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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1-2022

[창세기 강해 #4]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해가는 법(창 18:18-19, 22-33)

by 홍도사 2022. 2. 6.

 

저는 21살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소명이 무엇이며, 신학이 무엇이며, 목회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제가 당시에 <잘 몰랐다>는 이유 때문에,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저의 신학교 진학시기를 28살로 늦추셨던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 7년이나 신학교를 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며 저는 많은 질문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은 내가 믿어서 받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믿게 해주셔서 받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십자가의 속죄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성령이 무엇인지 죄를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21살에 신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목회에 필요한 공부>를 중심으로 수업을 들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 간호학을 배우는 것과 간호사가 하는 일이 다른 것처럼, 경영학을 배우는 것과 회사를 경영하는 일이 다른 것처럼, 신학과 목회에 필요한 공부는 겉으로는 무척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을 배우는 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를 배우는 것이 목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21살에 신학교에 갔더라면 대다수의 공부는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28살에 간 신학교에서 저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유는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며, 목회를 잘 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저 자신이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신학교에 진학한 것이 2012년이니 벌써 신학이란 학문을 공부한지도 10년째가 됩니다. 10년동안 많은 책을 읽으며 공부해왔지만 기본적인 동기는 <저 자신을 위함>이었습니다. 머리가 굵어지면 굵어질수록 교회에 다니면서 의문이 많아졌고, 신앙의 기본에 대해 질문이 많아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10년 정도의 공부를 돌이켜보면서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느새 목회를 감당하고, 설교를 하기 시작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저 자신을 위한 공부>가 <남을 위한 공부>로 점점 승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신학을 공부할 때에는 목회를 할 생각도 크지 않았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 배운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7년만에 돌고 돌아 신학교에 왔으니 공부가 하고 싶었고 재밌었습니다. 또한 머리가 굵어지면서 기독교와 신앙에 대해 산적한 고민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공부를 하나하나 해가다보니, 나 자신을 위해 공부를 해나가다보니, 어느새 그 공부가 남을 위한 공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누구보다 방황하고 질문이 많았기 때문에 방황하고 질문이 많은 이들에게 최소한의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이른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이를 오늘날 평균연령에 환산해서 절반으로 톡 잘라버린다고 하더라도 30대 중반의 나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부르신 이유>를 해설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경상도 남자와 같습니다. 일단 같이 가자고 말하는데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해 가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아이를 갖게 해주며 땅까지 준다는 달콤한 속삭임 외에는 <부르신 이유>는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후에 세월이 흘러갑니다. 약 2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반으로 퉁 쳐도 1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12년전의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고등학생이지 않나요? 중학생이나 초등학생이지 않나요? 12년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신 이유를 알지 못한채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아이를 낳게 해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로 아내와 다투다가 여종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낳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 아이가 무효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이제야 약속했던 <아이>를 주시기로 확인도장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지지난 주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아이를 낳을 때가 다 되고 나니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창세기 18장 18절-19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 전체를 끌고가는 핵심 말씀이니 외워두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핵심은 19절입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단어를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로 의역된 문장은 <여호와의 길>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에덴을 지키게 해다>, <아우를 지키게 해다>, <약속을 지키게 하다>에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말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 길을 잘 준수하며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와 공도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와 <체다카>입니다. 예언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이 어구는 <의와 공도> 혹은 <정의와 공평>, <정의와 공의>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하수같이”라는 문장도 바로 이 두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미쉬파트와 체다카>는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두 단어가 지향하는 바는 <분배정의>입니다.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면밀히 따지자면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판결>을 의미하는 미쉬파트가 이뤄지는 세상, 또한 <각각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체다카가 이뤄지는 세상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면밀하게 따지면 정말 깊고 풍성한 의미가 있는 문장입니다. 어린 양과 사자가 뛰어노는 하나님 나라, 어린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는 하나님 나라, 그 나라의 핵심의미가 18장 19절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본문을 조금 넓은 의미에서 보면 좋겠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요구하시는 명령입니다. 75세에 불러 99세까지 약 24년은 있는 그대로 두셨다면 이제 99세부터는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가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본문의 단어와 문장에 매우 심오하고 깊은 의미가 있다는 전제하에 짧은 성경구절 몇 개만을 들여다보는 함정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에는 성경구절 한 두개에게 심오한 깨달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은 몇몇의 구절은 문맥 안에 두며, 문맥은 한 권의 책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한 각권의 책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를 더 면밀하게 보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기본지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8장 19절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길>, <의>, <공도>와 같은 단어는 생각보다 중요해서 히브리어를 통해서 본문의 의미를 들여다보고 또한 다른 본문에서 인용된 사례를 중심으로 19절 자체를 깊게 들여다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는 구절은 문맥 속에서 의미를 획득합니다. 오늘 본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길을 지키고,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을 둘러싼 문맥을 좀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보면 본 구절은 창세기 18장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 18장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절) 아브라함이 날이 뜨거울 때에 장막 문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2절)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그네>입니다. 창세기 본문은 기본적으로 유목민 문화를 배경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집도 한낱 <장막>이죠. 따라서 유목문화에서는 <나그네>들이 환대를 필요로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같은 유목민인겁니다.) 만약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는다면, 즉 집에 데려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광야 여행길 속에서 해를 당할 위험이 농후합니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점은 <영적존재>입니다. 천사라고 하면 좋을까요? 신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무엇이라 봐도 좋습니다. 적어도 창세기 본문에서는 영적존재가 사람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 셋은 영적존재입니다. 실제 본문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세 사람이 아브라함과 대화를 해나가다가 문득 17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해서 사라를 꾸짖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을 수행하는 두 명의 천사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핵심은 영적존재가 하늘의 비밀을 들고 아브라함을 찾아왔는데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환대가 필요한 <나그네>, 아브라함의 도움이 없이는 광야여행길에서 죽을 수도 있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창세기 18장 서두와 유사한 부분이 바로 뒤이어 등장합니다. 창세기 19장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아닌 롯이 등장합니다. 또한 장막이 있는 유목민 문화가 아니라, 성문이 있는 도시문화입니다. 장막 문에 앉아있던 아브라함처럼 (1절)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두 천사가 그들을 방문하는데 (18:22) 아마도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세 명의 나그네 중의 두 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롯도 두 천사를 환대합니다. (2절)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유목민 문화에서 자라온 롯은 소돔이라는 도시문명 안에 살아가면서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무척이나 닮은 두 개의 <나그네 환대 이야기> 사이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보기도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22절-33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보기도 이야기(23절-32절)의 메시지는 <끝까지 간구하라>입니다. 끝까지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쇼부에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며 오늘 본문을 읽습니다. 

