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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2021-2022

벧엘, 길갈, 브엘세바가 아닌 여호와를 찾자 (암5:5-6)

by 홍도사 2023. 4. 30.

 

고등학교 2학년 처음 참석한 수련회에서 저는 속칭 ‘은혜’를 받았습니다. 남들처럼 무척 강렬한 체험은 아니었습니다만, 적어도 제 삶을 인도해나가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같다고는 느낄 수 있었지만 딱 그 정도였습니다. 주변 친구들에게 전도를 하기도 했고, 또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기도 했습니다만,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생활은 재밌었고 즐거웠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 겨울수련회를 기다렸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겨울수련회는 밋밋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강렬한 체험을 다시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뒤이어 고등학교 3학년 여름수련회도 다녀왔습니다만 마찬가지로 별 다른 체험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당시에 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갈망했지만 결코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20살이 되자마자 (아직 고등학교 졸업 이전에) 갔던 수련회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하나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은 바로 수련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때에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수련회’와 ‘하나님을 만났던 수련회’를 구분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수련회’는 좋은 수련회며, 성공적인 수련회이며, 기도를 많이하고 준비한 수련회이며, 반면 그렇지 않은 수련회는 실패한 수련회이며, 준비가 미흡한 수련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 신학교에 가면 그때 당시의 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친구들을 간간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수련회’입니다. 수련회에서 얼마만큼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느냐에 방점이 찍혀있습니다. 수련회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난 이후 그들은 무엇을 결단할까요? 바로 다음 수련회에서도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것을 결단합니다. 혹은 다음 수련회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기를 도와주는 스탭으로 자원할 것을 결단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수련회에 계신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365일 24시간을 수련회로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마치 종말을 기다리던 다미선교회처럼, 우리는 매 순간 예배공간에 모여 힘껏, 열정적으로, 뜨겁게 예배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입니다. 예배하기위해서 예배하고, 더 깊고 더 뜨겁게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해야 하는 순간들이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뜨거운 예배, 감격스러운 예배 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하고 사셨나요? 각자 진로를 고민하고, 각자 속한 일자리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또한 결혼을 준비하고. 참고로 저는 최근 기간 동안 아내가 이사를 갈 집을 알아보고, 가계약을 걸고, 계약을 하고, 대출심사를 받는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수련회의 하나님이며, 예배의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예배만 드릴 때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예컨대 아내가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해야 할 집은 하늘로부터 퉁 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진로 문제도, 회사에서의 적응 문제도, 결혼과 출산 육아에 이르는 모든 과정도 하늘로부터 퉁하고 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를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로 ‘일상’을 충실히 살라는 의미인 동시에, 하나님 스스로가 ‘일상’의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오늘 아모스의 예언을 귀담아들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5절) “벧엘을 찾지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라”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던 힙한 장소였습니다. 은혜받을 만한 수련회 장소이며, 정기적으로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기도원으로 생각하면 딱 좋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장소입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기적으로 정복하는 여정에서 무척 의미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 일가가 하나님을 예배했던 장소였습니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벧엘, 길갈, 브엘세바는 옛적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이기에, (마치 그때 근동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하늘과 맞닿아 있는 매우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영적경험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삶의 문제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벧엘, 길갈, 브엘세바에 간다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문제는 수련회에 간다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났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는 결국 ‘신앙’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입니다. 재미있게도 신앙은,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을 만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떤 강렬한 체험을 장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습니다. 잭 레비슨이라는 성서학자가 쓴 <성령과 신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로는 ‘영감받은(inspierd)’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는 성경에 나와있는 ‘영’과 관련된 모든 본문을 당시 근동문화권 내지는 그리스문화권의 다양한 문헌과 비교분석을 시도했습니다. 그 책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성경은 ‘영 체험’을 깎아내리지는 않지만, ‘영 체험’이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영 체험’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영이 충만한, 즉 영감으로 풍성했던 다니엘과 요셉은 ‘영’에 충만한 것 자체가 목적이지 않았습니다. 영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제국의 질서에 길들여지질 않습니다. 요셉은 주인의 여인에게 음욕을 품지 않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시절들을 ‘영’으로 충만하여 견뎌내고 버텨냅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영’으로 충만하여 왕의 음식을 거절하고 물과 채소만을 먹기를 결단합니다. 