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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1-2022

[로마서 강해#2]죄 아래에 있는 자들을 위한 복음 (롬1:18-3:9)

by 홍도사 2022. 5. 1.

오늘날 현대교회에서는 <죄>를 가르치지 않는다. <선과 악에 대한 잣대>가 상대화되었다 등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 전통에 있어서 <죄>가 중요하다는 말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바깥의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죄>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사법적 용어>이며, 일반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신앙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고 싶은 사람들은 <죄>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의 20대 초중반의 신앙적 방황은, <죄>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죄>로부터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요?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혈기왕성한 남성이 성적인 욕망과, 또한 다혈질의 급한 성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정말 쉽지 않아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적인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요셉처럼 사는 것이 표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온유하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표준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대 초중반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열정과는 별개로, 언제나 제 삶은 성적인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고, 다혈질의 급한 성미를 쉽게 표출했습니다. 마치 저는 무척 위선적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저의 나름의 잠정적 해답은 <기도와 성령>이었습니다. 기도를 양적으로 많이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와 더불어 기도 가운데 부어지는 성령을 질적으로 깊이 체험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게도(?) 저는 군대 입대하기 직전에 성령세례라고 할 수 있는 방언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발단은 단순했습니다. 사귀던 여자친구랑 헤어지게 되면서, 저는 그 사건을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생각했고 며칠동안 펑펑 울며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는 가운데 마음의 큰 위로를 얻었고, 홀로 골방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방언이 터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제 삶에서 기도를 하면 할수록 성령을 깊이 체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저는 군대에서 어느 정도 계급이 된 이후로 홀로 교회에 가서 1-2시간씩 기타를 치며 홀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타를 독학했습니다. 기도를 배웠습니다. 성경을 읽어나갔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몇 문장으로 말하니 무척 뜨겁고 은혜롭고 신비했던 경험처럼 보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타를 못쳤기 때문에 가장 쉬운 G코드의 곡 몇 개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고, 기도하다가 잠에 들거나, 지루하게 시간만 보냈던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 과정 가운데 영혼이 정화되고 새롭게 되고 신비해지는 것만 같은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저의 정화된 영혼, 이른바 혈기와 성욕으로부터 다소 해방된 것처럼 보이던 저 또한 결국에는 시험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군대에서 마지막 말년 휴가로 선교단체 수련회에 참가했던 기억입니다. 1만명의 청년들이 집결하는 강원도에서 열리는 수련회. 저는 깊은 은혜와 성령을 깊이 체험할 생각을 갖고 수련회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제 눈앞에 펼쳐진 것은 군대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5000명의 여성 청년들이었습니다. 왜 그때가 여름이었을까요? 눈 앞에 펼쳐지는 자극적인 환경과 마음 속 깊이 올라오는 다양한 생각들, 무엇보다도 기도와 성령을 통해 정화되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기도의 시간들 사이에 저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죄>는 도대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읽을 때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방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저자>의 의도를 찾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저자는 성경기록의 배후에 있는 성령님이 아닌, 실제 저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를 기준으로 한다면 <바울>입니다. 바울이 어떤 의도로 이 단어와 개념을 사용했으며, 바울이 정녕 뜻하려던 바는 무엇일까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경본문을 해석해 왔던 <교회>의 입장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저자의 의도와 별개로 교회는 본문을 해석해 온 역사들이 축적되어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 같은 경우에는 저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지만 교회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뜻하는 본문이라 해석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통용되는 방법은 <내가 지금 읽었을 때에 받는 느낌>에 근거하여 읽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경건생활을 통해 현대인에게 익숙해진 방법입니다. 내가 읽은 본문을 쓴 저자가 어떤 의미를 의도했는지와는 무관하게, 또한 내가 읽은 본문을 해석해 온 교회의 입장이 무엇인지와는 무관하게, 지금 내가 읽고 느낀 바에 의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각자 장단점이 있습니다. 훌륭한 성경해석자는 각각의 방법의 장단점을 간파하며 시의적절하게 활용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세 번째 방법에 치우친 경향을 보입니다. 물론 특정 본문에 한정한다면 그 본문을 인상깊게 설교한 내용을 바탕으로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방법에 근거하여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주제로 넘어옵시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때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맞닥뜨린 이른바 <음욕> 혹은 <혈기>와 같은 나의 실존적인 주제를 <죄>라고 규정하고, 이를 기도와 성령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지난 날을 회상해봅니다. 저는 그때 당시에 <죄>와 관련된 성경본문을 읽고 해석하려는 의도도 없었거니와, 있었다 한들 죄와 관련된 본문에 대해서 첫 번째 저자의 의도를 찾지도 않았고, 두 번째 교회의 해석전통을 찾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의 실존, 느낌, 감정, 기분에만 의존하여 내가 겪고 있는 <음욕> 혹은 <혈기>가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이며, 이는 기도와 성령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은 기본적으로 1절에서 15절까지와, 16절에서 17절까지, 그리고 나머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15절까지는 바울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며 로마교회에 하고 싶은 말을 함축해서 정리해놓았습니다. 반면 1장 나머지는 앞으로 이어질 거대한 논리의 일부분입니다. 16절과 17절은 그 중간에서 브릿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며, 결국 복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짧은 문장은 바울이 편지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의 함축정리의 일부이자, 앞으로 이어질 논리 전체로 나아가는 교두보와 같습니다.

