견한 “수풀에 걸려있는” 어린 양을 발견합니다. 기독교 전통은 수풀에 걸려 있는 어린 양, 결국 끝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대신한 이 어린 양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라 해석해왔습니다. (지나친 해석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향한 사랑의 모험을 감행한 하나님의 최종도착지에 <수풀에 걸린 어린 양>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에게 거절당하시고, 노아에게 거절당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또한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랑의 모험을 하신 하나님께서는, 훗날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은 사랑의 모험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배신당했던 역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재차 구애하셨던 역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이야기는 상호 <모험>을 감행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거절당할 가능성이 충분한 아브라함을 향해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또한 자신의 아들이 끝내 살해당할 가능성이 충분한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이 <모험>은 윈윈으로 귀결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미쉬파트는 언제나 정당합니다. 하나님의 체다카는 언제나 신뢰할만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전에 실패했던 인간과의 사랑을 극복할만한 사랑의 파트너인 아브라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75세에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에게 원했던 믿음을 30-40년 후가 지났을 때에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감행했던 믿음의 모험이 오늘 우리에게도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에게 모험을 감행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자신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모험을 기억합니다. 아담에게 거절당하신 하나님, 노아에게 거절당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마음 또한 얻기 위해서 사랑의 모험을 여전히 감행하십니다. 

신앙이란 교회 다닌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노라 외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읽기와 기도, 혹은 새벽기도와 제자훈련과 같은 프로그램을 수행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향해 사랑의 모험을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는만큼 우리 안에 믿음의 모험을 할 용기가 생겨납니다. 아브라함의 모험과 하나님의 모험이 상호 교차되며 결국 만나는 것처럼, 사랑의 모험을 느끼는 만큼 우리는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고, 믿음의 모험을 감행한만큼 사랑의 모험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은 기나긴 시간 동안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는 거의 없습니다. 또한 제가 권면할 수 있는 바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험과 하나님의 사랑의 모험이 마주 교차한 사건 정도를 기억해볼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 무수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믿음의 모험과 사랑의 모험이 마주하게 될 사건들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사랑의 모험을 감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확인>하시기 위해 찾아오셔서 <믿음의 모험>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때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는 분량만큼, 하나님의 <사랑의 모험>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모험이 마주치는만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더욱 깊어집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에 반복되는 하나님을 향한 모험이, 또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모험이 끝내 성공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