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한창 신앙을 배워가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친구가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힘들다는 겁니다. 삶에 닥친 고난이 무척 힘겹다는 겁니다. 그때 당시 저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욥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구를 위로했습니다. 너의 잘못이 아니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힘들다며 전화가 온 친구에게 욥을 운운하며 위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제가 평소에 욥의 이야기를 자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작 20살의 인생인데 무엇을 안다고 자주 욥을 생각했을까요? 솔직히 지금 보면 웃긴 일입니다. 그때 당시에 저나 제 친구가 겪은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생각보다 학점이 안나오는 문제, 대학생으로 적응하기 힘든 문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진로가 안잡히는 문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이성과 연애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 생각해보면 정말 시덥지 않은 주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와 저는 그런 평범한, 누구나 겪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이라 생각하고 힘겨워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이겨내리라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20살이 된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사춘기와 같은) 성장통에 가까웠습니다.
우리는 대다수 욥기가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업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을 때에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자리를 못잡고 방황할 때에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의 질병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20살 때의 저처럼 어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에 누구나 겪는 성장통을 두고도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유의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은 대다수의 인간들이 겪는 평범한 경험입니다. 10명 중에 1-2명이 운좋게 어려움 없이 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을 모두 겪으며 살아갑니다.
적어도 욥기가 다루는 문제는 10명 중에 8-9명이 겪는 평범한 문제가 아닙니다. 무척 끔찍한 문제입니다. 저는 욥이 겪는 일들을 두고 <고난>이라는 단어보다는 <재앙>이라는 단어가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욥이 겪은 일들을 생각해보십시다. (1:13-19) 도적떼에 의해 종들이 살해당합니다.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종들과 양들이 죽습니다. 바람 때문에 건축물이 무너지면서 자녀들이 모두 죽습니다. 말 그대로 자녀를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하루 만에 잃게 됩니다. (2:7-8)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온 몸에 종기가 납니다. 질그릇 조각으로 긁어야 할만큼 심각한 상태입니다. 말 그대로 생명은 살아있지만, 뼈와 살은 끝없는 고통을 입게 됩니다.
우리 중에 이런 사건을 겪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루 아침에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잃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류의 사람은 100명 중의 1명을 찾기도 힘듭니다. 단순히 몸과 마음의 질병을 떠나서, 정말 생명만 붙어 있고 뼈와 살이 끝없는 고통을 당한다고 할 정도의 심각한 질병, 오늘날로 말하면 생명만은 해하지 않는 끈질긴 불치병을 겪는 사람 또한 100명 중의 1명을 찾기도 힘듭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다. 욥이 겪는 일들에 준하는 재앙을 겪는 사람은 우리 가나안 교회 안에 한 사람 정도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렇다면 욥기가 <재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욥기의 주제는 <재앙의 문제>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지 않는, 매우 극화된, 극적으로 과장된 <재앙>을 통해서 욥기는 (고난의 문제가 아닌) 다른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즉, 정리하자면 욥기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앙>에 준하는 사건을 겪은, 매우 극적으로 과장된 한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고난의 문제가 아닌)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천천히 욥기의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욥을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욥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이는 2장 3절에서 한 번 더 반복됩니다. 욥이라는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께서 두 번에 걸쳐서 그의 자질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온전합니다. 정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악에서 떠나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을 두고 정재환 위임목사님께서, “이 성도님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설교 시간에 말씀하셨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면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한 두 명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아 그 분은 원래 돈이 많잖아. 인생이 잘풀렸잖아. 나처럼 험한 인생을 살았더라면 안그랬을걸?” (사실은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원래 의심이 많고 마음이 삐뚠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탄이 딱 그 역할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6절) “하나님의 아들들” 이른바 영적인 존재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있는 천상회의의 장소입니다. 국회를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이 회의장에 모여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공식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입니다. 그때 사탄이 공식적으로 발언기회를 얻어 묻습니다. “아니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욥과, 욥의 집과, 욥의 모든 소유물을 하나님께서 울타리로 지켜 보호하여 주시고 그의 인생에 충만한 복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에” 욥이 그렇게 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사탄이 보기에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만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욥이 받은 복이 모두 사라진다면, 극단적인 재앙이 욥의 삶에 들이닥친다면, 경외할 “까닭”을 잃어버린 욥은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탄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기의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인간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입니다.
