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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1-2022

[사도신경 강해 #2]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by 홍도사 2023. 4. 22.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닐만한 배경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대다수의 또래들은 아버지, 어머니, 하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마저 교회에 다녔습니다. 더군다나 대다수는 형이나 누나가 교회에 다녔고 많은 교회 내의 아줌마 아저씨들과 인사를 하고 지냈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는 그들의 요람이며 터전이었습니다. 반면 저는 교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교회 내부에는 아는 사람도 전혀 없었습니다. 혈육으로 형이나 누나도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 내에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후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꽤 많은 방황을 해야만 했습니다. 함께 교회를 다니는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들이 저에게는 당연하지 않는 일들이었습니다. 예컨대 남들은 여름수련회 혹은 겨울수련회 일정이 잡히면 대다수 자의와 상관없이 부모님에 의해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모님께 가서 허락을 맡아야 했습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교회수련회를 따라가는지에 대해서 해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 다녔을 때에는 10시 30분에 예배가 시작하면 거의 오후 4-5시까지 교회에 머물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오락실을 갔습니다. 또 당구장을 갔습니다. 축구를 했습니다. 교회 친구들과 꽤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끔은 청년 형들 그리고 교회 아저씨들과 축구를 했습니다. 그 시간 또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부모님의 암묵적인 허락 하에 자유롭게 교회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집에서 돌아오면 부모님께 왜 교회에 이렇게 늦게까지 있어야 했는지를 허락맡아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나이가 들어갔고, 성경을 배워갔고, 또 신앙을 배워나갔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저는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유치부 시절, 아동부 시절, 중등부 시절 교회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껏 그런 궁금증, 신앙과 성경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어쩌면 목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부모님이 교회에 다니지 않은 것을, 그래서 홀로 좌충우돌 부딪히면서 배운 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너무 당연하게 믿는 것을 믿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을 이해하기에 오래 걸렸습니다. 어떤 누군가가 보기에 저의 질문은 집요하게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때 당시에 저는 ‘내가 예수 믿을 자격이 있을까? 내가 그리스도인 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간간히 했습니다. 

남들은 예수를 쉽게 믿는 것 같은데, 나는 예수를 믿기가 어려운 것만 같아서 드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말할 때에는 일반적인 인간의 탄생이 아니라 상당히 신비한 탄생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컨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라던가 아니면 곰이었다가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에게서 태어난 단군 이야기처럼 예수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분명 있습니다. 물론 전혀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읽을 본문 마태복음 족보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다소 다른 맥락에 배치하여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미를 가져다줍니다.