더 나아가 사자굴에 집어넣겠다는 협박에서도 이겨내고 신앙적 절개를 지킵니다. 다른 문헌들은 ‘영’에 충만한 것 자체에 칭송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에 충만하더라도 우리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바른 것과 옳은 것을 추구할 것을 독려합니다. 아니, 오히려 ‘영’은 우리가 옳은 것과 바른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좋은 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이런 생각을 해보면 좋습니다. 수련회에 가서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적나라하게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수련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쳐봅시다. 그 이후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사람에게는 평범한 삶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집에 오면 설거지를 잘해야 합니다. 빨래를 잘해야 합니다. 청소를 잘해야 합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상사와의 관계, 직장후임과의 관계, 거래처와의 관계를 잘해야 합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설교를 잘 해야 하고, 행정을 잘 해야 하고, 사람들의 요구를 적절하게 잘 간파하고 좋은 결정들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뜨겁고 강렬한 체험이 우리의 일상을 바르게 돌아가도록, 더 나아가 옳게 돌아가도록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모스는 ‘벧엘, 길갈, 브엘세바’가 아니라 (6절) ‘여호와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구약,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서 밑바탕에 깔려있는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떠나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벧엘, 길갈, 브엘세바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았던 것일까요? 수사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벧엘이었습니다. 길갈이었습니다. 브엘세바였습니다. 그들은 ‘영체험’ 자체만 찾았지, ‘영체험’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수련회만 찾았지, 수련회에서 만나주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분 자체를 찾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요? (7절)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된 가치입니다. 이는 쉽게 말하면 솔로몬이 두 명의 여인을 재판한 과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 그리고 가치가 정의롭고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 하지만 아모스는 말합니다. 정의, 즉 공정하게 선포되어야 할 판결이 ‘쓴 쑥’, 이른바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독으로 변해버렸다는 겁니다. 공의, 상호 간에 충실해야 할 예의범절 또한 땅에 내팽겨쳐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수련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돌아와서 상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거래처에게 사기를 쳐먹는 겁니다. 시험을 칠 때 컨닝을 하고, 페이퍼를 쓸 때에 표절을 하는 겁니다. 해피캠퍼스에서 자료를 구매해서 표지만 갈아서 제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수련회에서 기대했던 하나님과의 만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들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예전보다 더 크게 거래처와의 거래에서 사기치기를 욕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상사에게 더 큰 거짓말을 뻔뻔하게 할 수 있기를 욕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서 해피캠퍼스에서 더 좋은 자료를 가져오기를, 더 좋은 족보를 컨닝하기를 욕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욕망을 기대했습니다. 욕망을 욕망했습니다. 따라서 아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5절)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욕망만을 얻고자 예배를 드리고, 수련회를 떠나게 된다면, 그에 응당한 대가가 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앞서 말한 ‘정의와 공의’는 구약에서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적어도 한국교회 내에서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보급하게 만든 것은 김근주 구약학 교수님입니다. 저 또한 그 분의 강연과 글을 읽기 전에는 ‘정의와 공의’에 대해서 썩 많은 생각을 해보질 못했었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신앙을 일종의 ‘행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제가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경험을 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 꼭 그러했습니다. 저는 저의 모의고사 성적 정도면 금오공과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장학금을 받으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위에 있는 대학교라 할 수 있는 경북대학교 혹은 부산으로 치면 한국해양대학교나 부경대는 무척 낮은 과 아니면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3 수험생활 가운데 놀라운 경험을 했고, 여차저차 한국해양대학교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즉, 저에게 신앙은 행운이었습니다. 제가 뿌리지 않은 것을 수확하게 만드는 마법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의 개념을 배운 이후 구약과 신약 전반에 걸쳐서 ‘심는데로 거두는 법칙’에 대한 본문이 얼마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선악과 열매를 먹은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선포되는 저주의 메시지는 ‘심는만큼 거두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주와 상반되는 축복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바로 노력하는만큼의 대가를 얻는 것이 바로 복받은 삶의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노력에 정당한 대가를 거두게 해주실 것을 믿고 ‘정의와 공의’에 근거하여, 즉 바르고, 성실하게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예컨대 저는 기도해서 받은 순간의 영감으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저의 설교의 원천은 매일 꾸준히 쌓아나가는 공부에 있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50페이지 정도의 책은 읽는 편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에도 왠만하면 성경본문을 차근차근 공부해나가면서 문맥을 파악합니다. (물론 가끔은 시간의 부족 때문에 그러지 못할 때도 있지만요.)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매주 설교의 시간마다 기도를 통해서 요행만 바라는 설교자가 기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성경적인 설교자인가요? 때로는 설교가 난해하고 어렵더라도 매일 꾸준히 공부하고 책을 읽으며 내공을 쌓아가는 설교자가 기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성경적인 설교자인가요? 