하지만 중보기도 이야기의 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본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나그네 환대>이야기와 <롯의 나그네 환대>이야기 사이를 연결짓고 있다는데서 추적해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나그네 환대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아브라함은 세 명의 나그네를 영접합니다. 또한 세 명의 나그네의 정체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를 수행하는 천사로 밝혀졌습니다. 아브라함의 환대 속에서 하나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주며 아브라함에게 우리가 살펴본 <부르심의 이유>를 해설해주셨습니다. 

반면 롯의 나그네 환대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지 않습니다. 롯은 두 천사를 영접합니다. 하지만 유목민 문화가 아닌 도시문명이었던, 또한 타락한 심성의 사람들만 가득했던 소돔은 (4-5절)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물으며 그들에게 물질적인 착취와 성적인 착취를 행하려고 합니다. 그때에 롯은 소돔의 사람들을 말리려하다가 큰 문제가 생길 여지가 발생했고, 두 천사는 기적을 베풀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하되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내리게 됩니다. 똑같은 환대의 이야기지만, 결국 롯의 환대는 소돔 주민의 박대와 대비되었고, 소돔 주민의 박대를 받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 똑같은 <환대 이야기>가 서로 다른 귀결이 된 것을 연결짓는 이야기로 중보기도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18:20)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부르짖음은 <짜아크>라는 히브리어인데 의로 번역된 <쩨다카>라는 히브리어와 닮은 단어입니다. 부르짖음과 의의 히브리어 단어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반되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기에 구약성경에는 의도적으로 함께 쓰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멘! 말씀대로 이뤄질 것입니다!”라고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일종의 시비를 걸었다는 점입니다. (23-24절)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명이 있을지라도 그 성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이런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시비는 수회나 반복됩니다. 50명에서 45명, 45명에서 40명, 그리고 이번에는 통크게 10명씩 깎아서 30명, 20명, 10명. 