먼저 마태복음 1장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성령으로 잉태’라고 말하지만 (마리아의 남편이 되어야 할) 요셉의 입장에서는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될 마리아가 (자신과 결혼 이전에) 임신한 사건을 (19절)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사건 자체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성적으로 부정한 여인, 쉽게 말해 혼인 전에 임신한 여인으로 의심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마리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닙니다. 결혼도 이전에 임신을 한 매우 예외적이고 의례적이지 않은 여인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예외적이고 의례적이지 않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한 마리아의 이야기가 등장하기 전에 기록된 ‘족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받아들입니다. 우리 대다수는 족보를 읽어가면서 예수님의 아버지, 할아버지,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일종의 ‘혈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단순한 예수님의 혈통에 대해서 말하기 위한 족보 치고는 전혀 이상한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3절) 다말이요, (5절) 라합과 룻이며, (6절)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기본적으로 족보는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장손의 이야기입니다. 형제가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장자, 장손을 중심으로, 남성을 중심으로 족보가 기록됩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말할 때에 네 명의 여성의 이름을 족보에다 은근슬쩍 소개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다말은 누구일까요?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안타깝게도 다말의 남편은 아이를 낳지 못한 상태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문화에 따르면 씨도 없이 과부가 되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위해서, 남편의 동생이 죽은 형을 대신해서 씨를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동생이 씨를 주려고 하지 않다가 죽어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아들 잡아먹는 며느리’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말을 둘러대며 다말에게 씨를 주지 않고 방치해두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다말은 여러 꾀를 내어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갖고, 시아버지의 자식을 잉태합니다. 말 그대로 다말은 매우 독특한 사연을 가진 여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윤리적 기준으로 보면 부정한 일을 저지른 여인이었습니다.
  2. 이어서 라합은 누구일까요?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기생, 요즘 말로 말하면 창녀나 다름 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 이스라엘 백성의 편을 들기로 결심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믿음의 행동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합은 여전히 당시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서 보면 부정한 여인, 창녀였습니다.
  3. 그렇다면 룻은 누구일까요? 그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모압 여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났으면 좋았겠는데, 자녀는 태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남편이 죽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시어머니와 함께 남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남편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보아스라는 남성을 만납니다. 그의 호의 가운데 서로 호감을 주고 받게 되고 사랑에 빠져서 둘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그녀는 다말 혹은 라합처럼 윤리적 기준을 어긴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인생도 매우 독특한 인생이며, 원래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새로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준을 벗어난 여성입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야의 아내는 누구일까요? 그녀는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을 위해 일했던 용병의 아내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녀에게 반하였고, 그녀와 동침하였습니다. 여전히 남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아이가 들어선 것을 알게 되자 다윗은 여러 모략을 꾀하여 남편인 우리야를 살해하고, 우리야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는 전혀 잘못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인생도 전혀 평범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 남편과의 가정 가운데 태어난 자녀가 아니라, 새로운 남편인 다윗과의 새로운 가정 가운데 태어난 자녀가 족보에 이름이 올라갑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마리아. 이들은 여성입니다. 남성이 아닙니다. 또한 이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아간 평범한 여성이 아닙니다. 자의든 타의든 일반적인 성윤리의 기준에서 ‘순결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섯 명의 여성을 두고서 ‘음란하고 방탕한 여인’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분명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는 의도적으로 다섯 명의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의도적인 기록입니다. 다섯 명의 여인의 이름이 포함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구원자는 어떤 모습인가요? 능력과 부를 두루두루 갖춰서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아닐까요? 하지만 성경은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자가 찾아온 맥락은, 여성이 지녀야 할 순결성이 분명 의심될 수 있는 마리아라는 한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의도적으로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를 언급하면서, 단순히 ‘마리아’라는 한 명의 인물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자는 이와 같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평범하지 않은 여성들의 족보 속에서 탄생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왕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왕으로 오셨다면 왕이 아닌 우리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능력자로 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능력자로 오셨다면 능력이 없이 무능한 인간들이라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고, 아기로 태어나셨고, 우리들이 겪는 모든 삶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그런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가던 예수님의 이야기의 족보 속에는 다섯 명의 평범하지 않은 여성들,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거나 손가락질받을만한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오신 구원자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구원자라는 말은, 의로운 사람만 구원할 구원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바르기에 구원받기 합당할 사람들만 구원할 구원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탁월하고 위대하고 월등한 사람들의 족보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온갖 문제와 상흔으로 점철되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기에 딱 좋은 다섯 명의 여성이 포함되어 있는 족보로 오셨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탄생, 동정녀 탄생조차도 손가락질 받기에 딱 좋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손가락질 받기에 딱 좋은 사람, 평범하지 않은 사람, 이해받기 어려운 사람들도 능히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문제있음을, 우리의 평범하지 않음을, 우리의 이해받기 어려운 삶의 처지를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겪는 문제적이고 평범하지 않는 이해받기 어려운 삶에서 태어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수님의 탄생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가능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야기가 매우 기적이며, 단군이나 박혁거세에 준하는 신비한 일이라고 노래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와 같은 평범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만한 여성의 족보라는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저희 집안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사람이 1명도 없습니다. 기껏해봤자 저의 셋째 고모께서 암에 걸리시고, 이혼을 하시고, 교회에 다니고 있을 따름입니다. (나름 삶의 사연이 복잡하시겠지요? 아마 그래서 교회에 다니게 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처럼 목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복음은, 원래 기독교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 예상의 범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 평범한 범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평범하지 않는 사람들, 손가락질 받기에 충분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매주 이와 같은 기이한 예수님의 탄생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의 기이한 삶도, 우리의 이해받지 못하는 삶도, 우리의 평범하지 못한 삶도, 예수님 안에서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고 용납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이한 족보 이야기가 우리들의 기이한 삶에 대한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