그러면 1장 18절부터 이어지는 문장은 어떤 주제를 담고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죄>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바울의 말을 생각해봅시다. 너무 익숙한 교회언어라서 팍 와닿지 않으면서도 이해되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문장입니다. 이를 구약적인 배경에 견주어 다시 의역하자면 <애굽의 종노릇 하던 사람들을 홍해를 건너 탈출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이어질 내용들은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의 수혜자가 될 사람들이 어떤 맥락에서 <애굽의 종노릇>하고 있었는지를 해설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먼저 1장 18절부터 32절까지는 복음의 수혜자 중의 한 사람인 <헬라인>, 즉 이방인을 겨냥합니다. 이들은 유대인의 하나님인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응당 율법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바르게 살아야 하고 악인을 끝내 처벌받으리라는 사상에 근거한 유대적 문화의 수혜도 입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설명하던 당대의 유행하던 문장을 바울은 고스란히 인용하고 있습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들의 내면의 상태, 실존의 상태, 양심의 상태를 말하기 이전에 이미 눈에 드러난 도덕적 윤리적 수준 자체가 스스로 보기에도 문제적이지 않냐는 당시에 유행하던 이방인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의 눈에 보이는 <문제적 요소>들은 어디로부터 야기되었을까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3절)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긴 그들은 결국 (24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스스로 마음의 정욕과 더러움에 근거하여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일어난 행태는 기본적으로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행태>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오늘날 성정체성의 혼란을 느낀 성소수자에 대한 본문이 아닙니다.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남자와 여자와, 하물며 사람도 가리지 않고 이상성행위를 했던 당시의 이방인 문화에 대한 비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행태”는 결국 “창조목적을 거스르고 살아가는 막무가내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1장 후반부의 내용 핵심을 알 수 있습니다. 1장 후반부는 당시 이방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애굽인 이유, 혹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황제나 혹은 이데올로기가 바로인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했고 그에 <창조주 하나님>은 화답하며 그들을 내버려두셨기 때문에, 즉 <창조주 하나님>의 개입과 은총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개입과 은총이 없이 살아가는 그 상태야말로 애굽이며, 바로의 지배 아래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응당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어떨까요? 이미 율법을 수여받았고, 율법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어떨까요? 아마도 29절에서 31절까지 이방인들 비판하는 문장에 익숙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 답했을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은 다르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고, 우리는 율법이 있다. 우린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이다! 따라서 우리 유대인들은 이방인과는 다르다!” 하지만 바울은 바로 그런 클리셰 같은 반응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2:1)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한다고 말하며 유대인들이야말로 (3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이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문제는 <유대인>이라는 특권에 취해있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 <목사>라는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요? <장로>라는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 <장로>와 같은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이지만, 그 직분 자체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특권>으로 기능하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며, 어린 시절부터 율법에 익숙한 것 자체가 영광이긴 합니다. 할례를 받은 것이 영광이며 자랑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떳떳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13절) “율법을 듣는 자”로만 만족하지 않고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목사>로 치환해봅시다. <목사노릇하는 자>로 만족하지 말고 <목사답게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치환해봅시다. <그리스도인 노릇 하는 자>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유대인>이라면 <유대인>이라는 특권에 취해있는 것을 넘어서 <유대인>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22절)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알면서도 간음을 하고, 우상을 가증히 여기지는 율법에 동의하면서도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며 살아갑니다. 유대인이라는 영광도, 율법이라는 영광도, 할례라는 영광도 결국에는 실제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만드는 것들이 아니라, 한낱 유대인노릇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백성> 흉내내는 것에 만족하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입니다.