더 흥미로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는데는 생각보다 큰 관심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운지> 묻고 있습니다. 즉 애초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보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6번의 반복되는 이의제기를 통해 아브라함은 한 가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고려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18장 19절의 단어를 인용하자면 <공도>로 번역된 미쉬파트, (미쉬파트의 의미 중 하나는 법정에서의 판결인데요.) 이른바 하나님의 <판결>이 정당한 <판결>인지 집요하게 아브라함은 물었습니다. 그리고 6번의 반복되는 문답 끝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정당한 미쉬파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중보기도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중보기도를 일종의 수행과제로 생각합니다. A가 병이 들었는데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 낫고,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A가 병이 들었는데 영적인 B라는 사람이 기도하면 낫고, 영적이지 않은 C라는 사람이 기도하면 낫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다소 <종교적>이며 때로는 다소 <무속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입니다. 좀 과하게 말하자면 A가 병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A는 나을 수도 있고 낫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적 영역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보기도>를 과업처럼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심히 수행한다고 해서 낫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열심히 수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낫지 않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경 곳곳에서 중보기도를 요구하는 구절이 있고, 중보기도를 했다는 구절이 있는 이유는 중보기도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에 있습니다. A가 병에 걸려있을 때에 그 문제는 A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A를 위하여 중보기도할 때에 A와 하나님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A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며, A의 삶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흔적 또한 들여다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정당한지 들여다 볼 기회를 얻습니다.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정당한지 아브라함이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나 다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에게 방문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삶에 직접 보고 만질 수 있게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셔서 대화를 나눈다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6번의 중보기도가 몇 분 정도 걸릴 것 같으십니까? 아마 길어봤자 30분 정도일 것입니다. 더 길게 1시간으로 잡아봅시다. 잡담을 하다가 문득 “아 50명 말고 45명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길어봤자 1시간이 되는 시간 동안 하나님의 행하심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즉,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초청장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자세히, 면밀히,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관찰할 수 있게 만드는 초청장입니다.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라고 하신 것과 유사합니다. 직접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행하심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보기도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 너머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원래 제가 설교에서 풀어내려고 했던 본문이 무엇이었죠? 바로 18장 19절입니다. 

그 의미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좀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18장 19절 이후에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정당한 행하심을 자세히 들여다 볼 특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끝내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고 박대하고 물질적이고 성적으로 수탈하려고 했던 문화의 소돔과 고모라가 끝내는 심판당하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기본적으로 18장 19절은 <소돔과 고모라>로 대표되는 도시문명의 패역함을 본받지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 안에서도 두 천사를 환대했던 롯처럼, 아브라함은 어디에 가던지 어디에 있던지 언제라도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지닐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18장 19절이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지닐 것>을 단순히 명령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함양하는 방법>인 중보기도를 뒤따라오는 본문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행위입니다. 그저 멀찍이 서서 제 3의 관찰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듣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직접 가까이 와서 하나님과 논쟁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정당하심에 의문을 제기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직접 보는 자리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22절부터 33절에 이르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내용이 없이는 19절의 명령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22절부터 33절을 통해 비로소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법>을 배워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이야기를 하고 마칠까 합니다. 

저는 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향한 애틋한 마음, 아끼는 마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은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감성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사람이어서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말을 하기보다는 거칠고 매섭게 맞는 말을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정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만 본다면 목사로 결코 어울리는 사람이지 않습니다. 전도사 사역을 시작할 무렵의 어렵고 바른 말만 하던 저를 보고 한 권사님은 “목사보다는 신학교 교수가 어울린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때는 칭찬인줄 알았지만 어느새 따끔한 경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목사가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하나님께서는 저를 전도사로, 목사로 살게 하시면서,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일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하심으로, 저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다듬어주셨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잘 몰랐던 제가, 목회자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가까이 보면 볼수록 하나님께 매료되게 되고, 하나님께 매료되면 될수록 제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갔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요.)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99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무수한 실패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차근차근 묵상하다보면 99세의 아브라함은 분명 75세의 아브라함보다 조금 더 나아진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갖추기 위해 너를 불렀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의 중심부로 그를 (더 가까이) 초청하십니다. 그의 반론을 받아주시고, 그에게 충분히 설득력있게 대답해나가십니다. 그 과정 가운데 아브라함은 더더욱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함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월 가운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저는 태생적으로 성격이 유순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처럼 태생적으로 성격이 거칠고 모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거칠고 모난 사람들을 다듬는데 전문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중심으로 초청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질문을 받아주시고, 우리의 매서운 비판에 응답해주십니다. 그 과정 가운데 어쩌면 겉으로 바뀌는 것은 다소 적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갖춰갑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아갑시다. 세월 속에서 부단히 살아가며 더 깊이, 더 풍성하게 알아갑시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