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문/2021-2022

[마가복음 강해] 잘 듣고 잘 말하는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막 7:31-37)

by 홍도사 2022. 2. 13.

여러분은 대통령 선거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벌써 대통령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온통 언론이 시끄럽고 사람들만 만나면 은연 중에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에 대통령에 관한 어떤 책을 읽었습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현재 대통령인 문재인 대통령까지 본인이 겪은 바와 들은 바를 종합해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해야 하는 일에 대한 통찰을 담은 좋은 책이었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좋은 대통령은 <입력>이 잘되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말들을 <들을 줄 아는> 입력이 잘되는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라 말합니다. 더 나아가 책에서 말하는 좋은 대통령은 <출력>이 잘되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바탕으로 좋은 정책적 결정을 하는 대통령이 좋은 대통령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곱씹으며 이는 대통령만이 아니라 저에게도 절실한 조언이라 생각했습니다.

목사에게도 <입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입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더 나아가 저 또한 말하는 직업입니다. 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직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출력>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대통령과 목사만 그럴까요? 모든 사람이 동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제대로 <입력>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반면 제대로 된 <입력>이 되지 않으면 삶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 나아가 <입력>에 기반한 <출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삶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입력>과 <출력>을 (제대로) 잘 할 것을 요구받는 것은 대통령만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귀를 가진 사람이며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입력>과 <출력>이 원활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입력>과 <출력>이 잘될 때에 비로소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먼저 실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의료계의 지식과 기술이 부족하여 장애를 극복할 수 없었던 고대인의 아픔이 묻어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본 이야기는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일종의 은유입니다. <귀먹은 사람들>, 이른바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사람들>, 이른바 옳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야기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나 회복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며 <입력>과 <출력>에 문제가 발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먼저 본문을 따라가보겠습니다. (32절)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 오게 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한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는 귀를 먹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썩 많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TV나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종이도 꽤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수어가 발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에게 예수를 소개할 방법이 있을까요?

썩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사람들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오기로 합니다. 아마 반강제적이었을 겁니다. 설득을 하지 않고 그저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따져보면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참된 능력이 있고 이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들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입력>이 매우 잘 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출력>도 잘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명확하게 판단을 내린 이후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가면 정확하게 고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리고는, 그를 실제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갔습니다. <입력>과 <출력>이 잘되는 이들 덕분에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보통은 그저 <말씀>으로, 그러니까 명령을 통해서 치유하셨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귀먹고 말 더듬는 자>에 한해서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33절)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은 행위와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진 행위는, 이른바 <거룩한 하나님>과 <부정한 인간>이 접촉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함>을 갖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반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는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입출력 기능이 마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그곳에는 <부정함>이 사라집니다. <거룩함>은 <부정함>을 능히 이깁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장면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와 동등한 한 인간으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입니다. 거룩함과 전능함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이지만, 또한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성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해야 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의 탄식은, 한 인간으로 내뱉는 기도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하늘을 향해 중보합니다.

그리고 <에바다>라고 명령하십니다. 망가진 입출력기능이 돌아오길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삶을 꿰뚫어보시고, 우리 입장에서 하늘을 향해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내뱉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이 망가져있을 때에, 우리의 입력 기능 혹은 출력 기능이 망가져있을 때에, 그래서 우리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에, 예수님께서 먼저 하시는 반응은 <탄식>입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안타까워하시며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는 우리 곁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놓고 <탄식>하시며 기도하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두고 탄식하시는 분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마비된 입출력 기능을 회복시키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친히 <거룩한> 하나님으로 우리를 향해 손을 뻗쳐오십니다. 하나님의 손 가운데 담긴 <거룩함>은 우리 안에 <부정함>을 소멸하고 우리를 온전하게 만듭니다. 듣지 못했던 이들이 듣게 됩니다. 말하지 못했던 이들이 말하게 됩니다. 입출력 기능이 마비되었던 이들이 입출력 기능이 회복되는 유일한 원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이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줄 몰라뵈었습니다. 귀가 있지만 제대로 듣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아는 이들조차도 마음의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입이 있지만 제대로 증언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36절) 예수님께서 굳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셨음에도 그들이 널리 전파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과 대면한 이들은 입이 풀린 사람들입니다. 말하지 말라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오직 죽은 이후에만 의미있고 유효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여 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이심을 몰라뵈었던 이들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판단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는 많은 말를 하지만 남을 세워주는 말, 남을 격려하는 말, 옳은 것을 말하는 말,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말에는 서툽니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만 쓸데없는 말이 대부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정함>이 날로 날로 깨끗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귀를 날로 날로 거룩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제보다 내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거룩함은 우리의 입을 날로 날로 거룩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제보다 내일 선하고 아름답고 옳은 말을 잘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아름다운 삶이란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듣고 바르게 말하는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오직 예수님의 거룩함과 접촉할 때 가능한 삶입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사람 간의 거리는 다소 멀어졌지만, 예수님과의 거리는 가까워져서, 올바른 것을 듣고, 올바른 것을 말하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