따라서 결론부는 3장 9절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그러니까 유대인은 나으냐? 결코 아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1장 후반부에 있었던 이방인들을 향해 비판하던 바울의 입장과 2장 전반에 걸쳐 등장한 유대인들을 향한 비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 다 결코 별반 다르지 않고, 둘 다 결국에는 <죄 아래에 있다>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창조주 하나님만을 온전히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 아래에 있다>는 말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이 말은 율법을 모른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가 아닙니다. 이 말의 핵심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자기 마음의 정욕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높이 숭앙하며, 오직 자기 마음의 정욕만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배제시켜버립니다. 이는 유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에게도, 장로에게도, 응당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보다 우리의 정욕만을 숭앙하는 습관과 행태, 이것이야말로 <죄 아래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인가요? 

복음은 앞에서 1장 16-17절에서 본 바와 같이 <유대인에게와 헬라인 모두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막론하고, 자기 자신을 숭앙하며 살아갑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 생각보다 옳습니다. 내 욕망이 하나님의 요구보다 옳습니다.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합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매우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배하지 않았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우리가 괄시하고 공자왈맹자왈이라고 따분하다고 치부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세상 모든 것보다 더 탁월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근거하면 무척 차원낮은 수준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음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창조되는 사건입니다.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강팍한 마음 가운데 적셔질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피어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한 것처럼, 마치 우리의 죽었던 영혼도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절실합니다. 목사가 된 저에게도 여전히 절실하며, 교회 다닌지 십년은 훌쩍 넘은 우리 모두에게도 절실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에, 여전히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습성이 뿌리 깊게 박힌 우리에게 날마다 절실합니다. 복음이 역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복음이 역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복음이 역사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저의 20대 초반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때 저에게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마치 요셉과 같고 다니엘과 같고 예수님과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흠없고 부족함없고 세상 가운데 모든 유혹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꿈꿨습니다. 음욕을 극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혈기를 극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기도로 무장되어 예수님을 꼭 닮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덕분에 꽤 긴 시간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1-2시간 씩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혹여나 능력을 받아야 할까 싶어서 신령하다고 알려진 목사님들의 집회에 찾아다니며 기도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제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용사>는 결코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수한 실패의 세월이 누적되면서, 비로소 성경에서 발견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다윗의 이야기, 복음서의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성경 전체를 탈탈 털어봤자 <포로기>라는 극한의 시국에 등장하는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신앙인물들은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용사>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들이 겪은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들을 적나라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음욕을 이기지 못한 순간이 있었고, 거짓말을 했던 순간이 있었고, 끝까지 신의를 지키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을 <믿음의 선배의 계보>에 올려두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기도와 성령으로 훈련해서 <믿음의 용사>가 되는 성장 커리큘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복음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여, 마음의 정욕대로 살아가고, 또한 자기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으며 창조주 하나님을 알면서도 경배하지 않는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여, 자기 자신 밖에 모르던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와있는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 또한 그들의 정욕적인 삶에, 그들의 자기집착적인 삶에,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삶에, 끈질기게 개입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드는 이야기, 즉 <복음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Good News, 기쁜 소식입니다. Good이 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Good인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 기저에 깔려있는 <죄>를 직시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을 끈질기게 사랑하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우리의 끈질긴 습성을 직면하십시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끝끝내 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 복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지금까지 우리 삶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베드로의 후패한 삶을 믿음의 선배들로 전환시켰던 하나님의 능력이, 앞으로의 우리 삶에도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