구약성경은 총 39권입니다. 39권 중에서는 역사에 대한 책도 있고, 시에 대한 책도 있습니다. 그 중에 지혜에 대한 책을 크게 세 권을 꼽습니다. 잠언과 전도서와 욥기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전문가인 송제근 박사는 이 세 권을 연령대별로 구분합니다. “청년시절에는 잠언을 배우고, 중년시절에는 욥기를 배우고, 노년에는 전도서를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잠언은 매우 규범적입니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습니다. 악을 행하면 화를 입습니다. 따라서 청년시절에는 잠언이 말하고 있는 규범을 따라 선을 행하는 삶,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중요성을 배워야 합니다. 주일학교에서도, 청년부에서도, 이제 갓 결혼한 저같은 젊은 세대들이 꼭 붙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잠언의 지혜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복이다”는 사실을 매번 배우고 또 익혀야 합니다. 따라서 청년기에는 잠언을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잠언의 가르침에 따라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고, 희생하며, 헌신하면서 살면 진짜 복을 받게 될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복을 받아 날마다 더 잘되고, 하나님을 괄시하고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화를 입어 날마다 망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선을 행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큰 곤경을 입고, 안하무인하며 악을 저지르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운이 좋게 잘되는 광경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청년시절 “하나님을 경외하면, 선을 행하면, 복을 받는다”고 잠언을 배워왔던 사람들은 의문을 느끼게 됩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그 결과가 따라오지 않지?” 그때 우리는 중년이 된 것입니다. 욥기를 배워야 합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 누구보다도 더 최악의 재앙을 마주하는 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잠언의 지혜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욥이 모든 재산을 잃는 광경을 보며, 욥이 건강상 어려움을 겪는 광경을 보며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잠언에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면 복을 받는거 아니야?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화를 입게 되는걸까?” 그때 욥기는 욥기의 주제를 슬그머니 제시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니?”
어린 시절에는 보상이 필요합니다. 보상이 있어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성숙하면 모든 일에 보상을 바라며 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보상이 없다 한들 옳은 일이면 행하고, 보상이 있다 한들 그른 일이면 행하지 않는 이들을 보고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욥기는 (이제는 청년기를 충분히 지난) 성숙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도발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까닭 없이 선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중략)
사실 이런 질문을 매번 반복되는 저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설교를 잘하는만큼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한다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맡은 이들을 사랑하고 기도하는만큼 사람들이 변화하고 성숙한다면 얼마나 재밌을까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목사는 농부와 같습니다. 씨가 언제쯤 싹을 틔울 것인지 조짐조차 보이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눈 앞에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삶이 아니라, 해야하는 일이기에,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목사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에서 선하게 산다고 이득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다들 선을 행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에서 믿음이 깊은만큼 복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다들 믿음을 갖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겪는 현실은 선한 사람의 삶이나 악한 사람의 삶이나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이나 믿음이 얕은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욥이 재앙을 통해 겪은 현실이 바로 이런 유의 현실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왔는데, 선하게 살아왔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왔는데, 내 앞에 닥친 현실은 너무나 끔찍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 욥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
욥은 의연합니다. 자신 앞에 전혀 주어지지 않는 선한 삶의 보상, 하나님을 경외한 삶의 보상이 없음에도 의연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는 재앙 앞에서도 의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욥기의 핵심적인 메시지 중의 하나인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하게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흥미로운 것은 무엇일까요? 욥기가 전형적인 이중-드라마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욥은 자신 앞에 다가온 재앙이 어떤 연유 때문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욥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건강을 잃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것을 다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살아가는 땅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욥기는 땅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만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욥이 전혀 알지 못하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탄과 같은 이들은 욥의 삶에 의구심을 가집니다. 그의 삶이 거짓이라 말합니다. 보상을 바라고 경외하는 척 하며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을 신뢰합니다. 욥의 삶에서 모든 것이 망가지더라도,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욥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3)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더라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이 살아가는 땅 너머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욥의 까닭 없는 신실함, 까닭 없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진정성을 신뢰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바로 욥기는 이와 같은 이중-드라마의 형태를 통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보상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까닭 없이 선을 행하며 살 수 있습니까? 당신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수 있습니까?” 그리고 까닭 없이도, 손에 잡히는 보상이 없이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선을 행하며 살아갈 우리들에게 욥기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당신은 까닭 없이, 보상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말입니다.”
욥기의 메시지가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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