성경은 기독교 신앙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단순히 ‘요행’의 차원에서 해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 신앙은 우리가 바른 것과 옳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셉과 다니엘이 영에 충만하여 제국의 문화와 타협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윗이 궁정정치의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어떻게든 깨끗한 영혼을 유지하려고 분투했던 것처럼, 여호와 신앙은 결국 삶의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모스는 벧엘, 길갈, 브엘세바가 아닌 여호와만 찾을 것을 촉구하면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14-15절)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이는 (벧엘, 길갈, 브엘세바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신앙의 바른 방향을 보여줍니다. 선과 악이 있을 때에 선을 선택하는 것, 진실과 거짓이 있을 때에 진실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 신앙입니다. 참고로 이런 아모스의 선포의 문맥은, 북이스라엘의 심판 가운데 있습니다. (3절)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행군해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행군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인구가 모두 사라질만큼 거대한 재앙이 닥친 북이스라엘을 향해, 아모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선을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이제라도 거짓을 거절하고 진실을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뻔질나게 벧엘, 길갈, 브엘세바를 왔다갔다 하면서 북이스라엘의 장래를 위해 기도했던 왕궁의 행렬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과 고관대신들은 함께 열정적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뜨거운 영의 체험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진정 여호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요행에 있었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으로부터, 온갖 열강의 침공으로부터, 운좋게 살려달라는 외침을 그들은 벧엘에서, 길갈에서, 브엘세바에서 내뱉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찾아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며,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쉽게 말해 국가 내의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먹고 살게 해주는 바른 정치를 시행하는 것이 (적어도 아모스가 보기에는) 절실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부흥의 시기에, 가장 잘 살던 시기에, 빈부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본 채로, 가장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찍었던 시절에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굶어 죽는 것을 방만히 내버려둔채로, 요행을 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이제라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고,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면, 망해도 희망이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참고로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바처럼 이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인 동시에, 북이스라엘이 망한 이후로 똑같은 길을 걷고 있던 남유다를 위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정말 하나님을 알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았으면 그들은 역사 속에서 정녕 살아남았을까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한 명의 목사가 아니라, 마치 정치논객이 된 입장에서 당시의 국제적 문맥을 고려해보면 그렇게 하더라도 결국은 망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북이스라엘이든 남유다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정치를 하다가 멸망을 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할 말이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져버린채로 살다가 멸망을 당하고 나니 자책감과 후회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망할 때는 망하더라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정당하게 대우하려고 애썼다면,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바른 정치를 실천했다면 하는 후회와 자책감이 아모스서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물론 이는 단순한 후회와 자책감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온 나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신학적 회고입니다. 어차피 모든 것을 잃은 처지에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정의와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정정당당하게 사는 삶입니다. 공동체 내에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정당하게 돕는 삶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역사의 반성을 통해, 여호와 신앙이 바로 ‘올바른 삶’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입니까? 혹여나 제가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단순히 ‘영적 경험’의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물론 저는 매주 드려지는 우리 예배에 영감이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을 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우리의 뭉쳐진 심령이 뻥 하고 뚫리는 경험이 있고, 여러분의 삶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영감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는 예배가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머물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기대해야 할 것은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날 필요는 없습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은혜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정의와 공의에 근거한 바른 삶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얼마나 올바르게, 진실하게, 순결하게 살아가느냐의 여부입니다. 우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바른 것들을, 옳은 것들을, 진실한 것들을 꾸준히 심어야 합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들을 거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요행을 기대하며, 나쁜 것들을 심는다면 결코 좋은 것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에 머문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드려지는 예배가, 우리의 바른 삶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른 삶을 살아내기 위한 동력으로 기능했으면 좋겠습니다.

  • 결단찬양 :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